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여긴…….’
“일어나셨습니까?”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인자한 눈빛을 띤 시종이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유더는 그를 보고서야 겨우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해 냈다. 키시아르가 황자 시절 지냈다던 궁에 저를 두고 가겠다고 했었으니, 이곳이 아마 그곳일 터였다.
꿈의 여파로 아직도 정신이 멍했으나,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사이 머릿속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예복 대신 깨끗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 기절해 있는 동안 누군가 갈아입혔겠지만 장갑 없이 드러난 맨손을 보니 묘한 어색함이 절로 찾아들었다. 장갑을 끼지 않고 살아온 날들이 훨씬 많았는데, 이제는 없는 쪽이 어색하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유더는 제 오른쪽 손등 위에 번진, 금화 한 개 정도 크기의 반점을 보며 발현 직전 그 부위에서 느꼈던 강렬한 통증을 떠올렸다. 고작 이 크기밖에 번지지 않았는데 그토록 심각하게 고통스러움을 느꼈던 건 역시 발현과 연관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발현은… 이제 마무리된 건가?’
몸속의 기운은 이제 거의 안정된 상태였다. 조금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근육이 아직 비명을 질렀고 피로와 열기가 아직 남아 있기는 했으나 기절하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이 깨끗했다.
‘설마 이전처럼 기절한 사이 일주일이 지난 건 아니겠지.’
나아진 상태와는 별개로 불길한 생각이 들어 빠르게 고개를 든 유더는 시종을 향해 곧장 입을 열었다.
“제가……. 쿨럭. 쿨럭.”
“이런. 물을 먼저 드시고 입을 여셔야 합니다.”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를 물으려다 사막처럼 메마른 목을 이기지 못하고 기침을 토한 유더를 부축한 시종이 물컵을 가져다 입가에 대 주었다.
“급히 드시지 마시고 한 모금을 다섯 번에 나누어 천천히 삼켜 주십시오.”
시종이 능숙한 태도로 유더를 조금 일으켜 커다란 쿠션에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도와준 뒤 물컵을 가져와 입술 끝에 대주었다. 그가 시킨 대로 한 모금을 다섯 번에 나누어 천천히 삼키자, 상처에 물을 뿌린 듯이 목이 아프다가는 겨우 숨통이 한결 트였다.
“감사합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괜찮습니다.”
“제가… 얼마 만에 깨어난 겁니까?”
“이곳에 오신 지 꼬박 하루 반이 지났습니다.”
하루 반이라니. 순간 얼떨떨해져 입을 벌린 유더의 표정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시종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내 고열에 시달리셨다가 열이 내린 지 몇 시간도 채 안 되셨습니다. 조금만 더 오래 열이 지속되었다면 황자님… 아니, 공작님께서도 사제를 불러와야 할 것 같다 말씀하셨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단장님께서 여기 계셨습니까?”
“일을 처리하시느라 몇 번 나가시기는 하셨습니다만, 계속 계셨습니다. 지금도 격리벽 밖에서 일을 하고 계실 겁니다.”
키시아르가 계속 여기에 있었다니.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된 유더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시종의 말 속에 있던 낯선 단어를 뒤늦게 떠올렸다.
“그런데, 격리벽…이 뭡니까.”
“아…. 이 궁에 있는 특별한 가림막을 말합니다. 이 침실에는 3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공작님께서 모두 쳐 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시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있던 벽으로 다가갔다. 그가 벽에 손을 대자마자 놀랍게도 그 부분이 뒤로 쑥 밀리더니, 귀부인들의 부채처럼 쪼개져 옆으로 밀려 접히기 시작했다. 유더는 모두 접혀 옆으로 들어간 벽 뒤에 이전까지 없었던 가구와 창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와 동시에 다시 돌아온 시종이 입을 열었다.
“방금 사라진 벽이 첫 번째 격리벽입니다.”
“그러면 저런 벽이 두 개가 더 있다는 뜻입니까?”
“네. 뒤쪽 벽을 제외한 3면에 하나씩 있습니다.”
시종의 대답은 친절하고 진중했다. 유더는 아무리 보아도 감쪽같이 진짜 벽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나머지 두 개의 격리벽을 바라보았다. 저토록 교묘하게 만든 가짜 벽이라니. 지난 생을 돌이켜 보아도 저런 장치가 설치된 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이름을 보면 분명 무언가를 격리하기 위하여 만든 벽일 텐데, 이곳은 과거 황자였던 키시아르가 머물렀던 궁이며 그의 침실이었다. 그런 곳에 침대를 중심으로 격리벽을 만들어 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저 벽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겁니까.”
“말 그대로 격리와 보호를 위한 벽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뒤 시종은 유더를 돌아보며 주름진 눈가에 미소를 띠었다.
“궁금하시다면 저보다는 공작님께 여쭈어 보시는 쪽이 어떠실지요? 지금 공작님께 아일 님께서 깨어나셨다는 말씀을 드리러 나가려던 참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한 마디로 유더의 입을 다물게 만든 시종은 먹을 수 있을 만한 음식도 가져오겠다고 말하고는 가뿐하게 열린 벽 쪽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지고 나니 몸이 또다시 잠들 것처럼 무거워졌으나, 오래 잔 덕인지 다시 눈이 감기지는 않았다. 대신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제가 하루 반 만에 깨어났다던 시종의 말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다시 눈을 뜰 때까지 일주일이 걸렸기에 이번에도 으레 그럴 줄 알았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전 생에서도 2성 발현 자체는 남들보다 훨씬 짧은 시간 내에 끝냈다. 다른 이들은 오랫동안 천천히 변화하며 조금씩 받을 고통을 단숨에 모두 겪느라 그 고생을 한 게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함께 왔던 발정기 또한 덩달아 빨리 끝나버린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몰랐다.
이전 생에서 단장 일을 하다 마주쳤던 각성자들 중에는 유더처럼 2성 발현과 발정기를 동시에 맞이했던 이가 몇 명 있었다. 대부분은 1주일 전후에 걸쳐 평범하게 제2성을 발현했는데, 발정기 또한 발현이 끝날 때쯤 자연스럽게 함께 사그라졌다고 들었다.
그때는 발현과 발정이 함께 올 경우 1주일 정도 걸려 사그라지는 게 보통이라 여겼기에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면 발현을 남들보다 빨리 끝낸 제가 발정만 일주일을 더 끌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쪽이 본래 아무 일도 없었을 때 일어났을 상황이고, 오히려 이전 생 쪽이 이상 상황이었던 건가.’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유더가 죽기 전쯤, 마병단 사이에는 발정기가 겹친 이들끼리 몸을 섞으면 서로 영향을 받아서인지 발정기가 끝나는 시기가 평소보다 더 길어진다는 말이 정설처럼 돌았다. 키시아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이라면 그 말을 사실로 만들고도 남았을 법 했다.
결국 짐작 가는 변수는 키시아르의 발정기가 이번에 유더와 겹치지 않았다는 것, 단지 그 하나뿐이었다.
‘그냥 그뿐인데도… 이렇게나 쉽게 모든 일이 끝날 수 있었다니.’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던 유더는 이내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아니. 아니야.’
단지 발정기가 겹치지 않았던 것만으로 이런 행운이 완성된 게 아니다. 창고에서 마주쳤던 키시아르가 얼마나 자신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유더를 안심시키려 했었는지는 열에 들뜬 기억 속에도 분명히 남아 있었다.
‘지금 나는 너를 책임져야 하는 마병단 단장이다. 네가 나를 위하여 홀로 선뜻 나섰으니 이제는 내가 그 신의에 답할 차례일 뿐.’
절망에 사로잡혀 자포자기할 뻔했던 순간 귓가에 울려 퍼졌던 그 목소리에 느꼈던 충격을 단순히 행운이라는 두 글자로만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가?
뛰어난 능력이 곧 뛰어난 자제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오히려 강한 힘을 지닌 이들일수록 굳이 약자를 위해 참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키시아르는 이마에서 땀을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하며 유더를 이곳까지 실어 날랐다. 그가 유더를 구하기 위해 감내했던 일들을 단순히 발정기 때가 맞지 않은 덕에 일어난 운 좋은 상황이라 여기는 건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몸 위로 스스럼없이 망토를 벗어 감싸주던 얼굴을 떠올린 순간 가슴 속이 울렁거렸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아무 일도.
그러니 2성 발현이 끝났음에도 명확한 정신으로, 아무런 후회도 없이 키시아르를 볼 수 있을 터였다.
심장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있던 오래된 가시가 드디어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해방감인지, 무언지 모를 감정에 유더가 저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마셨을 때, 시종이 트레이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깨어나셨다는 소식에 공작님께서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하루 넘게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셨으니 이 스프를 다 드신 뒤 얼굴을 보자고 하시더군요.”
“단장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시고 계십니까?”
유더는 조금 망설이며 물었다. 시종은 그 망설임을 눈치채지 못한 듯 부드럽게 웃으며 트레이에서 스프 그릇과 수저를 꺼내 주었다.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아페토 공작가와의 재판이 시작되어 그 관련으로 계속 명을 내리고 계신 듯했습니다. 자, 드십시오.”
소화가 잘 되도록 잘게 썬 야채와 연하게 다진 닭고기를 넣어 끓인 스프는 힘들여 씹지 않아도 될 만큼 부드러웠고 고소한 맛이 났다. 식욕이 없다고 생각했던 유더는 스프를 한 입 먹은 뒤 갑자기 놀랄 만큼 강한 허기를 느끼며 빠르게 스푼을 움직였다.
“너무 급히 드시면 안 됩니다. 천천히 드십시오.”
중간에 만류까지 받아가며 스프를 다 먹고 나자, 시종이 흐뭇한 눈빛으로 빈 그릇을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