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리 분위기가 어지러워서야, 어디 입맛이 돌겠습니까.”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는 편지 내용을 들으시고도 그 말씀밖에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카치안 황태자의 가장 가까운 쪽에 서 있던 이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는 어느 유서 깊은 백작가의 셋째 아들로, 제법 유명한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였다. 밖에서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로 이름났다지만 사실은 그저 성질이 거칠어 폭력 사건에 많이 연루되었을 뿐임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알았다.
이 자리에 남은 이들 대부분이 그처럼 젊고, 상속받을 재산이 별로 없으며 미래에 제국의 주인이 될 황태자의 끈이라도 잡아보고자 안달이 난 자들이었다. 기회가 온 김에 큰소리를 내서 눈도장을 찍어보겠다는 얄팍한 마음이 뻔히 들여다보여 키시아르는 짐짓 모른 척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며칠 전 아페토 가를 철저히 조사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하겠다는 뜻을 밝히셨던 전하께서 뒤로는 레노어 공자를 몰래 이곳으로 불러들이셨음이 밝혀졌는데 하실 말씀을 모르시겠다니요. 사실 관계를 명확히 알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젊은 기사는 겁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는 내가 그를 불러들였다고 퍽 자신하는 모양이군.”
“그러면 아니란 말씀입니까?”
젊은 기사는 키시아르가 할 말이 없어 태연한 척을 한다 여겼다. 스스로는 책 한 권 읽지 못할 만큼 지능이 떨어지는 머리를 허우대 멀쩡한 외모로 감추고 황제의 아량에만 기대어 산다는 펠레타 공작의 소문은 아주 유명했다.
실제로 가까이서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지만 예복에 달려 있던 망토를 어느샌가 잃어버리고 나타난 모습을 보니 소문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사태를 관망 중인 이들이 저보다 먼저 나서지 못하여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이니 마음도 더욱 든든했다.
“애초에 저 편지가 진짜 아페토 2공자의 것인지조차 아직 확신할 수 없지 않은가?”
“정황상 추측 가능한 부분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 공작 전하께서 모두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 주시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신다면 어떤 이들은 레노어 공자의 죽음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정황상 추측이라. 좋지. 나도 한번 해 볼까.”
젊은 기사의 말을 따라 중얼거린 키시아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백번 양보하여 설령 자네의 말대로 아페토 2공자가 나를 보기 위해 왔다 한들, 편지에 적힌 이야기는 오로지 만남을 약조하는 것뿐이다. 그의 죽음은 우연에 의한 일이었으니 자네의 말대로라면 나는 오히려 만나기로 한 상대가 갑자기 죽어 몹시 당황해야 하지 않겠나? 내 생각에는 오히려 이쪽이 더욱 말이 되는 추측인 듯한데 어찌 생각하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것과 이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그래? 그러면 자네는 역시 내가 아페토 2공자를 속여 이곳으로 불러들였고, 그의 죽음에 크게 연관되었으리라는 추측 쪽이 더 옳다고 생각하나 보군. 믿고 싶은 것을 믿겠다는데 내가 더 할 말이 있겠나.”
“그… 그렇게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확실하게 언급했다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젊은 기사는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니까 다만 저는… 레노어 공자의 죽음이 황태자 전하의 암살 미수 사건과도 연관된 만큼, 의혹이 생긴 부분을 투명하지 못한 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충언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편지에 내 이름이 적혀 있지도 않은데 적절한 증거 없이 그런 주장을 하려면 자네 또한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 각오를 해야지. 책임지지 못할 말을 충언이라 일컫지 말게.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 모르니.”
말허리를 자르며 내뱉은 펠레타 공작의 웃음 띤 반박에 젊은 기사는 말문이 막혔다. 방금 전까지 우습게 여겼던 공작에게 말로 밀렸다는 생각을 하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분노와 함께 울컥 치솟아 올라왔다.
“마치… 입을 다물라 강요하시는 듯한 말씀입니다.”
“강요라니. 이건 충고라네. 자네가 했던 충언보다 훨씬 실용적이지. 차이를 잘 모른다면 앞으로 꼭 알아두게.”
젊은 기사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가는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말씀이 너무……!”
“물러서라.”
그때, 젊은 기사의 뒤에 있던 황태자가 손을 들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시선이 일제히 카치안 황태자 쪽으로 쏠리자 그는 키시아르를 향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말대로, 명확한 뒷받침이 없는 말은 아무리 그럴싸하다 하여도 책임지지 못할 거짓에 불과하겠지요. 불쾌한 심경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나를 걱정하여 한 말이라 하니 부디 너그럽게 넘겨주실 수 있으실지요, 펠레타 공작.”
황태자가 젊은 기사를 감쌌다. 또다시 분위기가 가볍게 술렁였다. 키시아르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치안 황태자의 앳된 얼굴을 향해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애초에 그리 불쾌하지도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허나…….”
카치안의 시선이 레노어의 편지를 아직도 공손히 받쳐 들고 있던 시종 쪽으로 움직였다.
“공작은 저 편지가 가짜일지도 모른다 말했습니다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가엾은 이가 누구의 부름을 받고 왔는지 저 편지를 통하여 알아보아야 가족들의 슬픔도 풀리지 않겠습니까. 하여 더욱 자세한 조사를 명할까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교묘한 화법이었다. 굳이 동의를 구함으로써 키시아르가 편지에 대해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 듯 만드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덕분에 주변의 눈길이 더욱 날카로워졌으나 키시아르는 그러한 시선에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짙은 미소를 띤 채 황태자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과연. 그게 바로 여태까지 네가 숨겨 온 진짜 발톱인가.’
카치안 황태자는 4년 전 그 자리에 오른 이래 한 번도 직접적으로 황제나 키시아르를 상대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낸 적이 없었다. 모든 공격은 언제나 디아카 공작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늘의 황태자는 곁에 사람을 아무도 두지 않은 채 홀로 서 있었다. 디아카 공작의 뒤에 숨지 않고 처음으로 홀로 나선 황태자의 미처 다 감추지 못한 적의가 키시아르의 눈에는 몹시 선명하게 보였다.
‘축제 기간 내내 신경을 긁은 보람이 있군.’
카치안 황태자가 이토록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쪽을 공격하려 나선 이유는 그가 앞으로는 디아카 가만 믿고 있을 수는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설마 레노어를 죽이면서까지 과감하게 나설 줄은 몰랐지만, 그 대범한 공격이 키시아르는 오히려 몹시 기꺼웠다.
디아카 공작이라면 그 정도 일로는 몸소 나서지 않았을 테지만 카치안은 아직 10대 소년이었고, 그 나이에는 본래 약간의 흔들림도 지진처럼 크게 느끼는 법이었다. 대범한 방식의 공격은 상대의 허를 찌르기 좋지만, 반대로 자신이 공격을 돌려받기에도 좋다. 앞으로 그는 그 사실을 천천히 깨닫게 될 터였다.
키시아르는 지나치게 즐거워하는 표정을 지어 카치안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 노력하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조사라… 필요하다면 물론 해야겠지요. 마병단이 진행 중인 아페토 가의 조사를 이 일로 멈출 수는 없겠지만 협조를 요청한다면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일부러 내키지 않는 듯 느릿하게 말끝을 끌며 대답하자 카치안 황태자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벌써부터 키시아르의 죄가 확정된 양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 저는 머리가 조금 아파져 먼저 들어가 보아야겠군요. 오늘 예정되어 있던 식사 자리에는 참석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궁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이니 필요하시다면 연락을 주십시오.”
키시아르는 그의 불행을 예견하며 즐거워하는 이들을 뒤로 하고 홀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황후가 그를 뒤따라 홀에서 빠져나왔다.
“공작! 기다리세요.”
“예. 오실 줄 알고 이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대로 홀 바로 앞에 느긋하게 서 있던 키시아르를 보고 황후는 잠시 당혹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요. 설마 정말로 아페토 2공자를 공작이 부르지는 않았겠지요?”
“저를 아직도 잘 모르시는군요. 당연히 아닙니다.”
키시아르의 시원한 대답에 황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면 대체 어째서 그런 태도로…….”
“상대의 목적을 파악하려면 한 번은 맞아 줄 필요가 있는 법이지요.”
물론 실제로는 맞지도 않았고, 원하던 대로 카치안의 속도 대강 모두 파악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그런 말은 삼키고 대신 미소를 흘렸다.
“황제 폐하께는 식사를 함께 하지 못하여 죄송하다고 꼭 전해 주십시오. 저는 황자 시절 지냈던 영궁으로 갑니다.”
“정말로 그냥 갈 건가요?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폐하와 직접 뵙고 이야기를 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오늘은 어렵겠습니다. 저를 기다리는 이가 있어서 말이지요.”
황후가 슬퍼하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하는 형을 위해서라도 본래대로라면 셋이 함께 식사를 하는 쪽을 택했겠지만, 오늘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아직까지도 발현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유더 아일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자 황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혹시 망토를 잃어버리고 온 일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요?”
그의 형수는 때때로 이상한 면에서 놀랄 만큼 감이 좋았다. 키시아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순순히 끄덕였다.
“어떻게 짐작하셨습니까?”
“아까는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어쩐지 망토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후부터… 느낌이 조금 달라졌었거든요.”
“느낌이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어서 일어나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분 같았어요. 황태자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면 남은 이유는 하나뿐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