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파티장을 메운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은 이 기이한 상황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 웃고 떠들기에 바빴으나 오로지 제2성을 발현한 그들만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키시아르가 내뿜은 거대한 기운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에게서 이 정도로 강한 존재감이 뿜어져 나올 수 있을까. 그동안 나름대로 키시아르를 가까이에서 보아온 덕에 그가 두르고 다니는 강렬한 기운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여겼었으나 지금 느끼는 감각은 그때와 차원이 달랐다.
가케인이 압박감에 짓눌려 막 벽을 짚을 뻔했을 때, 키시아르는 갑작스럽게 기운을 거두었다. 가케인은 어서 홀로 입장하여 그에게 레노어의 하인이 넘겨준 편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갑자기 사라진 압박감을 견디기 위해 급히 숨을 헐떡였다.
“오랜만이군, 키올레 다 디아카.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돌아간 줄 알았는데 어디를 급히 다녀온 모양이야.”
지나가던 시종이 든 쟁반에서 음료가 담긴 잔을 가볍게 잡아챈 키시아르가 아직 호흡이 다 가라앉지 않은 키올레를 향해 자연스럽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아, ……네.”
아무리 성격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 키올레라도 키시아르를 직접 대면한 앞에서는 묘하게 주눅이 들었다. 어차피 키시아르를 만나러 온 터라 그가 먼저 다가와 주니 다행이기는 하였으나 솔직한 마음으로는 결코 단둘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혹시 뭔가를 벌써 알아채고 다가온 건가?’
키올레는 제 몸에 2성 발현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기운이 묻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흘끔대며 그와 키시아르를 쳐다보는 시선들만은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그 중에는 물론 카치안 황태자도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눈에 거슬리기 짝이 없는 상대인 펠레타 공작이 갑자기 키올레에게 먼저 다가간 상황이니 신경이 쓰일 만도 했다. 저 멀리서 키올레와 함께 온 셋째 형이 눈을 부릅뜨고 당장 이쪽으로 오라고 눈짓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모두 겉으로는 이쪽을 보지 않는 척하면서도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눌지 몹시 경계하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괜한 의심을 사기 전에 당장 펠레타 공작 앞에서 꺼졌을 텐데…….’
공교롭게도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키올레는 그가 두고 온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떠올렸다. 뚱한 얼굴을 해서는 위아래를 모르는 소리만 해대는 건방지고 재수 없는 자. 감히 디아카 가의 위상조차 모르고 저를 돕지 않으면 영원히 잠들게 해 버리겠다는 등골 서늘한 서약을 강제로 맺게 한 그자는 현재 작은 창고 안에서 이유 모를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대체 왜 그놈을 따라가서 이 짓을 하러 온 건지.’
키올레는 여기로 돌아오는 내내 그자를 괜히 따라갔다고 몇 번이나 반복하여 후회했다. 돌아갔을 때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이 이미 가버리고 없는 상태라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펠레타 공작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었고, 심지어는 키올레가 말을 걸기 위해 어떤 이유를 대야 할지 고민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빠르게 먼저 다가왔다.
키올레는 썩어서 아픈 이처럼 걸리적대는 검은 머리 사내의 얼굴을 지우려 노력하면서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미간을 폈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는데, 그만 돌아오던 도중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 작년에도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자네처럼 자주 황궁에 오는 이도 길을 잃다니 의외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키시아르가 이내 도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델루마 궁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 아직도 대마법사 루마의 마력이 살아 숨 쉬는 곳이라 가끔씩 없던 길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전설이 있으니 말이네.”
“그…렇습니까?”
빌어먹을 펠레타 공작. 키올레는 마치 제가 멍청하다고 조롱하는 듯 미소를 짓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향해 속으로 욕을 했다.
‘젠장. 빨리 말해 버리고 벗어나야 하는데 쓸데없는 소리만 계속 하고 있으니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
초조해진 키올레의 속도 모르고 키시아르는 계속해서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자네에게서 평소와 다른 향이 나는군. 혹 향수를 바꾸었나?”
“아뇨.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향에 관심이…. 많으셨나 보군요.”
무슨 향수 따위가 궁금하다고 난리인가. 키올레가 돌을 씹은 표정이 되어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목소리를 낮추어 부드럽게 속삭였다.
“많은 편이지. 우리 각성자들 중에는 간혹 평범한 이가 맡을 수 없는 향을 뿌리는 자들도 있다네. 체향보다 훨씬 짙어서 어떤 때는 향을 뿌리는 이와 함께 있던 제3자에게조차 그게 묻어날 때도 있지. 꽤 신기한 현상 아닌가?”
키올레는 키시아르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각성자라는 말에 겨우 목적을 꺼낼 빌미가 생겼다 여기고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페토 가의 멍… 아니, 그들과는 달라서 그런 힘에는 관심도 없고 잘 모릅니다. 듣자 하니 그, 발현이란 것도 있다 하던데 그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제발 알아서 눈치채 주기를. 키올레의 필사적인 염원에도 키시아르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2성 발현에 대해 알고 있나? 재미있군. 누구에게 들었지?”
누구에게 들었는가. 여기서부터가 목적한 정보를 전할 최적의 순간임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키올레는 음료를 마시는 척 잔을 입가로 올리며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면 공작 전하께서 알아서 여겨주실 것이라 말한 이가 있었습니다.”
한 모금 머금은 음료가 씁쓸한 향을 남기고 목 안으로 넘어갔다. 잔을 내린 키올레는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는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 어깨를 굳혔다.
‘뭐지?’
“그래…. 실은 내 보좌가 아까 전 자리를 비웠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네. 자네처럼 마력에 홀려 길이라도 잃었나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그와 자네는 그렇지 않아도 안면이 있지 않나?”
“……예. 있었죠.”
주어가 없는 대화였으나 두 사람 모두 대충 속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보좌를 마병단에서 내보내라는 부탁이 디아카 가에서 아직도 꾸준히 오기에 나는 자네가 아직 그때의 일에 꽤 화가 나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솔직히 말하자면, 협박당했을 뿐입니다.”
“협박이라.”
잔 뒤에 입술을 감추고 중얼거린 대꾸에 키시아르가 눈을 가늘게 휘어 웃었다.
“알려주어서 고맙네. 이 일은 추후 잊지 않고 갚도록 하지.”
키시아르가 몸을 돌려 테라스 쪽으로 사라졌다. 키올레는 그제야 겨우 가늘게 숨을 내쉬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는 제가 생각보다 몹시 긴장한 상태였음을 깨닫고 불쾌함에 휩싸였다.
‘내가 그놈을 돕다니…….’
모든 것이 서약서 때문이다. 그놈의 서약서만 아니었다면 감히 황태자가 보는 앞에서 간도 크게 키시아르와 대화를 나누는 일 따위는 없었을 터였다.
“키올레! 너, 미친 게냐? 감히 황태자 전하가 지켜보시는 앞에서 펠레타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다니!”
펠레타 공작이 사라지자마자 다가온 셋째 형이 목소리를 낮추어 키올레를 마구 꾸짖었으나 그런 훈계 따위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아버지의 관심 한 조각조차 받지 못하는 인물로, 키올레를 질투하여 늘 짜증을 부리는 귀찮은 존재일 따름이었다.
금단추를 사람에게 가차 없이 날려 보내던 검은 머리 마병단 사내에 비하면 그가 내뿜는 미약한 적의는 우습기 그지없었다.
“별 얘기 안 했어. 저쪽에서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기에 대답한 것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키올레가 날카롭게 대꾸하자 형의 얼굴이 무안을 당한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변했다.
“네 녀석이 아버님의 귀여움을 받다 보니 방자해진 줄은 알았지만 오늘은 도가 지나쳤다. 집에 돌아가면 곧장 아버님께 오늘 있었던 일을 전부 고해버릴 테니…….”
‘그러든가, 말든가.’
형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시선을 돌린 키올레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홀에 있던 키시아르가 어느새 사라졌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토록 키가 크고 존재감이 강한 이가 어찌 그리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 마병단 놈이 전하라고 한 마지막 한 마디를 잊어버리고 못 말했는데.’
키시아르가 올 필요는 없다고 전하라 했었던가? 약간 찜찜한 기분이 찾아들었으나 그리 중요한 사항은 아니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필요한 정보는 대충 다 전했으니 그 정도로도 그놈은 키올레에게 절을 하며 감사해해야 마땅했다.
키시아르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하여 파티장의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일부는 집에 돌아갔으나 대부분은 레노어의 죽음과 황태자 암살을 사주하려 한 이가 누구일지 궁금해하며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두의 관심 속에서 걱정을 받고 있던 카치안 황태자는 의젓한 모습을 유지했으나,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주변을 지키던 시종 한 사람을 은밀히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갑자기 시종들을 기절시키고 사라졌다는 괴한은 찾았나?”
“아직이라고 합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능력이 미흡하군.”
“하지만 명령하신 일에 어긋남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하 창고에서도 사람이 들어간 흔적은 없다 하였으니 혹 다른 이유로 기절한 것일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다른 이유라.”
카치안 황태자의 시선을 마주한 시종이 몸을 떨면서도 입을 열어 답을 했다.
“델루마 궁에는 대마법사 루마가 남긴 마력이 남아 있으니 그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까 갑옷 기사를 만났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어쩌면 알지 못하는 사이 기절했던 이들이 갑옷 기사를 자극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하여…….”
“그 판단을 왜 네가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