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키올레 본인이 듣는다면 분노에 미쳐버릴 법한 평가였으나 유더는 그 말에 동의하는 입장이었기에 그저 ‘네. 신경 쓰지 마십시오.’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답의 무엇이 우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또다시 웃음이 짧게 스쳤다.
“좋군. 그 답을 들으니 정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회복했다는 게 느껴져.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처음으로 2성 발현을 하다 목숨이 위험해지는 이가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말이야.”
“…제가 말입니까?”
기절해 있던 동안 있었던 일은 기억에 하나도 남지 않은 데다 시간상으로는 그저 하루 반에 불과했기에 키시아르의 말이 잘 실감가지 않았다. 어색하게 반문하자 키시아르가 믿지 못하겠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발현이 너무 단시간에 이루어진 탓인지 고통이 엄청난 듯했어. 오죽 심각했으면 발정이 함께 겹쳐 열과 향이 덩달아 높아지는데도 시종들의 접촉에 전혀 반응이 없었겠나.”
“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만.”
“자네에게는 그쪽이 다행일 거야. 도움이 될까 싶어 해열제와 진통제를 몇 번이나 먹였지만 효과가 없는 듯해 나중에는 포네사 가루까지 타서 먹였으니까.”
포네사는 극한의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에게나 쓰는 강력한 마약성 진통 성분을 지닌 약초였다. 제국법에 의해 재배가 엄격히 제한되어 구하기도 힘든 물건을 가져다 먹였다니. 정말로 제 상태가 심각하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유더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몸이 아팠던 게 죄송할 일은 아니지. 오히려 사과는 내가 하고 싶네.”
“단장님께서 무엇을 사과하십니까.”
뜻밖의 답에 눈을 들자 약간 씁쓸해 보이는 키시아르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발현 도중이었던 자네가 알파 각성자인 나를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상황이 상황이라는 이유로 모른 척하고 여기까지 데려온 것.”
혼자 임무를 보낸 게 미안하다 말했다면 그건 당연히 제가 맡아 했어야 할 일이었으며 후회 따위는 조금도 없다고 답할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답에 정신이 멍해졌다.
“……단장님. 그건.”
알파 각성자를 향한 경계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이전 생의 기억으로 말미암은 감정의 파편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생각해 보면 결국 과거의 키시아르와 관련된 기억이니 어찌 보면 눈앞의 사내가 그리 느낀 것이 당연한 듯도 했다. 당혹한 유더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자 키시아르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답은 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평소보다 신중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니까. 다만 나와 접촉한 게 혹 자네의 발현에 이상 영향을 미쳤을까 싶어 그게 내내 신경이 쓰이더군.”
“그건… 아닐 겁니다.”
“확신할 순 없지. 우리의 몸인데도 아직까지 모르는 게 더 많지 않나.”
생각이 무척 많아 보이는 눈빛으로 그렇게 답한 키시아르가 무어라 더 말하려던 것을 삼키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별일 없이 열이 내리고 깨어나 주었으니 정말로 다행이네. 오늘까지는 여기서 더 쉬고, 내일 마병단으로 이동하려 하는데 괜찮겠나?”
“그냥 오늘 가면 안 됩니까?”
그제야 키시아르를 만나면 오늘 당장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려 했던 기억이 떠오른 유더가 조심스레 반문했다.
“이제는 발현도 다 끝났고, 아프지도 않습니다. 레노어 공자의 장례식도 내일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굳이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안 돼.”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다른 이들이 며칠 앓을 일을 하루 만에 모두 끝냈으면서 쉬지도 않고 곧장 돌아가자니. 몸과 건강은 하나뿐이니 있을 때 아끼게.”
“하지만.”
“분명 저번에 무모하게 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
그 말로 유더의 입을 다물게 한 키시아르가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정도 더 쉰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아. 레노어 샨 아페토의 장례식까지 자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오늘은 이곳에서 얌전히 잘 쉬고, 돌아가서도 3일은 더 쉬게.”
“단장님.”
“명령이다, 유더 아일.”
항의의 말들이 그 한 마디에 힘을 쓰지 못하고 스러졌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몸을 휘감은 거대한 기운이 술렁이는 감각과 동시에 붉은 눈 속에 비친 걱정을 읽었다.
그 눈빛을 보고 어떻게 더 고집을 피우겠는가.
“알겠습니다…….”
“착하게 잘 쉬면 나중에 상을 줄 테니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말게.”
아이도 아닌데 상은 무슨 상이란 말인가. 필요 없다고 답하려 했으나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쪽이 더 빨랐다.
“그러면 나는 이제 다시 나가 봐야겠군. 막 일어나서 피곤했을 텐데 쉬게. 불편한 점이 있다면 시종들에게 도움을 받도록 하고.”
말을 끝낸 뒤 곧장 돌아서려던 키시아르가 무언가 발견한 듯 다시 몸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벽이 두 개는 닫혀 있었군. 이제 모두 해제해도 되겠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이 벽 쪽임을 깨달은 유더는 일어나서 시종에게 격리벽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던 사안을 망설임 끝에 짧게 물었다.
“그런데, 저 벽은 왜 쳐두셨던 겁니까?”
“저건 공간을 완전히 분리하고 격리해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여파가 밖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만든 벽이라네. 발현 당시의 자네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보여 혹시나 싶은 마음에 쳐두라 명했지.”
키시아르가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답은 명확했으나 궁금한 부분은 아직 남아있었다. 유더의 미묘한 표정변화를 눈치챘는지 키시아르가 몸을 돌렸다.
“그런 게 왜 여기 설치되어 있는지가 궁금하단 표정이군?”
“…부정은 못 하겠습니다.”
“사실 저런 벽이 여기에만 설치되어 있는 건 아니라네. 황궁 내의 몇몇 궁에 더 설치되어 있으니까. 아주 예전부터 설치되어 있던 벽이고, 용도는 모두 같네. 넘쳐흐르는 힘을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가두는 역할이지.”
짤막하게 대답한 키시아르의 눈동자가 아직 닫혀 있는 두 개의 격리벽을 고요하게 응시했다.
“전혀 몰랐습니다.”
“모르는 쪽이 당연해. 사실은 벽의 존재 자체가 비밀이라네.”
“그런 것을 제게 이렇게 보여주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뭐, 나를 위해 목숨을 건 내 보좌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나.”
가볍게 대꾸한 키시아르의 눈빛에 알 수 없는 자조적인 웃음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자네가 설령 저런 벽이 존재한다는 걸 밖에 알린다 한들, 누구도 그것이 몹시 재미있는 정보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라네. 어쨌든 저건… 그냥 벽일 뿐이니까.”
그냥 벽. 맞는 말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묘한 뒷맛을 느끼게 하는 단어였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넘쳐흐르는 힘이란 건…….”
“그건 자네도 대강 짐작하고 있겠지만 내 능력이 보통 출중한 게 아니지 않나?”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단순히 건방진 농담이라고만 여겼겠지만 키시아르라서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신검의 주인이자 고위 사제급 신력, 거기에 더하여 각성자의 능력까지 지닌 이가 출중하지 않다면 과연 누가 출중할 수 있을까. 미소와 함께 자화자찬을 평이하게 내뱉은 키시아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타고난 능력들이 그리 좋다 하여도 어린 시절에는 조절 능력이 완전하지 못한 탓에 자칫 잘못하면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네. 초보 마법사들이 종종 실수하듯 말이지.”
갓 마법을 배운 초보 마법사들이 조절에 서툴러 사고를 많이 친다는 이야기는 온갖 동화와 전설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저 벽은 나를 위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었던 게지. 나름대로 어린 시절 친구나 다름없다네.”
미소와 함께 벽을 바라본 키시아르가 몸을 돌려 정말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러면 이제 정말로 좀 쉬게. 향도 이제 거의 잦아든 듯하니 자고 일어나면 완전히 정리되겠지.”
“네, 알겠…….”
무심코 대답하려던 유더는 순간 멈칫 놀라 머리를 들었다.
‘잠깐… 향이라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으나 키시아르는 이미 나가버린 뒤였다. 약간 비뚤게 놓인 텅 빈 의자만이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이의 흔적을 대신했다.
빠르기도 하다. 멍하니 빈 의자를 바라보던 유더는 문득 그것이 일어나자마자 곧장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한 마냥 절묘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절묘했던 건 단지 의자 위치만은 아닌 듯도 했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저와의 접촉 때문에 유더의 발현이 이상한 형태로 변질되었을까 걱정했다고는 하나 그리 멀리 앉아서 편지를 굳이 부유마법으로 건네줄 필요가 있었던가? 키시아르는 나가는 그 순간까지 한 번도 저 의자에 앉은 채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유더는 팔을 들어 스스로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러나 제 몸에서 나는 냄새를 스스로는 거의 인지하지 못하듯, 2성 발현자의 향 또한 비슷하여 그 스스로는 도무지 남아 있는지 아닌지 깨닫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키시아르가 보인 행동만 보면 짐작 가는 바는 역시 하나뿐이었다.
‘정말 이번에는 향이 남아있단 말인가…….’
이전 생에서 유더는 향도, 발정기도 없는 반쪽짜리 오메가로 유명했다. 향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다른 2성 발현자들의 향을 제대로 느끼거나 영향을 받는다 느낀 적이 거의 없었는데, 물론 다른 2성 발현자들이 모두 그와 같지 않다는 사실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유더에게 향이 남아있다면 알파 각성자인 키시아르에게는 상당히 자극적으로 느껴졌을 텐데도, 그는 끝까지 안색 한 번 변하지 않았다. 경이로운 능력이었다.
유더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가만히 한 번 주먹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