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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56화 (156/805)

156화

어지간한 고통은 고통이라 생각지도 않았지만 이 감각은 그런 아픔과는 전혀 달랐다. 머리가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해도 본능이 다가올 격변에 어쩔 줄 모르고 두려워하는 그 끔찍한 감각을 과연 누구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각성자라 하여 꼭 2성 발현을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2성 발현을 한 이들이라 하여 모두 같은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며칠간 계속되는 미열이나 통증 등으로 전조증상이 나타나다 근 1주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천천히 앓으며 변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어떤 이들은 예측할 수도 없이 갑작스럽게 그 모든 고통을 한순간 뿜어내고 급격히 변화하기도 했다. 유더가 바로 그런 운 나쁜 케이스였다.

발현이 끝난 이후의 첫 발정 시기 또한 그랬다. 누군가는 2성 발현 이후에도 오랫동안 첫 발정이 오지 않기도 하는데, 또 누군가는 발현 직후 곧바로 발정기가 시작되기도 했다.

그 차이가 어디서 나타나는지는 이전 생에서도 연구가 부족해 다 알지 못했다. 다만 힘을 각성함과 동시에 2성 발현까지 하는 경우가 가장 고통 없이 변화한다는 사실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이제껏 익숙하게 누리고 살아왔던 신체가 한순간에 열을 뿜어내고 뒤틀리며 근본부터 뒤바뀌어버린 끝에 겉은 이전과 같을지언정 속은 완전히 새로운 몸이 되어버린다. 그게 바로 유더가 알고 있는 2성 발현의 모든 것이었다.

‘준비를 안 한 것보다는 나았지만…. 이전에도, 지금도 왜 항상 이런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만 발현이 시작되는지.’

가능하다면 이번에는 아예 발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제2성 발현을 한 이래 그에게 좋았던 일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으므로.

‘이번에도 오메가로 발현하게 될까.’

아마 그러리라 짐작했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로 돌아와 많은 일들이 바뀌면서 제 몸조차 완전히 예측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차라리 끝도 없이 많은 적이나 거대한 몬스터를 단신으로 상대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유더는 무거운 머리를 무릎 위에 파묻었다. 몸을 감싼 예복 자락의 부드러운 감촉조차 점차 전신을 찌르는 가시처럼 아프게 느껴지고 있었으나 어떻게든 참아내야 했다.

순간이 영원과도 같은 인내 속에서 점차 멍해지는 정신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기억의 바다를 표류하기 시작했다.

***

그 시각, 가케인 볼룬발트는 지친 얼굴로 파티장을 빠져나와 화려한 마차가 줄지어 늘어선 풍경이 잘 보이는 정원을 걷고 있었다.

파티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 아페토 2공자가 죽는 바람에 파티에 오기 전 각오했던 것보다는 사람들을 만날 일이 훨씬 적어졌지만, 그래도 그에게 몰래 추파를 던진 귀족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누군가 죽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잘생긴 젊은 청년에게 다가와 노골적이고도 고압적인 태도로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웃으며 뿌리치다 보니 신물이 났다.

‘정말 잘생겼군. 마병단이라고? 그런 곳보다는 우리 가문으로 오는 게 어떤가?’

‘내게 관심이 있다면 여기로 연락하게. 외롭지 않도록 도와줄 테니.’

‘볼룬발트 가라고? 아. 알지. 남부에서 이름난 옛 명가 아닌가. 이곳까지 오느라 힘들었겠어. 평민들과 지내는 게 어렵지 않나?’

차라리 대놓고 그의 젊음이나 외모에 관심을 보이는 쪽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그러나 가케인을 가장 지치게 만드는 이들은 그의 가문이 몰락했음을 알면서 교묘하게 비웃는 자들이었다.

레노어가 죽은 뒤 곧 돌아가자고 명할 줄 알았던 키시아르가 무슨 일인지 아직 마병단을 파티장에 머물게 하는 중이었기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으나, 돌아갈 생각을 하니 어깨가 절로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유더는 어디로 갔을까. 아까부터 계속 안 보이던데…….’

존재 자체만으로도 단단한 철벽처럼 단원들의 숨 쉴 구석이 되어 주던 유더가 없어서 이리 더 힘든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가케인은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배회하고 있는 한 사내를 보았다.

‘옷에 새긴 문장을 보니 아페토 가 사람인가?’

“저, 왜 그러고 계십니까?”

“히익.”

괜스레 의심스러운 마음에 다가가 말을 걸자 사내는 경기하듯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의 시선이 가케인이 입은 흰 예복과 마병단 소속임을 나타내는 문장이 새겨진 옷자락을 어지럽게 훑었다.

“마, 마, 마병단?”

“그렇습니다만.”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꾸하자 남자가 곧장 몸을 일으켜 가케인을 붙잡았다. 땀에 젖어 핏발이 선 눈에서 필사적인 광기가 엿보였다.

“마병단원님! 살려주십시오! 지, 지금 거기에 저희 3공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제발 저를 데려가 그분과 만나게 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이게 뭐 하는…. 누구신데 이러십니까?”

“저는 레노어 2공자님의 하인입니다!”

그제야 정체를 밝힌 하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심히 두려워했다.

‘죽은 2공자의 하인?’

가케인은 묘한 예감을 느끼고 그의 말을 들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레블린 공자님을 만나려 하시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도와드리기 어렵습니다. 먼저 말씀을 해 주시죠.”

“저, 저희 공자님께서는 사실 오늘 이곳에 어떤 분을 만나기 위해 오셨다 하셨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제게 남기신 말씀이 있었는데, 혹 돌아오지 못하게 되실 경우 3공자님께 편지를 드리라는 명이었습죠. 그때는 중요한 말씀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하인은 레노어가 독을 먹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어쩌면 그가 이 사태를 예견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레노어는 본인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상상까지는 하지 않고 단지 황태자와의 만남이 안 좋게 결렬될 경우를 대비하려던 것뿐이었으나, 죽은 이는 답을 할 수 없는 법이었다.

모시던 이가 죽은 이상 본저로 돌아가도 하인에게 돌아올 대가는 매질과 죽음뿐이었다. 그가 살기 위해 남은 방법은 오로지 레블린을 찾아 레노어의 편지를 전하는 것뿐이었는데, 일개 하인의 몸으로 마병단 깊숙이 숨어 있을 레블린을 어찌 찾아야 할지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해 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이가 바로 파티장을 뛰쳐나와 정처 없이 걷고 있던 가케인이었다는 말에 가케인은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였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사태군.’

“레노어 공자가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는 아십니까?”

“모, 모릅니다. 저는 그런 것까지는……. 아까 시종 분들이 오셔서 비슷한 질문을 하시기에 그때도 같은 답을 드렸습니다.”

“시종? 누구의 시종 말이죠?”

“그, 글쎄요. 허리에 붉은 띠를 한 분들이었는데…….”

순간 가케인의 머릿속에서는 카치안 황태자의 뒤를 따르던 시종들의 허리에 일제히 매여 있던 붉은 띠가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황태자의 시종들이 직접 저자를 찾아 질문을 했다…라. 레노어 공자가 마신 독이 본래는 황태자 전하를 노린 독이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했다. 우연히 독을 마신 것뿐인 레노어의 하인에게 굳이 직속 시종들을 보내 이것저것 캐물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지 않아도 황궁을 지키는 이들이 이미 조사에 들어갔으니 무언가 궁금했다면 그들에게 부탁했으면 될 일이었다.

가케인은 이 사건에 도움이 될 열쇠가 어쩌면 지금 제 앞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예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혹 편지에 대해서도, 그분들에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뇨. 그건 아무도 묻지 않으셨기도 하고 저도 경황이 없어서…….”

“잘 하셨습니다.”

“예?”

가케인은 어리둥절하게 반문한 하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편지를 지금 제게 주십시오. 책임지고 곧장 단장님께 말씀드려 당신과 편지를 안전하게 모두 마병단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찡그린 얼굴로 매질을 하던 주인과 달리 선량하고 확신에 넘쳐 보이는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을 보며 하인은 잠시 넋을 잃었다. 저런 이를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아, 알겠습니다…….”

본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외모가 십분 힘을 발휘하여, 가케인은 손쉽게 레노어의 편지를 손에 넣었다. 그는 하인을 마병단의 마차로 보내, 그곳에 타 몸을 숨기도록 한 뒤에 곧장 파티장을 향해 달려갔다.

파티장 입구에는 저만큼이나 급히 뛰어온 듯한 한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신분패를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길을 잃었다고 했잖아! 이딴 걸 왜 매번 확인하려 드는 거야!”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얼굴은 가케인에게도 꽤 낯이 익었다. 몇 번이나 유더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단숨에 깨져나갔던 디아카 공작가의 아들, 키올레 다 디아카였다.

가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혹시나 그의 눈에 띌까 싶어 다른 입구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멀리서 스쳐지나갔던 그 순간, 가케인은 문득 제 코끝을 스친 기이한 향기를 느끼고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향?’

그것을 향이라 말할 수 있을까? 향과 비슷하지만 너무나 농도가 짙어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반응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키올레 쪽에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향을 가케인은 이전에도 맡은 적이 있었다.

가깝게는 최근 마병단에 구조된 아페토 가의 각성자들에게서, 얼마 전 제2성을 발현하여 며칠간 앓아누웠던 지미의 숙소에서, 그리고 또 발정기에 가까워진 상태로 저를 스쳐 지나가던 마병단의 많은 동료들에게서.

‘…하지만 저자는 분명, 각성자가 아닐 텐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막 파티장에 들어서는 키올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케인은, 저 멀리 황족들이 모여 있던 자리에서 정확하게 저와 같은 곳을 향하여 고개를 돌린 한 사내를 보았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주변의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케인은 언제나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던 단장의 얼굴에서 거의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진 낯선 표정을 보았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등골을 타고 저절로 오싹한 감각이 흘렀다. 그러한 기분을 느낀 이가 가케인뿐만은 아니었는지 곳곳에서 숨을 죽인 채 같은 곳을 바라보는 마병단원들이 보였다. 가케인은 그들이 모두 제2성 발현자들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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