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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67화 (167/805)
  • 167화

    유더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키시아르의 손 안에서 흘러나온 푸른 기운이 편지를 휘감아 둥실둥실 띄우더니, 이내 그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뭘 쓰신 겁니까?”

    “부유 마법이 담긴 이 반지.”

    그러고 보니 키시아르의 오른손 중지에는 그간 못 보던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대체 그는 얼마나 많은 마도구를 가지고 있는 걸까. 유더는 작은 의문과 함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양면에… 전부 글이 적혀 있군요.”

    “그렇다네. 앞면은 레노어 샨 아페토에게 편지를 보낸 이가, 그리고 뒷면은 레노어 본인이 적었지.”

    유더는 우선 앞면부터 읽었다. 유려하지만 작성한 이를 특정하기는 힘들 법한 필체로 쓰여진 글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 레노어 샨 아페토. 어제 보내온 당신의 답신에 가득한 나라와 미래를 생각하는 현명함에 감탄하며 플루아빌 차를 들었소. 플루아빌의 향취가 특별한 이유는 그 어느 곳보다도 험난한 환경을 이겨내고 비로소 꽃을 피웠기 때문이라 말하지. 해마다 피어나는 꽃과 열매가 제아무리 많다 한들, 해와 비와 흙이 없는 검은 바위산을 이겨내고 자란 이 플루아빌만큼 용기 있는 것이 존재하겠소?

    힘겨운 상황에서도 나를 믿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준 당신에게서 바로 그 플루아빌과 같은 기상을 느끼오. 당신의 협력이 내게도 기꺼운 미래를 가져다주리라 믿으니 우리가 함께할 날이 실로 기대되는 바이오.

    추신. 내가 당신을 떠오르는 태양처럼 분명히 믿을 수 있도록, 편지는 도로 돌려보내고 다음 답신은 직접 건네주시오.

    그 어떤 식물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검은 바위산 지대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자라나는 꽃인 플루아빌 차에 빗대어 레노어의 협력 결정을 칭찬하는 편지. 추신을 읽고 난 뒤 뒷면으로 돌리자 앞면과는 전혀 다른 필체로 빼곡히 적힌 다른 글이 모습을 드러냈다.

    - 미욱한 나의 아우, 레블린 샨 아페토에게.

    그 글은 레노어가 동생인 레블린에게 적은 또 다른 편지였다. 레블린에 대한 원망이 담긴 부분을 쭉 무시하고 나니 남은 본론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키시아르가 왜 흥미롭다고 말했는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 네가 새로운 선택을 하였듯, 형도 지금과는 다른 길로 나아가려 한다. 앞의 편지는 광휘궁에 계신 분께서 내게 보내주신 것이다. 그분은 바깥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내게 진실을 알려주시며 손을 내밀어 주셨지. 이미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 없는 분께서 굳이 나를 택하신 건, 나를 대리로 삼아 재판에서 펠레타 공작을 상대하려 하심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기회를 붙잡고 나는 반드시 아페토를 얻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동복형제의 정으로 너 하나쯤은 거두지 못하겠느냐? 너도 지금쯤은 멍청한 선택에 후회하고 있을 테니, 이 편지를 받고 부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거라.

    카치안 황태자는 제가 쓴 편지에 스스로를 특정할 단서를 남기지 않았는데, 레노어는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뒷면에 떡하니 황태자가 사는 광휘궁의 이름을 적어두었다.

    “편지를 도로 돌려보내라고 했는데 들키지 않고 용케 잘도 남겼군요.”

    “황태자와의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것이겠지. 이야기가 잘 된다면 레블린에게서 나와 마병단의 정보를 빼낼 생각을 하고 사전에 수작을 부려 두자 싶었을 테고.”

    키시아르는 레노어가 죽기 전 그 편지를 몰래 하인에게 맡겨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레블린에게 가져가라 명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가케인 볼룬발트가 그와 만나 안전을 보장하고 편지를 대신 전달해 주기로 한 게지. 참고로 레블린은 이 편지를 내게 어떻게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이미 전해 왔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두 번째 편지는 즉각 공개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재판 전에만 공개하셨어도 파행될 일은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 편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약간 신경 쓰이는 의문의 물질을 발견했기 때문이지.”

    키시아르가 손을 들어 편지 쪽을 가리켰다.

    “두 개의 편지를 살피던 도중 표면에 알 수 없는 미세한 가루들이 묻어있는 것을 발견했네. 본디 액체였던 것이 말라서 변한 듯하더군. 둘 중 더 많이 그 가루가 발견된 건 두 번째 편지였는데, 아무래도 잉크에 타서 쓴 게 아닌가 싶어. 이미 많은 가루가 소실된 탓에 남은 양으로는 효과가 드러나지 않아 아직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지 않은 냄새가 나.”

    유더는 그 말에 다시 한 번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하여 나는 그 가루의 정체를 확실히 알아낸 뒤, 나를 향한 의심과 의혹이 최고조에 달하여 황태자가 다시 나섰을 때 공개할 생각이네.”

    유더는 그가 말하는 좋지 않은 물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바로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독이었다.

    ‘발현 때문에 정신이 없어 미처 보고하지 못했는데 벌써 거기까지 찾아내다니.’

    미래를 살고 왔기에 독의 정체를 아는 유더와 달리 아무 정보 없이 사태를 접했을 텐데도, 그런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은 키시아르가 새삼 대단한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더의 미묘한 표정을 보았는지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분명 신기해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묘하군. 혹시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나?”

    “네. 이전에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레노어 공자의 시체를 찾아갔을 때 같은 물질이 그의 몸과 소지품에도 잔뜩 묻어 있는 걸 발견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독이더군요.”

    “독?”

    “치명적이지는 않습니다만, 피부에 다량 흡수되면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는 독입니다.”

    “눈에 바로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걸 어찌 그리 단번에 알아보았지?”

    “그 독은 불에 반응합니다. 창고에 안치된 공자의 시체를 살피기 위해 불을 불러내었을 때 빛을 내며 반응하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사실은 레노어가 급격한 갈증을 보이며 독잔을 마시고 죽은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그로 인해 카치안을 의심하면서 확신했던 탓에 확인해 본 것이었으나 유더는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나조차 처음 들어보는 특이한 독인데 대단하군.”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재료가 식용으로 쓰이지 않는 버섯이고,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나 배앓이를 할 때 강제로 물을 많이 마시고 토하게 하려고 사용했을 뿐이니 말입니다.”

    유더는 그 사실을 이전 생에 이논과 이야기하다 알게 되었다. 한창 그 독이 자주 쓰이던 시기, 원료가 어떤 버섯이라는 말을 듣고는 나름대로 약방을 하는 이논이 무언가 알고 있을까 싶어 물어보았다가 들었던 작은 정보였다.

    “잘 아는 듯 보이는군. 설마 자네도……?”

    무언가 오해하는 듯 미간을 찌푸린 키시아르를 향해 유더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직접 써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이전에 산에서 살 때 보고 들은 바가 있어 조금 알았을 뿐입니다. 설마 여기에서 이런 식으로 다시 볼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건 다행이군. 자네가 혹 그걸 써야 할 만큼 아픈 적이 있어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면 나는 이 제국의 비참한 상황에 더욱 마음이 아파졌을 테니.”

    희미하게 웃은 키시아르가 이내 표정을 바꾸어 턱을 매만졌다.

    “아무튼 뜻밖에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 조사가 쉬워지겠어. 그 독을 황태자가 입수하여 사용한 경로와 증거를 확보해야겠군. 레노어 샨 아페토가 그 독으로 인해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독잔을 마시고 살해당했다는 증거가 될 테니.”

    “네.”

    “레노어 샨 아페토의 장례가 마침 내일이라니 참 다행이지 뭔가.”

    증거가 남겨진 시체도, 그의 유품도 아직까지는 남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키시아르가 햇살이 부럽지 않을 만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꿈속에서와 같은 피로에 지쳐 메마른 모습보다 역시 저쪽이 훨씬 그다웠다. 유더 또한 그 미소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자 그의 웃음 사이에 순간 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왜 그렇게….”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무어라 무심코 말하려 했던 입술의 움직임을 멈춘 키시아르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자네 이야기도 좀 해야겠지.”

    “아, 네.”

    드디어 올 것이 온 심정으로 대답하자 키시아르 또한 이전보다 한결 진지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전에는 상황이 다급해 묻지 못했는데, 그날 어쩌다 키올레 다 디아카를 만났나?”

    “……키올레 다 디아카 말입니까?”

    이번에도 예상을 벗어난 질문에 침묵을 지키다 반문하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네에게 빚을 진 덕에 도왔을 뿐이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당시 상황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니 확실히 확인해 두고 싶어서 말이네. 자네가 누워 있는 동안 나도 나름대로 그의 행적을 조사했는데, 그날 그와 자네가 이상하게 얽혀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묘한 괴소문 외엔 걸리는 게 없더군.”

    “…….”

    약간 낯이 간지럽기는 하지만 그 괴소문에 대해서라면 짚이는 게 있었다. 아무래도 키올레에게 정보를 요구할 때의 모습을 목격했던 병사들이 입을 이상하게 놀린 모양이었다.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키올레 다 디아카와는 그날 우연히 마주쳤는데, 몰래 저를 따라왔다가 발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다른 곳에 가서 그날 본 걸 이야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뿐인가?”

    “네.”

    유더는 그가 묻는다면 키올레와 맺은 서약에 대해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키시아르는 잠시 붉은 눈동자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만 한 번 끄덕였을 뿐 더 자세한 것을 묻지는 않았다.

    “알겠네. 나름대로 확신이 있는 듯하니 그에 대해서는 그러면 자네에게 맡기고 더 신경 쓰지는 않겠어. 시간을 들여 생각할 만한 이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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