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유더 아일이 제2성 발현을 처음 일으킨 순간은 단장실에서 평소와 같이 보고를 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그때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술과 부단장답게 그날그날 이루어진 훈련과 관련한 이야기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키시아르는 며칠 밤을 샌 듯 몹시 피로해 보였는데 굳이 일과를 모두 끝낸 뒤에야 쉬겠다고 고집을 부려 유더의 답답함을 샀다. 나중에야 그게 발정기를 앞두었기 때문임을 알았으나 그래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루임은 틀림없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갑자기 왜 그러지?’
무어라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말을 멈춘 유더를 향해 키시아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유더는 그 말에 답할 수 없었다. 이상을 느끼고 일어선 순간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폭풍이 전신을 휘감아 번진 뒤였다.
‘뭔가, 이상합니다. 몸이…….’
말하던 도중 아찔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쓰러진 그를 키시아르가 당혹한 얼굴로 받쳐 안아주었다. 그답게 친절한 태도였으나 돌이켜 보면 정말 최악의 대응이었다.
두 사람이 접촉한 순간, 간신히 지키고 있던 균형이 모조리 깨져나가며 눈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엄청난 충돌이 일어났다.
유더는 제 안에서 무언가 마구잡이로 깨져나가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깨진 조각들과 뒤섞인 고통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전신이 재가 될 듯한 열기뿐이었다.
그때 몸을 지배하던 힘에 저항하거나 생각을 할 만한 틈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러나 그런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육신이 이성의 한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 통제가 불가능한 세계로 그리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몇 번인가 정신을 차리기는 했다. 그러나 그저 그뿐이었다. 유더는 이성도, 인지능력도 없는 몽롱한 세계에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할 수 있던 유일한 행위는 그저 구원의 줄이라 여겼던 존재를 필사적으로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끔찍한 고통. 지독한 쾌락.
모든 것이 강제로 뒤섞여 엉망으로 꿰맨 헝겊조각마냥 연결되는 두려움.
한계에 다다랐다고 여기면 바닥 아래 더 깊은 바닥이 드러났다.
그때까지 살아왔던 인간 유더 아일은 모조리 짓뭉개져 녹아 사라지고, 낯선 무언가가 대신 새롭게 그 자리를 채웠다. 아무리 긁어내리고 깨물며 발버둥 쳐도 그 침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태어나 처음 겪는 공격 앞에 그는 한없이 무력했다.
그렇게 뒤섞여 녹고 녹은 끝에 무아에 다다랐던 이성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처음 발현이 시작된 순간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미안하네.’
유더보다 먼저 깨어나 줄곧 곁을 지키고 있었던 키시아르가 부서질 듯 초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네 탓이 아니야.’
머리는 키시아르가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가슴은 동시에 강렬한 고통으로 타올랐다.
그냥 운이 조금 없었던 것뿐이다. 하필 제2성 발현이 시작된 순간 첫 발정이 겹치고, 그때 발정기를 눈앞에 둔 알파 각성자가 눈앞에 있었던 것뿐. 무슨 일이 있었든 죽지는 않았고 능력을 쓰는 데 지장이 없으니 괜찮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면 끝날 문제인데, 그 사실을 이전처럼 깨끗하게 수긍할 수가 없었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이, 받아들이고 생각하여 내보내는 과정조차 모두 바뀐 듯 낯설기만 했고 그것이 끔찍하게 거북하여 도무지 참기가 어려웠다.
그 감각이야말로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증거였다.
그날 이후 유더는 두 번 다시 키시아르를 이전처럼 그저 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실이 못내 이상했고 때로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유더가 바뀐 만큼 키시아르 또한 그날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관계가, 감정이, 거리가, 그리고 그 외에 또 두 사람을 구성하고 지탱했던 이름 모를 많은 것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뒤섞였다. 제가 다른 이들과 달리 향이 없는 2성 발현자가 되었다는 사실 따위는 그 변화에 비하면 그리 놀랍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알아내도록 노력하겠네.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말했으나 키시아르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결국 죽을 때까지 일주일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기이한 일들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키시아르보다 오래 살았던 유더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2성으로 발현한 뒤 서로 몸을 섞었다는 연인들, 심지어는 자식을 갖게 되었다는 이들도 만나 보았으나 누구도 그들과 같은 일을 겪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때 키시아르와 유더 사이에 일어났던 변화의 정체를 속 시원히 설명해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유더는 문득 눈을 떴다. 고통과 열기 때문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사방이 좁고 어두운 탓에 방금 전까지 헤매던 과거와 현실을 금세 구분할 수 없었으나, 꿈틀대며 움직인 손끝에 잡힌 작은 팔찌의 감촉이 겨우 정신을 조금 일깨워 주었다.
그는 아직도 이전과 같은 자세로 단단히 무릎을 세우고 기대앉은 채 마도구 팔찌를 쥐고 있었다. 머릿속은 물에 잠긴 듯 몽롱한데도 전신의 감각은 놀랄 만큼 예민하고 선명하여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저절로 신음이 샐 만큼 엄청난 고통을 선사했다.
헐떡이는 숨을 겨우 삼키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자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밀려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창이 없어 때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밖을 지나는 기척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시선을 조금 돌리기만 해도 너무 아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기에 유더는 이내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전 생의 기억에 따르면 이 고통이 끝남과 동시에 발정이 왔다. 이번에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으니 그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 따름이었다. 이마를 타고 땀이 주르르 흐르는 감각조차 통증이 되어 손이 떨렸다.
‘어서, 빨리.’
반복해서 같은 말을 되뇌고 있으려니 문득 어떤 기시감이 찾아들었다. 생각해 보니 죽기 전에 황궁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두었던 때에 이 비슷한 짓을 하며 시간을 보냈었던 기억이 났다.
고문이 끝나고 감옥에 내던져지면 고통의 흐름을 멍하니 흘려보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어서, 참 재미가 없던 시기였다.
이제는 뿌옇게 흐려진 그 시절 기억을 떠올리다 깜박 또 정신을 잃었던 유더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기척에 별안간 다시 눈을 떴다.
분명 문은 닫혀 있었고, 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도 아주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착각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 기척이 가까워져 올 때마다 숨이 가쁘고 몸이 떨렸다. 유더는 고통 속에서 힘겹게 몸을 움직여 팔찌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기척이 지척에 다가왔음을 느꼈을 때, 비로소 힘을 주어 두 번째 결정을 깨트렸다.
파삭.
손끝에서 돌이 부서지며 방어막이 생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소리 없이 문이 열리며 가느다란 빛이 흘러 들어왔다.
“…….”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아릿한 고통을 느꼈다. 유더는 빛을 가리며 문간에 선 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숨을 죽이고 그자가 어서 저를 눈치채지 못한 채 떠나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시야가 점차 익숙해지며 상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는 마침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해진 순간.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일시에 멈추어 사라졌다.
흐트러진 예복 차림으로 문가에 팔을 짚어 기댄 키시아르가 고요한 눈빛으로 안을 내려다보았다. 방어막을 쳤으니 분명 볼 수 없을 텐데도, 유더는 그 붉은 시선 아래 사지가 그대로 꿰뚫리는 듯한 선연한 감각을 느끼며 낮게 신음을 토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가 여기에.
‘키시아르.’
과거의 기억과 뒤섞여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를 뻔했던 입술이 소리 없이 다물렸다.
침묵 속에서 키시아르의 시선이 천천히 좁은 공간의 내부를 훑고, 이내 유더가 있는 곳을 향해 고정되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 위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거기에 있군.”
“…….”
“이곳 바깥까지 향이 그대로 새어 나오고 있었어. 아무래도, 내가 이리 힘든 걸 봐서는 자네는 오메가로 발현한 모양이군.”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키시아르가 문득 문간을 움켜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가는 도로 풀었다.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는지 아마 모를 거야. 혹여 큰일이 생겼을까…. 나보다 먼저 찾아내 끌고 간 이가 있을까……. 오래간만이었다네. 그런 어지러운 경험은.”
그가 문가에 짚었던 손을 떼고 천천히 앞으로 한 발짝 걸어온 순간, 유더는 천천히 옅어지는 방어막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세 번째 돌을 깨트렸다. 막 사라지려던 방어막 위로 새로운 막이 생겨나자 키시아르가 눈썹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력이 움직이는 걸 보면…. 마도구를 가져왔나? 그렇다면 은신용이겠군. 어디서 구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문가에서 몸이 완전히 떨어지자 문이 자동으로 닫히며 다시 빛을 모두 차단했다. 유더의 몸이 순간 경련하듯 떨리며 딱딱하게 굳었다.
‘안 돼.’
알파인 키시아르와 이 상황에서 단둘이 남지 않기 위해 그동안 노력했던 게 아니었던가. 악몽 같은 기억이 순식간에 범람하며 간신히 억눌렀던 고통이 순식간에 강하게 번졌다. 유더는 본능적으로 키시아르를 피해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이미 벽에 기댄 탓에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듣고 있나?”
키시아르가 조금 힘겨운 기색으로 그렇게 물었을 때, 유더는 네 번째 돌을 깨트렸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은 듯하지만 이곳은 안전하지 않네. 나가려면 은신을 풀어야 해.”
“…….”
드디어 몇 발짝 앞까지 다가온 키시아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단단한 막을 매만지며 기가 막히다는 듯 낮게 웃은 키시아르가 몇 번 숨을 몰아쉰 뒤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서, 유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