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그 판단을 왜 네가 하지?”
말을 끊으며 되묻는 카치안의 눈빛은 얼핏 지극히 평온해 보였으나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그리해도 좋다고 말했던가?”
“아…. 아닙니다.”
“네가 진작부터 나보다 디아카 공작의 말을 더 듣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주인의 명보다 제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할 만큼 멍청한 줄은 몰랐구나.”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화가 나지 않은 듯한 얼굴로 그런 말을 낮게 뇌까리는 황태자를 보며 시종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닙니다, 전하. 오해이십니다. 저는 전하의 명을 들으며 전하만을 위해 존재하는 자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 그러면 명령을 내린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멋대로 일을 처리한 게 나를 우습게 보아서가 아니라 그저 다 오해란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궁에 들어오셨던 순간부터 변함없이 곁을 지킨 저의 충심을 부디 의심치 말아 주십시오.”
시종의 말을 듣고 나서도 카치안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시종은 카치안 황태자를 모신 후 처음으로 겪는 상황에 내심 몹시 당황하였다. 카치안을 모시는 시종들은 대부분 디아카 공작이 붙여 준 이들이었으나 여태까지는 그 사실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황태자는 저를 그 자리에 앉혀 준 디아카 가의 의견을 항상 존중했고, 공작의 말에 크게 반발했던 적이 없는 침착하고 영민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시 이번 축제 기간 내내 심기가 불편하셨던 일 때문인가…….’
디아카 공작은 축제 기간 중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에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자신했으나, 결국 오늘이 올 때까지 단 한 번도 뜻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 일로 공작과 황태자 사이에 처음으로 미묘하게 불편한 기류가 생성되었고, 결국 오늘 파티에 존재감 없는 셋째 자식과 키올레만을 보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직 어린 황태자가 디아카 가의 능력에 불만을 품고 차라리 스스로 나서기로 마음먹기에는 충분할 만한 일이었다.
‘만약 전하께서 디아카 공작께 선을 그어 경고를 하시려는 것이라면 나는 이 일을 디아카 공작께 어찌 보고해야 할지…….’
놀란 시종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는 것을 읽기라도 한 듯 카치안 황태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허리를 숙인 시종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를 때가 되어서야 그는 겨우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답을 돌려주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마.”
“가, 감사합니다, 전하.”
“손발이면 손발답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의심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물론입니다. 절대로 두 번 다시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말한 뒤 카치안 황태자는 분위기를 바꾸어 다시 명을 내렸다.
“그러면 이제 괴한을 찾는 인원은 최소한만 남기고, 나머지는 펠레타 공작을 쫓아라. 갑작스럽게 빠져나갔으니 분명 목적이 있을 터.”
“예.”
“그리고…. 축제 첫날 대행진 사건 이후 내가 디아카 공작에게 알아보아 달라 일렀던 그자가 오늘 보이지 않는 듯하던데.”
“송구합니다, 전하. 그자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펠레타 공작 대신 암살자를 처리했던 그 마병단원 말이다.”
“아, 예. 이제 기억이 났습니다.”
그렇게 말했으나 시종의 머릿속에 남은 그날의 일은 몹시 희미했다. 디아카 공작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암살자들이 모조리 실패하는 충격적인 사건 직후 카치안 황태자가 뜬금없이 조사해 보라 일렀던 마병단원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러나 디아카 공작은 카치안의 말을 그리 중요히 여기지 않았기에 그 말을 겉으로만 수긍하고 이후로는 아무 조사도 하지 않았다.
카치안 황태자도 별말이 없었고 디아카 공작과의 불편한 기류가 강해지며 그 일은 잊은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마병단이 오늘 전부 다 왔다면 그자도 분명 왔을 것이다. 혹 빠진 자가 있었나?”
“모두 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카치안 황태자가 시선을 돌려 거대한 홀 이곳저곳에 서로 모여 있는 무리들을 훑었다. 똑같은 흰 예복을 걸친 마병단원들이었다.
“워낙 짧게 스쳐 지나갔으니 내가 얼굴을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겠지만…. 신경이 쓰이는군. 오늘 또 볼 수 있을지 꽤 궁금했었는데 말이야.”
“예?”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시종이 반문하자 카치안의 얼굴 위로 미미하게 짜증이 서렸다.
“되었다. 가서 시킨 일들이나 곧바로 진행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시종은 혹시나 황태자가 또다시 자신을 붙잡아 무어라 말할까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양 황급히 물러갔다. 홀로 남겨진 황태자는 태연히 귀족들 사이로 돌아가 피로한 안색을 띤 황후의 곁에 앉았다.
아닌 척해도 카치안을 불편해하는 황후의 눈빛이 느껴졌으나 그쯤은 손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죽고 나면 갈 곳이 없어질 자일 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오르 제국 황족이라지만, 헤른 공작가 출신이라 소개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피가 옅은 방계 출신으로 유명한 황후나 디아카 가가 내세운 양자인 카치안 황태자는 모두 외부에서 온 부외자나 마찬가지였다.
씨가 없는 황제 때문에 자식을 갖지 못한 황후가 저를 볼 때마다 어떤 불안감을 느낄지 누구보다 선명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카치안은 그녀를 보면서 미약한 안도감을 느꼈다.
언제나 황제 대신 공식 석상에 홀로 외롭게 나타나 자리를 지키다 돌아가는 황후는 곧 카치안의 밝은 미래를 증명하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황태자 전하! 오셨군요.”
가식 어린 태도로 암살을 당할 뻔한 카치안을 염려하는 귀족들을 향해 소년 황태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단장님!”
한편, 홀에 들어가지 못한 채 숨을 진정시키던 가케인은 갑작스레 안에서 빠져나온 장신의 그림자를 보고 벌떡 일어서서 목소리를 냈다. 수도 없이 걸쳐 놓은 보석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걸어가던 키시아르가 가케인을 보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아까 느꼈던 오싹함이 다시 올라오려 했으나 가케인은 억지로 그 감각을 꿀꺽 삼켰다. 일단 키시아르는 겉보기에는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단장님. 홀로 어디를 가시려 하십니까.”
“그러는 자네야말로 왜 여기에 홀로 있지?”
“저는…….”
멍하니 대답하던 중 겨우 제 품속에 든 레노어의 편지를 기억해낸 가케인이 그것을 빠르게 끄집어냈다.
“답답하여 잠시 밖에 나갔다가 이것을 받았습니다.”
“편지인가.”
“죽은 레노어 샨 아페토 공자가 이곳에 오기 전 하인에게 맡기며 레블린 공자에게 부탁한다 말했다 합니다. 하인이 이것을 전달한 뒤 보호를 원하였기에 제가 일단 약조하고 받아왔습니다.”
평소라면 곧장 무어라 답을 했을 키시아르는 잠시 그 종이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단장님?”
가케인의 신중한 부름을 들은 키시아르가 잠시 후 깊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 편지, 취급을 조심해야겠군. 좋지 않은 냄새가 나.”
“예?”
“그건 자네가 보관하고 있다가 돌아가면 곧장 내 집무실로 보내게. 그리고 홀로 돌아가거든 에버 벡이나 스티버 렌들리를 찾아 마병단의 귀가를 대신 맡기겠다 전해줄 수 있겠나?”
“귀가 말입니까? 그러면 단장님께서는…….”
“나는 오늘 황제 폐하와 간만에 식사를 하고 가야 하니 조금 오래 남아 있게 될 듯하군. 이 부분은 미리 약속된 사항이라 부관과 부단장들에게는 미리 언질해 두었으니 명만 대신 전해주면 알아서 해 줄 거야. 걱정 말게.”
“알겠습니다.”
키시아르에게서 느꼈던 묘한 태도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어느새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한 단장다운 모습을 보였다.
“본래대로라면 내가 직접 귀가를 명해야겠으나 지금은…. 갑작스레 갈 곳이 생겨 어렵겠어.”
“갈 곳이라면…….”
“부탁해도 되겠나?”
키시아르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명을 내렸다. 가케인은 약간 걱정스러워졌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 그러면 단장님을 수행할 단원은 남기지 않고 모두 귀가하는 겁니까?”
“아니.”
다시 몸을 돌린 키시아르가 짤막하게 대답하며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가케인은 복도 너머를 걷고 있는 병사 몇 무리를 보았다. 무언가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는 태도를 보아하니 레노어가 죽은 일로 주변을 조사 중인 모양이었다.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키시아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좌, 유더 아일이 남을 테니 걱정 말게.”
유더의 이름을 들은 가케인은 그러고 보니 그가 계속해서 파티장 내에서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단장님께서 먼저 심부름이라도 보내셨던 걸까.’
“그러면 부탁하지.”
키시아르는 마지막 말을 끝내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진 뒤에야 가케인은 문득 키시아르에게서 느꼈던 그 낯선 분위기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초조함이었다. 키시아르는 평소와 달리 초조한 기색을 잠시 드러냈던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던 단장이 갑작스레 그런 식으로 홀로 자리를 비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황족인 그가 황궁에서 홀로 움직인다 하여 위험해지지는 않겠지만 낯선 태도를 보아버린 이상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가케인은 마병단원으로서 단장이 제게 맡긴 일을 처리하는 쪽이 우선임을 알았다.
그는 편지를 도로 품속에 넣고 신분패를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