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본래 제국 귀족들의 장례식에서는 식이 끝나기 전에 친지들이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관 뚜껑을 잠시 열어 꽃을 놓는 전통이 있었다.
고인의 몸이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된 상태만 아니라면 언제나 이루어지는 일이었기에 열린 관 안에서 드러난 레노어의 시신도 겉보기에는 마치 잠을 자고 있는 듯 보이도록 잘 수습된 상태였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대체 저기서 뭘 알아내겠다는 거지?’
키시아르는 그를 향한 수많은 의혹의 시선 따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가만히 선 채 레노어의 시신을 느긋이 훑어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돌려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우락부락한 인상의 단원에게 가볍게 손짓하며 무언가를 명령했다.
“데브란 하르투데. 차례가 되었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자… 잠깐! 뭘 하려는 겁니까!”
그리고 데브란이라 불린 단원은 그대로 성큼성큼 나아가 저를 막으려 하는 사제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바닥 위에 불러낸 큰 불꽃을 그대로 관 안의 시신 가까이에 불쑥 가져다 댔다.
“허억. 저 무슨……!”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커다란 비명과 숨 막히는 소리가 들려오며 소란이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일제히 같은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펠레타 공작이 대담하게도 시신을 태우러 왔구나……!’
‘새로운 사인을 알아냈다느니, 없던 편지를 받았다느니 했던 건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대체 무슨 짓을……!”
관 뚜껑을 열도록 허가해 준 에이셰스조차 너무 놀라 소리쳤을 때, 키시아르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아직 남아 있었군.”
“……어?”
너무나 침착한 목소리에 놀란 이들이 상황을 외면하느라 돌렸던 고개를 바로 하고 시선을 조심스럽게 한곳으로 향했다. 데브란이 불러낸 큰 불꽃은 정확히 시신의 몸 앞에 멈춰 있는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데브란. 보이는가?”
“네. 보입니다. 과연 단장님의 말씀대로군요.”
데브란이 흥분한 기색으로 중얼거리자 눈앞이 검어져 하인의 부축을 받고 있던 에이셰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섰다.
“펠레타 공작 전하.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한 마디 말도 없이 관에 불을 지르려 하시다니요. 이런 행동이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아시고 하신 겁니까……?”
“이런. 불을 지르려 하다니. 단어 선정이 유감스럽군. 나와 내 단원들은 레노어 샨 아페토의 시신에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네. 불을 불러낸 건 아직 남아 있는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일 뿐이야. 이제 확인하려 했던 게 드러났으니 자네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겠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가. 에이셰스는 등 뒤에서 저와 같은 의문을 지니고 술렁대는 구경꾼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사이에 약한 심장에 무리가 갔는지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고작 몇 발짝도 걷지 못하는 티를 다른 이들 앞에서 내고 싶지 않았다.
“…날 부축해 저곳까지 안내해라.”
“예, 공자님.”
에이셰스는 만약 레노어의 시신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당장 돌아서서 큰 소리로 키시아르의 무례함을 고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을 불러낸 마병단원 바로 옆에 섰을 때, 그는 간신히 다시 뛰고 있던 심장이 다시 한 번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입을 벌렸다.
“이… 이건.”
“보이는가?”
“이게… 대체 뭡니까. 빛이…….”
분명 깨끗해 보였던 레노어의 시신이 불 아래에서 기이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피부 아래에 보이지 않는 얼룩이 숨어 있었던 듯한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그게 바로 내가 확인하려던 증거라네. 망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독잔을 마시기 전 1차로 먼저 다른 독을 흡수했었다는 증거지.”
“다른… 독이라고요?”
“두둘렘이라는 버섯을 갈아 만든 독. 들어본 적 있나?”
없었다. 처음 듣는 이름에 에이셰스가 멍한 표정을 짓자 키시아르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주로 물에 개거나 가루 형태로 피부에 흡수시켜 사용한다지. 흡수된 뒤에는 독이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피부에 며칠 정도 흔적이 남는데, 그 흔적은 불 아래에서만 볼 수 있다네. 사실 효과는 미약하여 심한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이지만, 그 정도로도 원하는 바를 이루기에는 충분하지 않았겠나?”
심한 갈증. 에이셰스는 키시아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깨달았다.
“누군가, 레노어에게 그 독을 흡수시킨 뒤 독잔을 마시게 유도했다는 뜻입니까?”
“그렇네. 아마 망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것을 흡수했겠지. 본래대로라면 물을 아주 많이 마시고, 조금 고생하면 나았을 테지만 하필 주변 환경이 좋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된 듯하군.”
에이셰스는 레노어의 시신에서 빛나는 얼룩이 목 부근과 가슴에 교차하여 모아 놓은 손에 가장 많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새파랗게 질린 손가락과 손톱 아래에서 유난히 진하게 빛나는 얼룩을 보고 있으려니 다시금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 말씀하셔도… 현재 공작 전하에 대해 사람들이 어찌 말하고 있는지 모르시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그 말씀을 여과 없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 내가 레노어 샨 아페토를 불러들여 독잔을 먹였다는 그 소문 말이지.”
너무나 노골적인 언급에 놀란 구경꾼들이 웅성댔다. 에이셰스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이 독의 정체를 지금에서야 밝히는 것조차 계획된 일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 이것이 내 결백을 밝힐 결정적 증거는 될 수 없음도 알고 있네.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로 분위기를 단숨에 가라앉힌 키시아르가 팔짱을 낀 채 등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자네의 막냇동생이 편지를 받았다고. 레블린, 나와서 그것을 보여 주도록.”
“……레블린?”
태양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지닌 키시아르의 뒤쪽, 키와 덩치가 특출한 단원들 사이에 가려 여태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작은 소년이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앞으로 나섰다. 그를 지키듯 옆에 선 또 다른 소년과 함께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에이셰스는 그제야 처음에 하인이 달려왔을 때 했던 말은 레블린과 펠레타 공작이 함께 이곳에 왔다는 말이었음을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각성자가 되면서 건강을 되찾은 막냇동생의 얼굴에는 병색 대신 단호함만이 서려 있었다. 언제나 말 한 마디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겁먹은 얼굴로 피하던 모습만 기억했던 에이셰스는 상당히 떨떠름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레블린, 네가 보여줄 것이라는 게 뭐냐.”
“돌아가신 레노어 형님께서 제게 보내신 편지입니다. 형님께서는 파티에 가시던 날, 궁에 들어가기 직전 이 편지를 하인에게 맡겨 무슨 일이 생길 시 제게 가져다 주라 명하셨다 합니다.”
레블린이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잘 보이도록 들어올렸다.
“신께 맹세코 이 편지는 레노어 형님께서 직접 쓰신 물건이 맞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통해 형님께서 그날 누구를 만나러 가셨던 것인지 깨달았고, 단장님께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장님은 제가 드린 이 편지에 묻어 있던 독 성분을 알아차리신 뒤 몸소 조사해 주셨죠. 덕분에 진실을 빠르게 알 수 있었던 겁니다.”
사실은 가케인을 통해 그 편지를 입수한 키시아르가 먼저 내용을 확인하였고, 이후 레블린에게 알려 주면서 이번 일을 계획한 것이었기에 그 말은 미리 짠 대사일 뿐이었으나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블린은 레노어의 편지 따위에는 처음부터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레노어가 쓴 편지의 반은 헛소리였고, 반은 그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 한심한 편지가 이렇게라도 키시아르의 결백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면 차라리 다행일 터였다.
애초에 올 생각도 없었던 레노어의 장례식에 와서 이런 연극을 또 하고 있는 이유 또한 그와 연인을 구해준다는 약속을 지켜 준 키시아르의 요청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그래. 레노어가 죽었던 날 수행하러 갔던 하인이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다고는 들었었지, 그 녀석이 편지를 네게 가져다 준 모양이구나.”
레블린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건 에이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등 뒤에서 숨죽여 그들을 바라보는 귀족들을 흘긋 돌아본 뒤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그래서 그 진실이란 게 무엇이지? 레노어를 그날 파티에 부른 이가 거기에 적혀 있더냐?”
“그렇습니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년의 목소리가 모든 이들의 귀에 잘 들릴 만큼 무겁게 울려 퍼졌다.
“레노어 형님을 그날 그곳으로 부르신 분. 형님께 보내신 편지에까지 독을 묻혀 교묘하게 일을 꾀하신 그 분은, 지금 광휘궁에 계십니다.”
“…….”
너무나 충격적인 말을 들으면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여태까지 두런두런 목소리를 낮추어 저들끼리 떠들어 대던 이들도, 분한 기색을 참지 못하던 신전 측 사람들도, 그리고 레블린이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에이셰스도 순간적으로 모두 침묵에 휩싸여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뒤 겨우 먼저 입을 연 이는 에이셰스였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한 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너 하나의 실책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알고서 한 말이겠지?”
“레노어 형님의 편지에 쓰여진 사실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황태자가 왜 그런 짓을 했겠는가? 레노어와 딱히 친분도, 원한도 없었던 데다 굳이 재판을 앞둔 아페토 가에 연락을 해야 할 목적이 있을 리 없는 이였다. 게다가 황태자는 그날 독잔을 받을 뻔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디아카 공작가라는 걸출한 뒷배를 두고 있었다.
황태자가 된 뒤 단 한 번도 디아카 공작보다 앞에 나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얌전하고 인형 같은 그 소년이 레노어를 불러들인 진짜 범인이라 지목하다니.
그건 즉 디아카 가 전체를 대놓고 공격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로 들릴 소지가 다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