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마음속이 복잡하게 술렁였다. 이전 생에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는 안도감, 향이 있는 오메가로 발현한 게 과연 전보다 좋은 일일지 끊임없이 계산하고 재기 바쁜 불안감, 아직 미열이 남은 몸이 주는 피로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탓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생각들을 제치고 결국 남겨진 건 하나뿐이었다.
발현의 고통 도중 키시아르와 나누었던 대화, 그가 보여준 인내와 배려, 그리고 마지막까지 아무렇지 않게 웃던 얼굴이었다.
‘내가 단장이었을 때 이런 일이 생겼다면 나는 그처럼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못 했겠지. 단원 하나를 위해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들이었다. 하지만 키시아르가 유더를 위하여 아무렇지 않게 해낸 일들이기도 했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다른 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음을 안다. 그러나 도무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다시 돌아온 이후 키시아르와 마병단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던 것과 별개로, 그는 언제나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도록 몇 개의 벽을 마음에 세워두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샌가 그가 세워두었던 모든 벽이 모조리 꿰뚫려 구멍이 난 걸 늦어도 한참 늦게야 깨달았다. 몹시 허탈했지만 이상하게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라 문제였다.
‘이런 일을 겪고도 아무런 이끌림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쪽이 더 이상하겠지.’
아무리 감정표현이 희미한 이라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때로는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마음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다. 바로 지금 같은 때였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발현으로 인한 사고가 일어난 뒤부터 어둠 속에 묻혔던 어떤 감정. 유더는 11년의 세월을 되돌려 다시 한 번 찾아든 기시감의 이름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빛나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느끼는 맹목적인 매혹이었다.
***
수확철 축제는 마지막 날 열린 특별 수여식 파티에서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독살 사건으로 급작스레 마무리되었다.
대체 그날 레노어 샨 아페토에게 편지를 보내 파티에 불러들인 이는 누구이며, 누가 그를 죽였는가? 황태자의 잔에 독을 타 보내려던 이는 또 누구이고 무엇을 원해 그런 일을 했는가를 두고 수많은 이들이 물밑에서 은밀하고도 시끄럽게 입을 보탰다.
심지어 파티 황태자의 잔을 날랐던 시종이 아무도 모르게 살해당한 채 발견되면서 그 의혹은 더욱 깊어져 아페토 가의 재판조차 화제에서 반쯤 밀려났을 정도였다.
사실 그 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대부분은 모든 일의 배후가 황제이고, 실행한 건 그의 동생인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이리라 짐작했다. 그날 뒤늦게 발견된 레노어의 편지가 그 추측에 크게 힘을 보탰다.
만약 정말로 황제가 키시아르를 내세워 황태자와 4대 공작가를 건드리려 한다면 과연 그들이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여태까지 물밑에서야 어쨌든 겉으로는 아무런 마찰도 없이 양자인 황태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듯 보였던 황제가 갑자기 이런 일을 저지른 저의는 무엇인지, 앞으로 상황이 어찌 변할지를 두고 수많은 귀족들이 양측의 움직임을 신중히 주시했다.
“폐하께서야 당연히 디아카 가에서 내세운 분을 양자로 들이고 싶지 않으셨겠죠. 몇 년 전 황태자 간택 시기 때도 그쪽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말이 좀 많았던가요? 아직 어리신 전하께서야 아무런 죄도 없으시다지만, 디아카 가는 요즘 너무 안하무인했어요.”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황제 폐하 측에서는 차라리 황후 폐하의 본가인 헤른 공작가에서 내보낸 이를 뽑고 싶어 했었다는 소문이 있었죠. 간택이 확정된 후 그쪽에서 내보낸 후보가 갑자기 죽지 않았었던가요?”
“어디 헤른 가의 후보뿐이던가요? 사실상 그때 나섰던 다른 후보들은 모두 다 좋지 않은 길을 걸었죠.”
“그렇다 해도 놀랍네요. 소문대로 폐하의 건강이 드디어 나아지신 걸까요.”
죽은 이를 추모하는 슬픔의 목소리보다 호기심에 가득한 수군거림만이 가득한 신전 안에서는 레노어 샨 아페토의 장례식이 막 시작을 앞두고 있는 중이었다.
이름 높은 공작가의 자제를 위한 장례라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기 그지없는 작은 신전이었으나, 참석객은 대부분 흥미로운 상황을 구경할 수 있을까 싶어 참석한 이들 뿐이었기에 안타까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노어의 아버지 아페토 공작은 봉쇄한 가문의 문을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고, 형제인 1공자 에이셰스만이 느긋한 승자의 얼굴로 앉아 제게 아부하러 온 이들의 관심을 즐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머리에 쓴 검은 베일 아래 입을 감추고 온갖 추측을 마구 해댔다.
“그러고 보니 죽은 이의 동복형제라던 그 셋째는 아주 안 오려는 걸까?”
“펠레타 공작 아래 의탁했다니 안 와도 이상하지 않겠지. 아쉽군. 와서 무어라 말하는지 반응을 꼭 구경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쪽도 참 대단해. 펠레타 공작이 일을 저지른 게 사실이라면 셋째가 제 형을 사지로 몰아넣은 이와 손을 잡은 셈 아닌가?”
“그것참 대단한 추문이 되겠어. 하기는, 그게 귀족다운 모습일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장례식은 대체 언제쯤 시작하는 거지? 다른 때였으면 벌써 관이 들어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너무 늦는걸.”
한참 떠들어 대던 누군가가 갑자기 내뱉은 의문에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도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군. 언제부터 시작이라고 했었지? 정오던가?”
“맞아. 이미 한참 지났어. 이것 참. 식이 끝나고 나서 갈 곳이 있었는데 더 늦어지면 그냥 가야겠군.”
웅성거림이 높아지자 1공자 에이셰스가 하인을 불러 장례식을 담당하는 신전 측 사제들을 찾아오라 명했다. 그러나 사라졌던 하인은 잠시 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타나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송구합니다, 공자님! 관이 이곳으로 오던 도중 레블린 공자님과 펠레타 공작 전하를 만나 멈춰선 상태라고 합니다.”
“뭐?”
병약한 티가 나는 에이셰스의 얼굴 위로 신경질적인 분노와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무슨 소리냐. 레블린과 펠레타 공작이라니.”
“그것이…….”
하인이 어쩔 줄 모르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답답해진 에이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되었다. 내가 가서 확인해야겠군. 앞장서라.”
에이셰스가 급히 빠져나가자 서로 눈치를 보던 객들도 하나 둘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토록 자극적이고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전 바깥쪽의 긴 회랑으로 나아간 에이셰스는 이내 두 무리의 사람들이 날카롭게 대치 중인 모습을 발견하고 걸음을 빨리 하여 그곳으로 향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분은 에이셰스 샨 아페토 1공자님이십니다!”
에이셰스의 하인이 목소리를 높여 그가 누구인지를 크게 외치자 겨우 말다툼을 하던 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한쪽에는 검은 관을 든 일꾼과 사제들이, 그리고 반대편에는 마병단 단복을 입은 이 몇 명과 멀리서도 눈에 띄는 장신의 미남이 서 있었다.
에이셰스는 그가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임을 곧장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일전에 펠레타 공작에게 레노어를 견제할 목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레노어가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지킬 필요가 없어진 제안이 되었으나, 알면서도 껄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자네가 1공자로군. 직접 이리 가까운 곳에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던가?”
“…예. 그렇습니다. 한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요? 죽은 동생의 장례식이 전하 때문에 아직 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납득할 만한 답을 주시지 않는다면 이 무례한 행동에 대해 반드시 책임져 주셔야 할 것입니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네. 안타깝게도 바로 오늘 아침에서야 저 관 안에 누운 가엾은 이가 어찌 죽게 되었을지를 알게 되어 바로 달려왔는데, 잠깐만 확인해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요청하였음에도 저들이 절대로 뚜껑을 열어줄 수 없다 버티니 방법이 없지 않겠나.”
“예?”
레노어가 죽게 된 이유라니.
“제 동생은 독이 든 잔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전하께서도 계셨다 기억합니다만?”
에이셰스는 신중한 태도로 당혹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반문했다.
“그런 줄 알았지. 나에게 큰 도움을 준 임시단원이자 자네의 막냇동생인 레블린에게 레노어 샨 아페토가 죽기 전 보낸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편지라니요?”
“아직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 자세한 사항은 지금 당장 알려줄 수 없네. 마침 이곳까지 와 주었으니, 자네가 저 관을 잠시 열도록 허락해 주지 않겠나? 그러면 자네 또한 내가 허투루 이곳에 오지 않았음을 알게 될 거라 장담하지.”
키시아르가 미소를 짓자 그의 주변에 서 있던 마병단원들이 기세등등하게 관을 짊어진 일꾼들을 노려보았다.
‘진짜인가? 아니면 레노어를 불러내어 죽인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라 벌인 대담한 정치적 쇼인가. 어떻게 해야 하지?’
본래대로라면 장례식을 중지하고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대화하자고 말하는 쪽이 맞겠으나, 키시아르는 그렇지 않아도 아페토 가를 재판정에 세운 이였다. 에이셰스는 이런 예민한 시기에 키시아르와 홀로 독대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의 분노를 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뒤쪽으로 몰려든 손님들이 웅성대며 구경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신경질이 났을 시끄러운 목소리들을 듣자 겨우 당황했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그래. 나 하나라면 몰라도 저 많은 시선 앞에서 눈속임이나 허황된 짓을 벌이기는 힘들겠지. 죽은 놈의 명예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니, 그냥 여기에서 일을 마무리하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다른 사안도 아니고 비명에 간 동생의 사인을 새로이 밝혀낼 정보를 알고 오셨다니 저로서도 무시할 수 없군요. 잠시 관을 열도록 허가하겠습니다.”
“공자!”
에이셰스와 안면이 있던 사제 한 명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으나 에이셰스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관을 내려라!”
결국 신전 한복판에서 호기심에 찬 사람들의 시선 앞에 관 뚜껑이 열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