171화
‘하필 뒤에 저리 많은 이들이 듣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이미 모든 이들이 레블린의 말을 들어버린 이상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다. 너무 쉽게 레블린의 말을 허용했다는 후회 속에서 에이셰스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재판을 앞두고 다른 가문들과의 연대가 중요해진 상황이라 물밑 조율이 오가는 중이라 들었는데 디아카 가가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일이 귀찮아져.’
하지만 레블린의 말이 사실일 경우에는 더 큰 문제였다.
‘그건… 또 다른 의미로 전쟁이 될 테니까.’
에이셰스 개인이야 꼴 보기 싫은 경쟁자였던 레노어를 누가 죽였다 한들 큰 상관이 없었고 오히려 가문을 좀 더 빨리 집어삼킬 만한 상황을 만들어 준 데에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은 지경이었지만, 가문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황제의 권력이 너무 세지지 않도록 오랫동안 대적해 온 역사를 공유하는 4대 공작가는 사실 황태자 간택 이후부터 예전만큼 사이가 끈끈하지 않았다. 승리를 얻은 디아카 가가 날이 갈수록 콧대를 높이는 모습을 보며 아페토를 비롯한 나머지 3공작가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은 흔하디흔하다. 지금은 잠잠히 있다지만 카치안 황태자가 황위에 오른 이후에는 어떨까. 디아카 가가 정말로 다른 가문의 날개를 꺾으려 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요 몇 년간 아페토 가에서 디아카 가의 세력이 강한 동부에 집중적으로 사람을 보내 분위기를 살피고 젊은 귀족들을 회유해 왔던 일 또한 그런 경계심이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에이셰스는 아페토 공작이 카치안의 황제 즉위 이후의 일을 걱정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아온 바 있었다. 아페토 공작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레블린의 말을 듣자마자 진위여부 따위 상관 않고 믿었으리라.
이번에 가문이 저지른 사건 몇 개 정도가 재판에서 밝혀져 휘청거리는 정도는 괜찮다. 에이셰스는 이번 사건에 손을 대지 않았으니 그가 추문을 이유로 아버지와 그의 세력을 대충 처리하고 공작이 되고 나면 빠르게 수습 가능한 문제였다.
그러나 레노어를 죽인 이가 황제 측이 아니라 디아카 가 쪽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가 물려받을 가문을 수습하기 전까지 가장 필요한 건 보호해 줄 다른 가문들과의 연대와 시간이었다. 그런데 만약 황태자를 등에 업은 디아카 가에서 약해진 아페토 가를 노려 공격하려 한다면, 과연 그들은 막아낼 수 있을까?
벌써부터 아페토 가를 제 것이라 여기며 주인처럼 생각하고 있는 에이셰스의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레블린의 말이 사실일 경우 아페토 가는 이 상황을 결코 쉽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린 에이셰스는 제 속내가 키시아르에게 훤히 읽히고 있는 줄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예상대로, 이 일이 카치안 황태자 단독으로 저지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도 못 하는 모양이군.’
이미 카치안 황태자가 홀로 일을 꾸몄음을 밝히고 접선을 시도했다면 에이셰스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으리라. 그러나 황태자는 다행히도 아직 그렇게 하지 않은 모양이었고, 키시아르는 그 틈을 타 곧장 손에 넣은 카드를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
남은 건 결과를 보는 일뿐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그 편지를 보고 판단해야겠다.”
때를 맞춰 생각을 끝낸 에이셰스의 대답에 레블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편지를 건네주었다.
“당연히 그러셔야겠지요. 편지에 묻어 있던 독은 이제 거의 날아갔다고 하지만 형님께서는 몸이 약하시니 조심하십시오.”
레블린의 말에 움찔한 에이셰스가 이내 편지를 신경질적으로 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의 손끝에 향했다. 뒤쪽에 몰린 구경꾼들은 에이셰스가 읽고 있는 편지를 조금이라도 훔쳐볼 수 있을까 싶어 체면도 잊고 애타게 발돋움질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편지의 양면을 모두 읽은 에이셰스 샨 아페토는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해진 얼굴이 되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 예정된 장례식은 이대로 치를 수 없을 듯합니다. 참석해 주신 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추후 가문에서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1공자?”
“정말로 황태자께서……? 그렇다면 디아카 공작가도……?”
신전 측 사람들의 아우성과 호기심 어린 귀족들의 질문을 모조리 무시한 에이셰스는 아직도 열려 있던 관 안의 시신을 흘긋 바라보았다.
“저 관은 이제 도로 거두고 아페토 본저로 옮겨라.”
“예? 신전이 아니라 아페토 본저로 말입니까?”
“그래. 이 이상 반문하는 놈의 입과 귀는 쓸데없는 장식일 테니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알아듣도록 하지.”
“예, 예! 알겠습니다.”
겁에 질린 일꾼과 하인들이 재빨리 레노어의 시신이 담긴 관 뚜껑을 닫고 줄행랑쳤다. 남겨진 에이셰스는 편지를 도로 건네주기 전, 날카로운 눈빛으로 레블린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너는 이 편지를 받은 즉시 나나 가문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했어야 했다, 레블린. 네 덕에 일이 더욱 시끄러워지겠구나.”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왜 그래야 하냐고? 네가 아무리 다른 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해도, 결국 너는 아페토 가의 사람이야. 가문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도 여즉 그곳에 몸을 담다니, 수치스럽지도 않으냐? 진짜 마병단원 따위가 될 셈은 아닐 테고.”
에이셰스의 질문에 레블린은 웃음을 터트렸다.
“수치라. 그거 아십니까 형님? 저희가 이토록 긴 대화를 나누어 본 일이 태어난 이래 오늘이 처음이라는 것을요.”
“그게 뭐가 어떻다고.”
에이셰스의 날카로운 답을 들으며 레블린은 보란 듯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아페토 가에서 빠져나와 마병단에 몸을 의탁한 이래 시간이 그리 오래 흐르지는 않았으나, 어떤 곳인지 파악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간 레블린은 난생처음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녀 보았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밥을 먹었다. 거칠고 더러운 평민 출신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배웠는데 정작 마주친 이들은 너무나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는 아페토 가 때문에 큰일을 겪었다는 데브란 같은 단원조차 처음에만 조금 불퉁했을 뿐, 레블린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게 된 이후에는 누그러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심사가 뒤틀려도 아랫사람들을 때려 죽이고 레블린 같은 아이는 차라리 빨리 죽어 주는 쪽이 낫다 말하던 가문 사람들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다.
연인 니온 또한 아페토 가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 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였던가. 그의 안심하는 표정을 볼 때마다 레블린은 단신으로 유더를 찾아갔던 그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에 몇 번이나 감사했다.
“저는 제가 아페토의 일원이라 느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이 바로 제가 있을 곳이라 느낍니다. 제가 정식 마병단원이 되지 못한다 하여도 다시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 차라리 그냥 죽었다고 여겨 주십시오.”
“뭐?”
동생의 말에 에이셰스는 기가 막혔다. 펠레타 공작이 아이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신이 돌아도 단단히 돈 모양이었다.
“하. 그래. 더러운 평민들과 지내는 게 그리 좋았다니 알만하구나. 배신자로 불리우는 게 그토록 좋다면 말리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에이셰스는 레블린의 태연한 감사 인사에 눈가를 파르르 떨었으나, 이내 몸을 홱 돌렸다. 화가 치밀어 곧장 인사도 없이 돌아가려던 그를 막은 것은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던 키시아르였다.
“이런. 간만에 만난 형제끼리의 대화이니 좀 더 길어질 줄 알았는데, 벌써 가려는가?”
“……배려에는 감사합니다만, 돌아가서 할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아쉽군. 자네가 일전에 보낸 연락을 받고 가문 내에서 일어난 불의에 이토록 공정한 시선을 가진 이가 있었다는 데 감탄하여 제대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날을 기대했었는데 말이네.”
키시아르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마주한 순간 에이셰스는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움찔 떨었다.
“그건…… 상황이 이러한 지금 여기서 하실 말씀은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에이셰스는 키시아르에게 보냈던 제 편지 내용을 떠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키시아르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그런가. 미안하게 되었네. 그래도 오늘 자네의 명석한 판단 덕에 내가 그간 시달려 온 불쾌한 소문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게 된 고마움은 잊지 않고 있을 테니, 언제든 편히 다시 연락하게. 나는 그때 자네가 보내온 말들에 아직도 큰 흥미가 있거든.”
“…….”
“직접 마병단에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는 쪽도 좋겠지. 혹시 모르지 않나? 자네도 마병단에 와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 레블린처럼 건강에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고.”
건강이라는 단어에 순간 눈에 띄게 반응하는 에이셰스를 보며 키시아르는 한량 같은 얼굴로 웃었다. 에이셰스는 아페토 가의 미래를 쥔 야심가였다. 그러나 아버지를 거꾸러뜨릴 생각을 할 만큼 대담한 그도 건강이라는 약점 앞에서는 평정을 지키기가 영 어려워 보였다. 건강하게 빛나는 레블린의 얼굴을 본 이후부터 그의 시선이 얼마나 집요하게 타오르고 있었는지 본인은 과연 알고 있을까.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보고 말았으니 오래 참지는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키시아르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시종의 부축을 받아 사라지는 에이셰스의 뒷모습을 보며 이제 그 또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자, 그러면 우리도 이제 돌아가 볼까. 모두들 수고했네.”
“아닙니다!”
“저희를 함께 데려와 주셔서 기쁩니다!”
레블린을 비롯한 마병단원들이 일제히 눈을 빛내며 입을 모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