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얼빠진 얼굴로 멈춰 있는 키올레를 지나쳐 휘청휘청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기 전, 카치안의 시종들을 기절시켜 던져두었던 복도 구석이 텅 비어 있었다. 다행히 금단추를 다시 던질 일은 없을 듯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발끝부터 불에 타는 듯 아찔한 고통이 올라왔으나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이성을 재촉하며 겨우 벽을 짚고 걷고 있자니 무언가가 발끝에 툭 걸렸다. 넘어질 뻔한 몸을 잡아채 준 이는 아직도 돌아가지 않은 키올레였다.
“아직, 안 갔어? 당장, 가라고, 했잖….”
“뭔가 이상해. 중독된 게 아니라면 대체 뭔데?”
유더는 눈앞이 핑 돌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입 안쪽을 꽉 깨물었다. 우릿한 통증에 겨우 정신이 다시 조금 맑아졌다.
“너와는 상관없지. 들켜서 시끄러워지기 전에, 돌아가.”
“아니. 너 때문에 나는 강제로 널 도와야 하는 서약에 묶였는데 어떻게 얌전히 따라? 만약 네가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내가 서약 위반으로 끝장나지 않는다는 보장 있어? 뭐가 뭔지 똑바로 말해야 믿든 말든 할 것 아니냐!”
“거기, 누구인가!”
젠장. 유더가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욕설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키올레가 그의 팔을 잡아 바로 옆에 있던 커다란 갑옷 뒤로 허둥지둥 숨었다. 평소라면 곧장 뿌리쳤을 허술한 움직임조차 막지 못할 만큼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몸을 숨기자마자 쓰러지듯 웅크려 숨을 헐떡이는 유더를 내려다보며 키올레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횡설수설 입을 놀렸다.
“이런 젠……. 너 때문에 욕도 못 해! 하, 어, 어떻게 한다. 너, 단추 던지는 건 지금은 어렵겠지? 내 무기…. 아. 입장 전 풀어서 제출했었지. 저 녀석들, 왠지 느낌이 안 좋은데 아무래도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아닌 것 같…….”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유더는 씨근대는 숨으로 겨우 그 한 마디만을 한 뒤 어렵게 팔을 들어 키올레의 얼굴을 거칠게 짓눌렀다.
“웁!”
파티 입장 전 무기는 모두 풀어서 제출해야 했기에 유더 또한 평소 몸에 지녔던 검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걱정하지 않은 건 언제든 단추처럼 던질 거리만 있으면 가볍게 능력 발휘가 가능했기 때문이었으나, 설마 이리 어지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발현이 일어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대비를 해 온다고 했음에도 정말 최악의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쓰려고 하면, 쓸 수는 있겠지만.’
혹 힘을 사용했다가 이미 궤도에 오르고 있는 발현 속도가 더욱 빨라져 이성을 잃기라도 하면 그때는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터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손 안에 쥔 금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숨을 헐떡이던 유더는 문득 제가 이곳에 오기 전 했던 대비책 하나를 기억해냈다.
‘아. 맞아. 마도구. 팔찌가 있었어.’
그는 복도 너머에서 급히 뛰어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빠르게 소매를 걷었다. 이곳에 오기 전 흰 장갑 위에 눈에 띄지 않게 낀 얇은 팔찌를 찾아내자마자 곧장 줄에 꿰인 검은 돌 하나를 손으로 눌러 부수었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이 소금결정처럼 힘없이 깨지며,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유더와 키올레를 막처럼 둘러쌌다. 달려온 병사들이 그들이 숨은 갑옷 쪽을 향해 무기를 겨눈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다! 여기서 소리가……. 어?”
“아무것도 없지 않나!”
“분명히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 목소리였는데…….”
마법사 타이스 율만의 제자 알릭이 준 마도구 팔찌는 조잡한 생김새와 달리 그 힘을 제대로 발휘했다. 병사들은 투명하게 쳐진 방어막 뒤에 은신한 사람 둘이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방어막이 그들을 막아줄 시간은 채 몇 분도 되지 않을 테니, 부디 그 사이에 병사들이 의심을 거두고 물러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 게…….”
“어, 잠깐! 뒤로 물러나!”
서로 무어라 의견을 나누던 병사들 중 누군가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유더와 키올레의 앞을 막고 있던 갑옷이 쇠끼리 부딪치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힘없이 늘어져 있던 몸을 펴고 팔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마의 갑옷기사다!”
작은 방어막 뒤에 웅크려 몸속에서 터져 나오려 하는 감각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던 유더는 기이한 소리를 듣고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대마법사 루마의 이름을 딴 델루마 궁에는 마법에 걸린 채 천 년 가까운 세월을 멋대로 걸어 다니며 움직여 온 갑옷기사가 있었다. 지미가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말했던 그 불가사의한 존재가 오늘은 마침 여기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텅 빈 갑옷이 손에 쥔 검을 덜그럭대며 휘두르려 하자 병사들이 욕설을 뇌까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필 저게 여기에 있었다니. 왜 일반 갑옷인 척 서 있던 거야? 젠장할.”
“이런 멍청한 놈. 갑옷기사가 낸 소리를 사람 소리로 착각한 거냐? 똑바로 판단 좀 하지 못해? 한시라도 빨리 그 쥐새끼들을 찾아야 한단 말이다! 물러나!”
병사들이 갑옷을 피해 사라진 뒤에도 유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대한 갑옷은 눈 부분에서 붉은 빛을 뿌리며 뒤뚱뒤뚱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철걱대는 소리를 내며 병사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와 함께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방어막도 힘이 다하여 사라졌다.
“……허억.”
그제야 키올레가 억눌린 숨을 토해내며 몸을 늘어뜨렸다.
“델루마 궁에 있다던 갑옷기사를 내가 여기서 볼 줄이야……. 어릴 때 그렇게 찾으러 다녀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봐. 너도 봤지? 그런데 아까 그 팔찌는 뭐야. 마도구냐? 의뭉스러운 놈 같으니. 그런 걸 숨기고 들어와?”
유더는 조잘대는 키올레의 말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고 무언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성이 빠르게 깜박일 때마다 본능이 위험하다고 경보를 울려댔다.
“으, 하아. 윽…….”
대답 대신 바닥을 긁어내리며 고통을 억누르는 유더를 보며 키올레가 그제야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음을 깨달은 듯 황급히 몸을 부축해 끌어올렸다. 그 작은 접촉만으로도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져 몸이 퍼드득 떨렸다.
“놔…….”
“네놈이 죽으면 나도 죽을지 모르니 안 돼. 파티장까지는 데려다 줄 테니까, 그 다음에는 알아서 해! 거긴 네놈 동료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된다. 파티장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키올레가 돌아갈 때까지 제대로 일처리를 하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유더는 급박하게 그를 밀치고 쓰러지다시피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헉.”
아픔으로 아찔하게 일그러지는 눈앞에 문이 하나 보였다. 다리를 끌며 걸어가 문을 열자 궁 내에서 사용하는 청소 도구와 집기를 보관하는 듯한 작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라면.’
점차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어졌지만 이 정도라면 잠시 몸을 숨길 정도는 될 듯했다. 유더는 이를 악물고 키올레를 돌아보았다. 저런 얼빠진 놈에게 도움을 청하느니 차라리 황태자의 시종들에게 발각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해 볼 수 있는 곳까지는 해 보아야 했다.
“그렇게까지 돕고 싶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아까 말한 것처럼 길을 잃은 척하고 돌아가서 단장님께 말을 전해.”
“뭐?”
“발현. 발현이 일어났다고만 전하면 이해하실 거다. …하지만 그분이 오셔서는 안 된다고도 말해.”
“뭐야?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그런 걸 어떻게…….”
“가.”
유더는 키올레가 무어라 외치기 전 문을 닫았다. 키올레가 또다시 기어들어온다면 이번에는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단추를 날려버릴 생각이었으나 다행히 문 밖은 조용했다.
키올레가 말을 전하는 데 성공하리라는 기대는 거의 없지만, 설령 하지 못하더라도 한 시간이 지나 돌아오지 않으면 키시아르는 유더를 찾기 시작하리라. 믿을 구석은 거기뿐이었다.
겨우 버티고 있던 다리에서 그제야 힘이 쭉 풀렸다. 유더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 가장 구석진 곳을 향해 나아갔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죽은 레노어가 타고 온 마차를 찾아야 한다. 그가 데려온 하인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하다고 황태자의 시종들이 말했지만, 제가 다시 찾아보면 무언가 다른 걸 찾아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키시아르가 주었던 한 시간은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입술을 지그시 깨문 순간 또다시 몸속에서 쿵 하고 깊은 울림이 퍼져나갔다.
“으윽…….”
유더는 몸을 감싼 채 신음을 삼켰다.
‘하필 이런 순간에.’
발현이 곧 다가오리라는 생각은 했다. 나름대로 준비도 하였다. 하지만 이건 이전 생의 기억을 토대로 예측하였던 시기보다 확실히 빨랐다. 반점이 영향을 미친 것인가? 아니면 발정기에 다다른 알파들을 만났던 일 때문일까.
‘아니…. 추측이 다 무슨 소용이야. 이미 시작된 것을.’
사고를 예측하려 해 보았자 이미 일어난 뒤에는 쓸모가 없다. 이전 생에서도 비슷한 경유로 이미 깨달은 일이었다.
유더는 겨우 몸을 일으켜 벽과 벽 사이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워 앉았다. 이 자세라면 아무리 힘이 없어지고 이성이 날아가도 빠르게 마도구를 작동할 수 있을 터였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 홀로 내뿜는 가쁜 호흡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점차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는 고통으로 싸늘하게 식었던 몸이 이제는 열을 뿜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손가락부터 발가락까지 전신의 뼈마디가 형틀에 넣고 조이는 고문을 받는 듯 비틀리는 아픔으로 신음했다.
‘본격적으로 곧 발현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