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51화 (151/805)

151화

“너무 때에 맞춰 일들이 벌어졌다 생각지 않나? 레노어 샨 아페토의 등장과 죽음 말이네,”

“때가 맞게 벌어진 일들이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런 생각은 밑으로 내려가셔서도 충분히 하실 수 있다 생각합니다.”

유더의 미묘하게 불퉁한 반응에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 위로 방금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기는 하군. 혹시 걱정했나?”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걱정시키려던 건 아니었네. 잠깐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이야. 자, 내려가지.”

웃음을 터트린 키시아르가 손을 뻗어 유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유더는 앞서 몸을 돌리는 아름다운 예복 자락을 뒤쫓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얌전히 뒤를 따라가려 했으나 그를 외면하고 사라져 가던 귀빈들을 생각하자 가슴 속에서 또다시 울컥 차가운 감정이 샘솟았다.

키시아르는 그간 충분히 능력을 보여주었다. 레노어가 죽은 뒤에 그가 보인 태도는 그 자리에 있던 가장 높은 황족으로서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사건이 일어났다면 일단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고 상황 파악을 한 뒤에 판단을 내리는 쪽이 훨씬 이성적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카치안 황태자의 허울 좋은 말 몇 마디에 모두가 손쉽게 키시아르를 외면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싸고 말을 걸던 이들이 순식간에 창피해하는 기색으로 몸을 돌리는 광경이라니. 아무리 무능력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쭉정이 공작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지만 지나치게 빠른 태도 변화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긴,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지.’

유더는 오늘 파티에 모인 얼굴들 속에서 이전 생에 익숙했던 이들도 많이 보았다. 지금은 그 시절보다 훨씬 젊고 고상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지만 눈빛들은 그때와 다를 바 없이 똑같았다. 제 욕심이 우선인 자들이 대다수였다.

지금의 그가 시간을 되돌리지 않은 유더 아일이었다면 높으신 분들끼리 무엇을 하든 저와는 상관없는 문제라고만 여겼으리라. 키시아르를 둘러싼 인식이나 소문이 얼마나 하찮고 우스꽝스럽든 실제로 본인이 그렇지 않다면 아무래도 좋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안다. 키시아르가 어느 날 갑자기 죽더라도 저 고귀한 이들은 아무도 슬퍼하거나 기억하지 않는다. 그가 홀로 바꾸고자 노력했던 모든 것들은 너무나 쉽게 잊혀지고 외면당할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11년의 세월을 돌아와 꽤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여겼으나 아직도 너무나 모자랐다. 혹시 무언가 잘못 선택한 것이 있었던가? 뭔가를 더 해야 했을까? 고심하는 가슴 속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괜찮네.”

그 순간, 마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입을 연 키시아르 때문에 유더의 마음속에서 치솟던 차가운 폭풍이 순간 힘을 잃고 무너졌다. 고개를 돌린 곳에서 키시아르가 조금도 조급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음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느리게 말을 이어나갔다.

“외면당하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거든.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는 순간이 반대로 모두를 살피기에 가장 좋은 때이기도 하지. 게다가… 이대로 얌전히 돌아가 줄 생각도 없고.”

“…….”

유더는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결국 소리를 내지 않고 도로 다물고 말았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 소용돌이쳤다.

저 사내의 가슴 속에 있는 끝 모를 단단함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가진 힘을 모두 드러내고 모든 이를 무릎 꿇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까.

제 앞길을 막아서는 이들을 향한 분노나 섭섭함을 느낀 적은 있었을까.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제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이전 생의 키시아르도 저런 사람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찌릿한 감각이 정신을 일깨웠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었던 사실을 자각하고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 안쪽에서 열이 올랐다.

불필요한 가정은 하지 말고 현재를 보자고 생각했음에도 제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오늘 예정했던 모든 일들이 거꾸러졌어도 키시아르의 단단한 벽에는 아직 아무런 흠집도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제가 초조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내 선택은 옳았어. 아직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고.’

유더는 키시아르의 한 발짝 뒤를 걸으며 문득 제가 막 다시 시간을 되돌려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그의 앞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또다시 마병단과 키시아르를 택했던 건, 어쩌면 오늘 이 순간 이러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찾아들었다.

“…이대로 돌아가시지 않으시겠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침착함을 되찾고 반문하자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답을 해 주었다.

“자네도 거의 짐작하지 않았겠나? 아페토 공자의 부자연스러운 죽음 뒤에 누가 있을지.”

“예.”

보나마나 카치안 황태자의 술수가 끼어 있으리라. 어쩌면 디아카 가도 손을 빌려주었을지 모르지. 유더는 짐짓 선량하고 우아한 얼굴로 나서던 황태자를 떠올리며 입술 끝에 힘을 주었다.

“축제 내내 우리를 뒤흔들어 보려던 시도가 실패했기에 오늘 일에 공을 들였겠지. 오늘 일로 상황을 전환하여 이후 이어질 재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싶었겠지만…….”

말을 잇던 키시아르가 잠시 끝을 흐리며 의뭉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너무 급했어. 그렇지 않나?”

그 순간 유더 또한 키시아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렇군요. 철저한 계획보다 감정이 앞서서야, 분명히 빈틈이 남겠죠.”

“수여식이 취소되었다 해도 곧바로 돌아가는 이는 드물 거라네. 황후 폐하도 한 시간 정도는 여기에 계시겠지. 나는 그분과 함께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예정이야. 물론 황태자 전하도 함께.”

이제 1층 홀로 들어가는 출입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유더는 그곳을 곁눈질하며 주변을 지키는 이들이 몇이나 되는지 확인하였다. 경황이 없는 상황이니 그리 공들이지 않아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듯했다.

“증거를 찾아보겠습니다.”

“무리하지는 말게. 어차피 이번이 아니라 해도 다음을 노리면 그뿐이니.”

키시아르는 그렇게 말했으나 유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하지만 겉으로는 얌전히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네.”

“이걸 칸나에게 가져다주게.”

1층 홀에 들어서기 직전, 키시아르는 한 손에 몰래 쥐고 있던 유리 파편을 유더에게 건네주었다.

“수습하던 도중 떨어진 독잔의 파편이네. 잘 하면 무언가 읽을 수 있겠지.”

“전달하겠습니다.”

들어선 1층 홀은 사람이 많아 어수선했다. 1층에 있던 이들은 2층의 높은 귀빈들이 갑자기 몰려들어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고, 2층에 있었던 이들은 끔찍한 사건을 입에 담으며 무어라 떠들어 대기에 바빴다. 유더는 그중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황족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키시아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칸나.”

“유더. 어디 있다가 이제 왔어?”

“단장님을 모시고 오느라. 그것보다, 이걸 먼저 받아.”

칸나는 정과 단원들과 함께 있었다. 조심스레 구석으로 불러내어 손수건에 싼 유리조각을 넘기자 그녀의 눈이 심각하게 반짝였다.

“이거… 설마 아까 그 독잔 조각이야?”

“응.”

키시아르가 그녀에게 조각을 읽도록 지시했다는 말에 칸나가 곧바로 양손을 모아 조각을 감추고 눈을 감았다. 힘을 주어 떨리는 손끝 안쪽에서 아지랑이처럼 기운이 일렁였다.

“으음…….”

“뭔가 알아낸 게 있어?”

“유더. 아까 이걸 날랐던 시종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었지?”

눈을 뜬 칸나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그랬지.”

“잔에 남은 마지막 기억은 조금 다르네. 그 시종이 직접 안에 독을 탔어.”

“직접?”

“그래. 그리고 이건 더 놀라운데, 그 사람의 목표는 처음부터 황태자가 아니라 죽은 레노어 샨 아페토 공자였나 봐.”

“아페토 2공자라니… 그가 독잔을 마실 줄 어떻게 알고 접근한 거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이 잔을 들고 간 사람에겐 ‘때’만 맞추면 반드시 그 사람이 이 잔을 들고 가 마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

때만 맞추면, 반드시.

그 말에 유더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죽기 직전에도 그자의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었지.’

레노어 샨 아페토는 키시아르와 마병단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노골적인 태도로 몸을 피해 휴게실로 가려 했다. 유더를 포함하여 몇 번이나 다른 이들과 부딪칠 뻔한 끝에 어디로 가는 잔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들이키던 그의 모습은 술에 취한 자처럼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당황했다지만 그리 비틀대며 나다닌 데 혹 다른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목이 타듯이 말라가게 만드는 독에 미리 당한 상태였을 수도 있지.’

유더는 이전 생에서 그런 독을 본 적이 있었다.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는 약한 독이지만 음료나 술에 탄 독을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유더가 아는 이 중 카치안 황제가 그 독을 가장 자주 즐겨 사용하였던 사람이었다.

‘확실히 지금이 11년 전이라 카치안도 서투르긴 서투르군.’

황제 시절의 카치안은 절대로 그런 독을 제가 있는 장소에서 직접적으로 사용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모든 일은 그가 없을 때 이루어져야만 했다. 첫 번째 재앙인 지진이 일어났을 때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황제에게 밉보인 이들이 목이 타는 독을 통해 두 번째 독을 마시고 참 많이도 몰래 죽어나갔었다.

‘그 독은 마시기보다는 피부로 몰래 흡입시켜야 하는 독인데… 레노어 샨 아페토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어디에 묻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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