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남겨진 키시아르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예복 소맷자락에 코를 묻자 아직도 진하게 밴 향이 느껴졌다.
각성과 2성 발현을 마친 이래 키시아르는 새로워진 제 몸에 대해 알기 위해 많은 이들을 만나보았다.
발정기에 돌입한 2성 오메가 발현 각성자의 향을 맡아본 일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래도 딱히 조심해야 할 만큼 힘들다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까는 일부러 망토까지 덮어씌워 직접적인 접촉을 차단해야 할 만큼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겉으로는 표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옷자락에 남은 향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마시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피부 안쪽에서 근질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발정기에 돌입한 것도 아니고 그저 막 발현만 했을 뿐인데도 이 정도다. 강렬한 향을 묻힌 채 홀 안으로 달려들어 왔던 키올레 다 디아카의 존재를 보지도 않은 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힘을 각성한 이래 스스로가 남성이기에 앞서 알파라는 2성을 가진 자로서 우선 존재하는 자임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선명하게 느꼈다. 뒤통수가 쭈뼛할 정도의 자극에 숨을 들이마시자마자 여태 잘 억눌러 왔다 여겼던 기운 일부가 저도 모르게 새어나갔을 정도였다.
평범한 이들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몇몇 각성자들이 기절할 것 같은 눈빛으로 굳어 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겨우 힘을 도로 거둘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키올레가 묻히고 들어온 향이 누구의 것인지 몰랐음에도 얼굴을 본 순간 곧바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라면 누구보다도 유능한 보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순간만은 분명 그 때문이리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 확신은 이성을 통한 것이 아닌, 직감에 가까웠다.
다른 이도 아닌 키시아르가 직감에 따라 움직였다니, 오랫동안 그를 따라 왔던 나단 주커만조차 믿기 힘들어할 일이었다.
작게 숨을 내쉬며 팔을 내린 키시아르는 옷을 가다듬고 머리칼을 넘겨 정돈했다. 찬 공기를 쐬는 동안 몸속에서 근질대던 불완전한 열기도 서서히 가라앉아 갔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직 창고 구석에 웅크린 채 이를 악물고 있던 이의 눈빛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거부와 혼란, 두려움으로 뒤엉킨 채 알 수 없는 절망에 가라앉아 있던 낯선 표정.
어둠을 전부 빨아들인 듯 새카맣던 검은 눈동자.
그는 적이 아닌 알파 각성자를, 키시아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토록 빈틈없이 노련하고 독하게 움직이던 이가 내보인 뜻밖의 표정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모르는 척 안도시킨 이후에는 평소처럼 변했다지만, 그때 느꼈던 신경 구석을 긁는 감각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 감각이 알파 각성자로서 느낀 직감의 일환인지, 아니면 아끼는 이를 향한 걱정의 결과인지는 아직 구분하기 어려웠다.
‘2성 발현 시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 때문에 스스로와 주변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는 일 자체는 흔하다. 나도 그랬었고……. 하지만 그 표정은.’
강한 힘을 지닌 존재일수록 자신을 통제하고 다스리지 못하게 될 때 극심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그리 특이하지 않은 일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대마법사와 소드 마스터들이 그러하였고, 키시아르의 지난 인생 또한 어찌 보면 그러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난한 노력의 결과에 다름없었다.
그러니 유더 아일처럼 강한 힘을 지닌 각성자 또한 갑작스러운 2성 발현에 놀라 거부감을 보이는 일 자체는 있을 수 있다 여겼으나 그렇다기에는 그가 내보인 절망의 감정이 너무 무겁게 걸렸다.
키시아르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예복 소매를 내려다본 뒤 홀 안으로 들어섰다.
마병단과 대부분의 손님이 떠났으나 홀에는 아직 몇몇 손님들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은 황태자와 그의 세력들에게 잘 보이고자 남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망토 없이 안으로 돌아온 공작의 모습을 보고 뭘 하고 돌아왔는지 알 만하다는 눈빛으로 수군거렸으나 그런 태도 따위를 신경 쓸 키시아르가 아니었다.
그는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단상 위에 지친 얼굴로 앉아 있는 황후에게 다가갔다.
“이런. 지쳐 보이십니다. 꿀을 탄 페카 차를 올리라 명할까요.”
“…괜찮습니다. 머리가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뭔가 더 마시고 싶지는 않아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기에 키시아르는 조용히 곁에 앉았다. 황태자의 곁에 몰려든 이들과 달리 두 사람의 곁에 다가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황후가 작게 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
“이제 적당히 돌아가 주면 좋으련만, 황태자는 저를 걱정하는 이들을 무르기 힘들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시간을 끄는군요. 아무래도 오늘 식사 약속을 잊은 듯하니 우리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현명하신 결정이십니다. 모든 기다림이 꼭 좋은 결과를 맺는 건 아니니까요.”
선뜻 대답한 키시아르의 웃는 얼굴을 향해 황후가 말은 잘 한다는 듯 살짝 눈을 흘겼다.
“지금 내 상황에 참 잘 맞는 말이군요. 공작이 돌아오면 함께 가려고 여태 기다렸는데 망토를 잃어버리고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혼자서라도 갈 것을 그랬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아. 그건…….”
“또 어디서 귀여운 고양이나 강아지를 발견해서 주고 왔다는 변명은 하지 마세요. 폐하께 말씀드릴 테니까요.”
황후의 엄한 목소리에 무어라 변명을 하려던 키시아르의 입이 곧바로 닫혔다. 대신 그는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지난번에 나누어 주신 차는 감사히 마시고 있습니다. 작년보다 더욱 향이 진하더군요. 폐하께서도 얼마나 좋아하셨을지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넘어가 줄 것 같나요?”
그렇게 말했으나, 황후는 이내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고 말았다. 황제를 위한 약초를 키우고 말려 차로 만드는 건 그녀의 가장 보람된 취미였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키웠던 약초와 배합을 바꾸고 품종을 개량했어요. 수면에 좀 더 도움이 되고 기력 증진에 효과가 있지요.”
“어쩐지, 잠이 잘 오더군요.”
황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키시아르는 주변을 흘긋 돌아보았다. 아마 지금쯤 그가 보낸 시종이 카치안 황태자의 시종에게 편지를 전달했을 테니 곧 소식이 올 터였다.
그 편지를 전달받을 카치안이 무엇을 노릴지 확인하고 나면 그가 어떤 감정과 각오로 이번 일을 시작했는지 알 수 있게 되리라.
“전하.”
과연, 기다렸다는 듯 그 순간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치안의 시종이 은밀히 다가가 귓속에 무어라 속삭이자 황태자의 표정이 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곧바로 처리하려나 보군.’
키시아르가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카치안이 목소리를 높여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인가.”
“예.”
“무슨 일이십니까, 황태자 전하!”
곁을 얼쩡거리던 어느 젊은 학자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카치안 황태자가 고운 눈썹을 찌푸린 채 도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시선이 단상 위에 앉아 있던 황후와 그 곁의 키시아르에게로 향했다.
“……방금 2층 홀을 청소하던 이가 이 편지를 찾았다는군. 죽은 아페토 2공자의 물건이라고 하네.”
그 말에 황후 또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편지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황후를 향해 황태자가 말끝을 흐렸다.
“내용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이리로 보내 보시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이것이옵니다.”
시종이 카치안을 대신하여 접힌 편지를 황후의 앞으로 가져왔다. 겉면에 독살당한 레노어의 피가 조금 묻어나 있었기에 황후는 그것을 직접 만지지 않고 시종을 시켜 읽도록 했다.
키시아르는 유더의 손을 통해 제게로 왔다가 다시 카치안에게 돌려보낸 그 편지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저 가만히 황후의 곁에 앉아 읽는 소리를 들었다.
- 전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 레노어 샨 아페토는 본디 아페토의 사람이나, 옳은 길을 따르는 데에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하여 전하께서 저를 택하신 것이겠지요.
약속의 날, 직접 발밑에 엎드려 충심을 말씀드리기 위하여 나아가겠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무척 짧았으나 내용은 범상치 않았다. 숨을 죽이고 있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술렁였다.
스스로 이름을 언급하였으니 그 편지를 쓴 이가 누구인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받는 사람의 호칭이었다.
레노어는 오로지 ‘전하’라는 호칭으로만 상대를 지칭하여 편지를 썼다. 오늘 파티에 참석한 이 중 전하라고 불릴 수 있는 이는 황태자인 카치안과 공작인 키시아르, 단 둘뿐이었다. 그리고 둘 중 레노어 샨 아페토와 관계가 깊은 이를 따지자면 단연 그의 가문을 봉쇄하는 데 힘을 보탠 키시아르 쪽이었다.
‘옳은 길을 따르기 위해’ 아페토의 사람이지만 ‘전하’에게 충심을 말하겠노라 적은 편지를 들고서 봉쇄된 가문을 홀로 빠져나와 이곳에 온 레노어. 키시아르의 부름으로 그가 여기에 왔던 것이라면, 그의 죽음이 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펠레타 공작이 단독으로 나섰을 리는 없으니 레노어가 이곳에 온 건 실은 황제의 뜻이었던가? 어쩌면 황태자를 독살하려 사주한 범인도 외부에서 온 자가 아니라 이 일과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닐까? 정말로 이 일이 황제의 뜻이라면 앞으로 어디에 줄을 서야 마땅한가.
순식간에 수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제각기 온갖 음모론이 소용돌이쳤다.
수많은 시선이 키시아르를 향한 가운데 황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자 손잡이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공작.”
“아무래도 오늘 내로 황제 폐하께서 바라셨을 식사는 어렵게 되겠군요.”
그러나 수많은 시선 속에 갇힌 키시아르는 그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모든 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