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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52화 (152/805)

152화

파티장에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출입 전 확인받아야 하는 신분패, 파티 도중 스쳤을 수많은 사람들과의 접촉, 그도 아니라면 그가 타고 왔을 마차 안에 무언가 손을 써 두었을지도 모른다. 후보가 될 만한 요소들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려보면서 유더는 저 멀리서 웃고 있는 카치안 황태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어쩐지 답지 않게 죽은 자를 구경거리로 남도록 놓아두지 말라는 둥의 말을 하며 시체를 빨리 수습하고 싶어 하더라니, 그런 독이 검출될까 처리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군.’

유더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레노어의 시체를 수습하여 가져간 이들과 독잔을 들고 왔다는 이유로 잡혀간 시종, 그리고 레노어가 타고 온 마차를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한 시간 사이에 모두 뒤지려면 시간이 없었다.

“으음. 아무래도 이제는 더 읽히는 게 없네. 뭔가 더 도울 건 없어?”

유더는 손수건에 싼 잔 조각을 내미는 칸나의 손을 도로 밀어냈다.

“칸나. 그건 네가 계속 가지고 있어.”

“응? 그럼 유더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유더는 평온하게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칸나는 그에게서 별다른 기색을 읽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걸어서 화장실이 있는 복도로 나갔다. 복도를 지키고 있던 경비대 몇 명이 유더를 흘긋 보고는 평범한 손님이라 여겼는지 이내 관심을 껐다.

그러나 화장실 안에서 막 나오던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뭐, 뭐야 너! 또 날 따라왔……. 웁!”

유더는 눈을 크게 뜬 키올레가 손가락질을 하며 무어라 말하기 전 그의 입을 막고 뒷덜미를 움켜쥔 채 인적이 없는 복도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가 되면 찾을 셈이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그에게는 운이 없고 제게는 운이 좋았다.

“우우우웁!”

“조용히 해. 미리 말해 두지만 널 쫓아온 게 아니고, 가던 길에 마침 마주친 것뿐이야.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 답만 듣고 나면 풀어줄게. 알아들었으면 눈을 세 번 깜박여.”

썩어도 기사라고 제법 기운이 센 키올레를 순수한 힘만으로 제압하기는 조금 어려웠으므로 유더는 그를 바닥에 눕혀 놓고 올라타 목 아래쪽을 틀어쥔 뒤 최대한 빠르게 목적을 밝혔다. 그러자 잠시 후 물고기처럼 퍼덕대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고, 어둠 속에서 짙은 암적색 눈동자가 세 번 정확하게 깜박였다. 유더는 키올레를 짓누르던 손을 천천히 떼어주었다.

“푸하. 이, 너, 마병단 놈, 감히……!”

키올레가 너무나 욕이 하고 싶으나 서약 때문에 차마 하지 못하는 얼굴로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내게 뭘 물을 게 있다는 거야! 내가 너와 불공평한 서약을 했다지만 가문에 해가 될지도 모를 일은 절대로 안 해! 디아카 가는 아까 레노어 샨 아페토 그놈이 죽은 일과는 조금도 관련 없어! 그러니까 뭘 물어도 나는 모르…….”

“흐음. 그래. 그러면 이번 일은 역시 카치안 황태자 단독 소행이란 거군. 묻기 전에 먼저 알려줘서 고맙다.”

“……그, 그걸 어떻게.”

질문하기도 전에 먼저 알아서 필요한 사항을 불다니, 역시나 멍청한 점은 여전했다. 유더의 감사인사를 들은 키올레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황태자 전하가 손을 쓰셨다는 걸 네놈이 알고 있다는 건…. 설마 펠레타 공작도……?”

“그건 네가 알 필요 없어. 그건 그렇고 오늘 디아카 가문에서는 너만 보냈나? 설마 그건 아닐 텐데.”

“설마라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유더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반문한 키올레가 이내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셋째 형님과 함께 왔다.”

유더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디아카 가의 자제는 훗날 디아카 가의 차기 공작이 되는 장자 키론느 다 디아카뿐이었다. 키올레의 존재도 예전엔 몰랐으니 그의 셋째 형님이라 해도 기억이 날 리 만무했다.

‘후계자를 보내지 않고 셋째와 키올레를 보냈다는 건…. 역시 디아카 쪽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는 말이 맞긴 한가 보군.’

카치안 황태자가 자신의 뒷배인 디아카 가 몰래 단독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건 꽤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적어도 이전 생에서 그는 황제가 될 때까지는 디아카 가의 말을 거스르거나 홀로 일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변화가 갑작스레 일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키시아르의 추측대로 축제 기간 내내 마병단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한 건이 영향을 미쳤나? 유더는 생각에 잠긴 채 키올레를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키올레에게 황태자가 손을 썼다고 알려준 이는 그의 셋째 형일 터였다. 레노어가 죽고 1층으로 모두가 향하던 짧고 혼란스러운 시간 동안 디아카 가와 카치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 할 듯했다.

“디아카는 이번 일과 관련이 없다고 했지.”

“그래!”

“그러면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나를 완전히 부하처럼…….”

“디아카 가와 상관없다면 말해도 되잖아. 이것만 말해 준다면 놓아주지.”

얼굴을 일그러뜨린 키올레가 한참 동안 숨을 씨근덕대며 유더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결국 이 관계에서 약자는 자신임을 자각한 듯 이를 악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노어 그놈이 막 죽었을 때는 우리도 상황을 알지 못했어. 1층에 내려온 뒤 셋째 형님이 황태자 전하의 시종에게 언질을 들었다고 하시더군. 그 일이 황태자 전하와 관련된 일이고 추후 아버님께 알아서 이야기가 갈 테니 오늘은 경거망동하지 말고 곧 돌아가라고 말이야.”

“…….”

“정말로 그것뿐이다. 이제 놔줘! 내 몸 위에서 내려가! 무거워 죽겠으니!”

목 위에 얹힌 유더의 손을 붙잡아 떼어낸 키올레가 숨을 헐떡대며 겨우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그때였다.

“거기, 누구냐!”

키올레의 목소리를 들은 듯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외쳤다.

‘이런.’

다른 곳으로 피할 시간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유더는 제 밑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키올레의 멱살을 다시 짓누르며 짐짓 태연한 모습을 가장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등불을 들고 달려온 병사 두 명이 동상 뒤쪽 바닥에 누워 있는 키올레와 그 위에 올라탄 유더를 보고는 아주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발버둥 쳐 준 키올레 덕분에 둘 다 예복 자락이 흐트러져 굳이 다른 상황을 가장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파티 도중 술과 분위기에 취해 정원이나 구석에서 아무렇게나 얽히는 귀족들은 어느 때에나 꼭 있는 법이다.

유더는 그들의 오해를 십분 활용해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듯한 키올레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입을 열었다.

“알 필요 없다. 귀하신 분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되니 썩 돌아가라.”

“아, 아. 네. 알겠습니다. 다만 이곳은 황궁이니…. 곧 돌아가 주십시오.”

병사들이 질린 표정으로 물러났다. 유더는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몸을 일으켜 바로 섰다. 옷자락을 대충 정리하는 동안 키올레가 얼이 반쯤 나간 채 붉으락푸르락 변한 얼굴로 겨우 벽을 짚고 일어났다.

“너, 이. 이…….”

“그러게 조용히 하라고 했을 텐데.”

“내 탓이란 거냐?”

“당연히 네 탓이지.”

어딜 아닌 척을. 유더의 서늘한 눈빛을 받은 키올레가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무튼 약속대로 들을 건 다 들었으니 나는 간다.”

“어딜 가?!”

유더는 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일단 먼저 지하 쪽으로 가볼 셈이었다. 그러나 빠르게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곧 걸음을 멈추었다. 등 뒤에서 따라오던 키올레가 흠칫 놀라 덩달아 멈추는 기척이 느껴졌다.

“따라오지 말고 돌아가라, 키올레 다 디아카.”

“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놈도 멋대로 나를 납치했으니 나도 네놈이 황궁 내에서 무슨 수상한 짓을 저지를 셈인지 봐야겠어!”

저 멍청한 놈은 하르탄에서 아페토 가 사람들을 상대로 저런 만용을 부리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벌써 잊었단 말인가?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충 집어던질 만한 작은 뭔가가 보이면 즉시 던져서 키올레를 기절시켜 버릴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낌새를 눈치챈 듯 동공이 떨리기 시작한 키올레를 향해 막 예복에서 떼어낸 단추 하나를 던지려 했을 때, 근처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기둥 뒤로 몸을 숨기자마자 시종 옷을 걸친 사내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 시키신 대로 잔을 옮긴 녀석을 처리했습니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군.”

“죽을 자리를 알아보았는지 얌전히 당하지 않겠다며 허세를 부리는 통에 확인 후 처리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멍청한 놈. 시키신 일에나 따를 것이지, 쓸데없이 불안해하고 욕심을 내니 이런 꼴을 당하는 거다.”

잔을 옮긴 녀석을 처리했다니. 끌려간 시종을 말하는 건가? 유더의 청각이 민감하게 곤두섰다.

“아페토 공자의 하인은 찾았나? 뭔가 아는 낌새는 없던가?”

“주인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자마자 거의 까무러쳤습니다. 공자는 약속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온 듯합니다.”

“잘 됐군. 좋아. 그러면 이제 너는 가서 전하께 보고를 드려라.”

“네.”

예상대로 그들은 카치안 황태자를 따르는 시종들이었다. 유더는 총 다섯의 시종 중 한 명이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숨을 가라앉혔다.

“자, 그러면 이제…. 아페토 공자의 시신은 어디 있지?”

“이쪽입니다. 따라오십시오.”

잔을 날랐던 시종을 이미 죽였다고 말했으니 유더가 찾아보려던 3가지 사항 중 하나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레노어 샨 아페토의 시신을 놈들이 먼저 뒤져 증거를 인멸하게 하지는 말아야 했다. 유더는 키올레를 기절시키려 떼어냈던 단추에 그대로 바람의 힘을 실어 시종들을 향해 힘차게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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