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고심하여 표현을 고른 황후의 말에 키시아르는 그답지 않게 또다시 대답을 늦추었다. 카치안의 간지럽지도 않은 공격보다 훨씬 더 불시에 허를 찔린 느낌이 들었던 탓이었다.
“내 말이 틀렸나요?”
“아뇨.”
반사적으로 대답해버린 뒤, 키시아르는 살짝 찌푸린 채 웃음기가 사라진 입가를 문질렀다.
“맞습니다. 제가… 그랬군요.”
“그런데 표정은 왜 그렇죠?”
황후의 미심쩍은 질문을 들은 키시아르는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가 손가락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보다도 저를 잘 아시는 듯하여 놀라서 말입니다.”
“아까는 내가 아직도 공작을 잘 모른다더니, 이제는 또 너무 잘 안다고 말하는군요. 어느 쪽이 공작의 진담입니까?”
“물론 둘 모두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키시아르는 황후가 무어라 답하기 전에 재빨리 능청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비밀입니다만, 실은 제게는 상자처럼 여섯 개 정도의 면이 있습니다. 한 면이 잘 보이면 다른 한 면은 반드시 보이지 않으니 저를 잘 아시다가도 잘 모르실 수도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정말, 말은 잘도 하는군요.”
황후는 심각했던 상황조차 잠시 잊고 한숨처럼 푹 웃고 말았다.
“폐하께서도 공작처럼 잘 둘러대기라도 해 주시면 좋으련만…….”
무심코 흘러나온 진담은 숨길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키시아르는 그늘진 황후의 얼굴을 바라보다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폐하의 용태가 더 안 좋아지셨습니까?”
입술을 꾹 깨물었던 황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주무시는 시간이 더 줄어드셨어요. 시종장의 말로는 고통 때문에 주무셨다가도 금방 깨어나신다더군요. 하지만 저를 만나면 항상 아무 일 없었다고만 말씀하시니……. 어느 때에는 그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황후 폐하께서 걱정하시다 혹 건강을 해치실까 염려되신 것이겠지요.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나도 압니다. 그게 폐하께서 내게 주시는 마음이시지요. 황태자를 저녁 식사에 데려가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제게 얼마나 과분한 배려이신지. 하지만 알기 때문에 더 힘든 일도 있는 법이에요.”
억눌려 있던 말을 토해낸 황후의 얼굴 위로 후회하는 감정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미안합니다. 마지막에 그만 너무 못난 말을 입에 담아버렸네요. 부디 잊어 주세요.”
“황후 폐하.”
막 몸을 돌리려던 황후가 키시아르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늘진 눈가에 축축이 밴 물기가 보였다. 키시아르는 그녀의 뒤를 따르는 입이 무거운 시녀들을 한 번 훑어본 뒤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마병단에서 얼마 전부터 조사 중인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방금 전까지 나누던 화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에 황후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유능한 단원들과 마법사 덕에 현재 꽤 재미있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지요.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모두가 각자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폐하를 돕고 있습니다.”
“…….”
“누가 더 큰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가 무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2년 전의 저만 해도 두 분께서 보내주신 편지가 아니었다면 기적의 순간까지 버티지 못했을 테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께서 곁에 계셔 주시기만 하셔도 기뻐하시니 그 마음을 의심치 마십시오.”
“공작…….”
“그리고 오늘 일어난 일은 저와 마병단을 노리고 들어온 공격이었으니 황후 폐하께서 굳이 상대하지 않으신 쪽이 현명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아마 오늘의 일을 꽤 후회하게 되겠지요. 이후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후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리다가는 위로 살짝 올라갔다.
“그리 말해주어 고맙군요.”
회랑에 달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간 뒤, 키시아르와 황후는 반대 방향으로 갈라져 각자의 길로 향했다.
***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몹시 무거웠다.
유더는 멍하니 눈을 뜨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몽롱한 시야 너머로 얼핏 검게 가라앉은 밤하늘이 보였다.
‘여기는.’
익숙한 풍경이라 생각했더니, 그는 마병단 숙소 꼭대기에 위치한 단장 숙소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인 단장용 침실에 누워 있었다. 광택이 도는 아름다운 흰 나무와 돌을 깎아 만든 침대. 돔 모양으로 둥글게 솟아올라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유리를 단 드높은 천장.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는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꿈을 꾸었나?’
혹 사형을 당한 뒤 11년의 시간을 되돌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던 일이 모두 꿈이었고, 단장 침실에 누운 지금이 본래의 현실이었던가? 소름이 돋는 가정에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마자 별안간 등 뒤에서 불쑥 뻗어 나온 큰 손이 허리를 감싸 깊이 끌어당겼다.
‘……깨어났나?’
깜짝 놀라 굳어진 몸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조금 이완되었다. 그가 누구인지 보지 않고도 유더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그가 유더의 머리 뒤쪽에 코를 묻고 가늘게 숨을 내쉬는 감각이 아스라이 목덜미를 자극했다.
‘기절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하네.’
‘…되었습니다.’
의식하지 않고도 흘러나간 제 목소리를 들은 후 비로소 유더는 이 상황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시간을 되돌렸던 쪽이 꿈이 아니라, 지금 이쪽이 진짜 꿈이었다.
하기는, 마병단 단장이 된 이후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단장실 내부에 있던 가구나 물건 배치를 바꾼 적이 없었으니 헷갈릴 만도 했다. 몽롱한 정신이 꿈임을 인식하자마자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곤하게 풀어져 갔다.
유더의 몸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나가자 허리를 감았던 손이 배와 가슴께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아이를 재우려는 손길처럼 부드러웠지만, 그런 의도만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애가 달게 만드는 접촉이었다.
…그러고 보니, 맨손이군.
멍한 머리가 몸에 닿은 손이 언제나와 달리 천 한 겹을 사이에 두지 않은 상태였음을 깨닫고 그제야 약간 놀라움을 느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 아니면 늘 장갑을 끼고 있던 이가 이런 날도 있었던가? 몸을 어루만지는 손이 어떤 상태인지 보고 싶어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마치 그 움직임을 읽은 것처럼 귀 뒤쪽의 연약한 살 위를 깨무는 통에 생각이 날아갔다.
‘……흣.’
유더가 고개를 젖히고 떨자 쓰다듬던 손의 움직임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분명 익숙했던 손길인데도, 꿈이라는 의식이 희미하게 남은 탓인지 처음 느끼는 것처럼 낯설고 기이했다.
그래. 한때는 이런 시기가 있었다. 등 뒤의 사내가 죽은 뒤에는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지만, 타인이 제 몸을 만지는 데에 거부감보다 미약하게 끓는 흥분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던 때가 그에게도 분명 존재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펠레타 성으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지.’
‘그러면 왜…….’
‘왜일까.’
선문답처럼 느른하게 반문한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차고 쓸쓸하게 들린 건 기분 탓인가. 뒤를 돌아보고 싶어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데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 끌어안겨 있어 도무지 고개를 돌리기가 어려웠다.
‘이곳에서 잠드는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시니 아쉬우셨습니까.’
‘아쉬움이라……. 그래. 그런가 보군.’
‘그런가 보군은 뭡니까….’
‘네 말이 모두 맞을 테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내뱉은 키시아르가 잠시 후 다시 한 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한숨을 닮은 호흡일 뿐임에도 유더는 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닮은 감각을 느꼈다.
깊은 호흡. 불안정한 기운. 어딘지 모르게 피로와 쇠약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어둠 속에서도 그런 것들을 통하여 유더는 키시아르를 손으로 만지듯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등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타인과 연결된 듯한 그 생경함이 낯설어 등을 조금 말자,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그를 불렀다.
‘유드레인.’
‘…….’
대답하지 않자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유드레인.’
‘네.’
뒤통수에 달라붙는 시린 감각을 떨쳐내듯 대답하자 답은 아주 늦게 되돌아왔다.
‘이제부터는 그 이름에 익숙해져야 할 텐데, 괜찮은가?’
‘어차피 단장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거의 없지.’
말을 가로챈 키시아르가 낮게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좋은 뜻을 넣어 고른 이름이니 소중하게 여겨 주게.’
좋은 뜻을 넣어 고른 이름. 그 말을 따라 되뇐 뒤 유더는 불현듯 그랬었던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놀라움을 느꼈다.
유드레인 아일이라는 이름은 그가 단장 자리에 오를 때 백작 작위와 함께 하사받았던 이름이었다. 그 사실까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정작 유드레인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어주었고 어떻게 받았는지는 거짓말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이름을 키시아르가 지어주었었다니.
그런데 무슨 뜻이었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무슨 뜻이었는지 여쭈는 걸 잊었군요. 고어라고만 말씀하시고…….’
과거의 유더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뒤늦은 질문을 했다. 피부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가만히 그 자리에 멈추었다. 공교롭게도 가슴과 가슴 사이, 심장이 있을 법한 위치 바로 아래쪽이었다.
‘…….’
가장 중요한 급소가 위치한 피부 위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온기에 몸을 떨며 정신을 빼앗긴 찰나의 순간, 유더는 다시 한 번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는 정말로 낯선 침실 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