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실까 걱정하였는데, 이 정도라면 저녁에는 평범한 식사를 드셔도 문제없을 듯하여 다행입니다. 혹 가리시는 음식이 있으십니까?”
“아뇨….”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젓자 시종의 주름진 눈가 위로 웃음이 서렸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알아서 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준비를 하려면 이제부터 한시도 지체할 수 없겠군요. 혹 그 전에 목욕이 필요하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키시아르가 대체 무어라 말을 해 두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종은 유더에게 지나치게 친절했다. 아무리 이 궁 주인의 보좌직을 맡고 있다고는 해도 평민 출신에 이제 겨우 경의 칭호를 받았을 뿐인 20살짜리 젊은이가 받기에는 과분한 대접이었다. 그는 유더의 괜찮다는 말에도 몇 번이나 더 필요한 다른 사항이 없는지를 꼼꼼히 물어본 뒤에야 겨우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키시아르를 만나면 곧장 마병단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쪽이 낫겠군.’
얼마 되지 않아 곧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이는 다행히도 돌아온 시종이 아닌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얼굴이 말이 아니군. 몸은 이제 좀 괜찮나?”
키시아르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 달리 흰 단장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약간 피로해 보이는 미소를 마주한 순간 유더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모든 생각을 잊었다. 곧장 마병단에 돌아가겠다고 말하려던 결심도,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도 일제히 녹아 사라진 머릿속에서 겨우 짜낸 한마디가 마치 남의 목소리처럼 낯설게 울려 퍼졌다.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입술이 다 갈라졌는데.”
혀를 찬 키시아르가 주변에 있던 의자를 하나 잡아 앉았다. 침대에서 꽤 떨어진 위치였으나 대화를 나누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팔걸이에 손을 가볍게 짚은 그의 시선이 제 모습을 훑는 감각이 몹시 선명하게 다가온 탓에 유더는 저도 모르게 숨을 잠시 멈추고 말았다.
그저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뿐임에도 확실히 2성 발현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까지는 제 안에 없었던 어떤 새로운 감각이 키시아르가 휘감고 있는 은밀하고도 거대한 존재감을 인지하고 있었다. 발정기가 아직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아 평소보다 예민한 후각이 향수의 달큰함과는 다른 서늘한 향을 미세하게 느꼈다.
지금과 비교하자면 발현 이전은 두꺼운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키시아르를 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여겨질 정도였다.
‘이전에도… 이랬었나.’
이전 생에도 분명 이런 감각을 느꼈을 텐데, 그때와는 무언가 달랐다. 그 차이가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종과 이야기를 나눌 때와는 전혀 다른 생경한 감각에서 최대한 벗어나기 위해 유더는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키시아르가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고작 하루 반밖에 지나지 않았다지만 그사이 꽤 재미있는 일이 있었네. 일어나면 이야기해 주려고 굉장히 고대하고 있었지. 들어보겠나?”
그가 발현과 발정에 대하여 이야기하리라 짐작했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무렇지 않게 레노어의 편지를 이야기하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보며 유더는 어쩌면 그 말이 나름대로 배려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
“자네가 내게 주었던 레노어 샨 아페토의 편지. 내용을 혹시 보았나?”
“아뇨.”
유더는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키시아르에게 건네주었던 레노어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 안에는 레노어 샨 아페토가 ‘전하’라 부른 이에게 바치는 충성 맹세가 쓰여져 있었네. 그는 가문과 아버지를 버려도 괜찮겠다고 여길 만큼 구미가 당기는 어떤 말을 들은 뒤 그 ‘전하’를 직접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날 파티에 온 모양이더군. 불운한 일이 없었다면 그는 ‘전하’를 만나 뜻을 이루었겠지.”
여태 남아 있던 미열의 잔재가 그 말에 깡그리 자취를 감추었다. 멍해져 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기름칠을 한 바퀴처럼 매끄럽게 도는 감각을 느끼며 유더는 신중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저 ‘전하’라고만 지칭된 편지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유더의 머릿속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레노어가 죽었던 그날 직접 보고 들었던 것들과 전후 상황이 마구 뒤섞인 끝에 잠시 후 하나의 결론 아래 가지런히 정렬되었다.
키시아르는 날카로운 빛을 되찾은 유더의 눈동자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대담하고 교묘하군요.”
“무엇이 말인가?”
“저는 황태자 전하 측에서 레노어 공자가 죽은 이후 다시 사람을 보내 시체를 뒤지려 하시기에 증거를 은폐할 목적이 아닐까 짐작했었습니다만, 내용을 들으니 다른 목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키시아르가 느긋하게 반문했다.
“그날 파티에 참석했던 분들 중 전하라 불릴 수 있는 분은 황태자 전하와 단장님뿐이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죽은 레노어 공자는 때마침 저희와 상당히 원한을 진 상태였고 곧 재판에 설 아페토 가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단장님께서 누군가를 죽였다는 의심을 덮어씌우기에 그보다 그럴싸해 보이는 존재는 또 없겠죠.”
그러나 키시아르가 범인이 아님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면, 그가 레노어를 죽일 이유는 사실 전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상대를 힘으로 쉽게 짓누르고 죽여 없애는 게 아니라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만큼 정당한 명분과 증거 아래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일이었다.
벨트레일 원로사제가 미쳐 버린 지금, 레노어 샨 아페토야말로 아페토 가의 죄를 입증해 줄 가장 중요한 인물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를 왜 죽이겠는가.
“…멋모르는 이들이 보기에 그 편지는 단장님께서 아페토 가를 비롯한 귀족들에게 경고의 뜻을 전하고자 레노어 공자를 꾀어내어 죽였다고 지레짐작하기에 실로 좋은 증거가 될 겁니다.”
아마도 카치안 황태자는 그 점을 노리고 레노어에게 일부러 그런 편지를 써서 가져오도록 한 뒤 그를 죽였으리라. 레노어가 죽으면 반사이익을 보게 될 1공자 에이셰스나, 가문의 수치를 치워 한숨 돌리게 될 아페토 공작에게 선을 댈 수 있다는 점까지 계산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리고는 혹시나 편지를 약속대로 적지 않았을까 싶어 아랫사람을 보내 확인하려 했겠지. 제대로 적지 않았다면 인멸하면 그만이고, 잘 썼다면 때를 보아 내놓으면 되니까.’
레노어가 편지를 제대로 적어 오지 않았을 경우라 해도 그가 마신 독이 본래는 카치안 황태자가 마실 잔이었다고 알려진 이상 황태자는 크게 손해를 볼 일이 없었다.
황태자가 제 목숨을 미끼로 걸고 디아카 가도 모르게 홀로 그토록 대범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이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유더조차 키올레를 붙잡아 정보를 듣지 않았다면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이전 생에서 카치안은 황제 자리에 오를 때까지 단 한 번도 디아카 공작을 거스르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황제가 되고 나서도 얼마간은 줄곧 디아카 공작이 진짜 황제이며, 카치안은 그의 말 잘 듣는 인형에 불과하다 여겼을 정도였다.
그래서 유더는 이번에도 그가 황제가 될 때까지는 디아카 공작을 두고 쉽게 홀로 움직이려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결과는 예상 외였다.
스스로를 내주면서까지 상대를 철저히 끌어내리려 하는 이 대담하고도 요란한 방식이라니. 노회하고 조심스러운 디아카 공작과는 궤가 달랐다. 그리고 유더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이 든 카치안 황제와도 제법 달랐다.
이전 생의 카치안 황제는 제 자리를 지키는 데 누구보다도 예민하여 늘 조심스러운 이였다. 이전의 황족 혈통이 끊기고 새로이 자리에 오른 만큼 외부의 인정에 민감하여 국정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고, 귀족들을 능수능란하게 달래며 손을 잡았으나 다만 한 번 누군가 제 자리를 노릴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면 끝을 볼 때까지 결코 그 마음을 거둘 줄 몰랐다.
황제가 누군가를 역모의 뜻을 품었다 의심했을 때 자주 사용한 응징 도구 중 하나가 바로 유더 자신이었기에 그 의심 많고 끈질긴 성정은 모를 수가 없었다.
이전 생에서 카치안이 유더를 처음으로 불러 키시아르를 죽이라는 명을 내리게 된 결정적 계기 또한 즉위 이후 1년 내내 물밑에서 퍼졌던 펠레타 공작의 반역 의혹이 아니었던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와 아닌 이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 아니면 이번 축제 기간 동안 일어난 일들에 내 예상보다 훨씬 큰 위협을 느꼈거나.’
그리 생각하니 레노어의 편지를 제가 가로채 온 게 참으로 다행이라 여겨졌다. 유더는 생각에 잠긴 채 마지막 말을 이었다.
“편지를 찾아내어 그 안에 황태자 전하와 연관이 있다 여길 요소가 존재하는지 확인한 뒤, 문제가 없다면 단장님께 덮어씌우는 식으로 공개할 예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제가 미리 찾아내어 다행이군요.”
“음. 다행이라고 말해서 미안하지만 실은 그 편지는 내가 그날 도로 황태자의 손에 돌려주었네.”
키시아르가 약간 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황태자의 의중을 좀 더 확실히 알고 대처하고 싶었거든. 시종을 통해 2층에서 발견한 척 돌려보냈더니 곧바로 사람들 앞에서 그 편지를 즐겁게 공개하더군. 덕분에 오늘 있었던 아페토 가의 첫 재판은 양측이 입장하기도 전에 난장판이 되어 중단되었다네.”
“……예?”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번 반문하자 키시아르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파티가 있던 날 가케인 볼룬발트가 찾아낸 레노어 샨 아페토의 두 번째 편지가 있지. 그 내용이 자네가 찾아낸 첫 번째 편지보다 훨씬 흥미로워. 사실 오늘 얘기의 본론은 이거라고 할 수 있겠군.”
키시아르가 손안에 감추고 있던 작은 편지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읽어보겠나? 아픈 몸도 싹 나을 만큼 재미있을 거야. 장담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