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으, 아! 아아! 아!”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뱃속이, 목구멍이, 머리가 모조리 불에 지져져 녹아버리는 듯하였다.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닥을 긁으며 몸을 비틀었으나 그 끔찍한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사, 살려……!”
필사적으로 내저은 손이 누군가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나 살려달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 그 누군가는 매몰차게 옷을 빼내 버렸다.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레노어는 고통 속에서도 비참함과 수치심을 느끼며 허공을 휘저었다.
‘누구, 누구 없느냐. 내 하인을 불러 줘. 아니. 신관을, 신관을 불러. 누구라도 좋으니 어서 나를……!’
불행히도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눈과 코와 입에서 검은 피를 줄줄 흘리며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평화로웠던 델루마 궁 2층 전체에 울려 퍼졌다. 수많은 시선이 일시에 한곳으로 쏠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레노어 샨 아페토 공자가 쓰러졌습니다! 그 아페토의 2공자 말이에요!”
“맙소사, 설마 죽은 겁니까?”
아름다운 마정석들을 박아 넣은 바닥 위로 흘러나오는 검은 피를 본 심약한 몇몇 귀족이 그대로 혼절하여 휴게실로 실려 나갔다. 사건에 연관되고 싶지 않은 이들은 현장에서 앞다투어 빠져나갔다. 그중에는 가문의 이름을 대표하여 온 젊고 고귀한 귀족들도 다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이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레노어의 시체 주변에 몰려들었다. 시종들이 쩔쩔매며 사람을 물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바로 그때, 인파 사이로 껑충 고개를 내민 사내가 나타났다.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무슨 일인가.”
그가 나타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겨우 진정하고 길을 터주었다.
“전하. 레노어 샨 아페토 공자께서 방금 쓰러져 피를 토하신 뒤 숨을 거두셨습니다.”
가까이 다가와 상황을 살피던 시종 세 명 중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 키시아르에게 상황을 고했다. 반쯤 엎드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는 레노어를 흘긋 바라본 키시아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시체 주변을 나뒹굴고 있는 반쯤 깨진 술잔 앞이었다. 잔에서 흘러나온 액체 위로 시선이 느릿하게 내리꽂혔다.
“독인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 모금 마시자마자 쓰러지신 것만은 확실합니다.”
“레노어 샨 아페토는 오늘 이곳에 참석할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부분은 아직 확인 중입니다만, 아무래도 공자님께서는 공작가에서 홀로 오신 듯합니다.”
혼자 왔다면 아페토 공작의 명을 어기고 왔을 확률이 높았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좋다. 그러면 이 잔을 준 자는 누구지?”
“그자는 여기 있습니다.”
레노어가 쓰러지자마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 곧장 다른 시종들에게 붙잡혀 무릎이 꿇려진 시종이 키시아르의 앞으로 끌려왔다. 그의 표정은 숨길 수 없는 당혹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전, 전하.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는 것이 먼저다. 왜 갑자기 아페토의 공자가 네 술을 마시고 절명한 것인가?”
“저는 그저 술잔들을 가져다 놓으라는 명을 받고 이동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저분께서 달려와 부딪칠 뻔하셨기에 혹 다치셨다면 조치를 취하겠노라 말씀드렸는데….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며 술잔 하나를 가져가 마시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레노어의 시체를 향해 시선을 돌린 시종이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저는 저분이 누구이신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맹세코 몰랐습니다.”
“…….”
시종의 말을 들은 키시아르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이 뜻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레노어와 시종을 번갈아 바라본 그가 잠시 후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본디 옮기던 다른 술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시종이 옮기고 있던 다른 술잔들은 근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키시아르는 그것들을 제 앞에 가져오게 한 뒤에 차를 젓는 스푼을 손수 집어 들어 잔에 담갔다. 흔히 쓰이는 몇 가지 독을 감지해내는 축복의 문구가 새겨진 은빛 스푼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자 주변에서 공포에 질린 숨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정말 독이라니!”
“암살자인가?”
떠들어 대는 사람들 속에서 키시아르가 낯빛이 하얗게 질린 시종을 향해 다가갔다.
“저 술잔을 누가 주었는지, 어디로 가져가고 있었는지 말하게.”
“아까부터 계속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쟁반을 계속 나르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주었었는지가 확실히 기억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 술잔을 가져다 놓으라 전해 들은 곳은.”
시종이 차마 제 입으로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바닥에 엎드렸다. 키시아르는 그가 간신히 작은 소리로 대답할 때까지 다그치지 않고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화, 황태자 전하의 테이블이었습니다.”
세상에, 황태자라니. 대체 누가. 불안감에 찬 수군거림이 한껏 커진 순간 멀리서 출입구를 지키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공교로운 순간에 나타난 두 사람을 보며 모여 있던 이의 일부는 이번 년도에도 결국 케일루사 황제가 불참했다는 사실에 제각기 실망하거나 기뻐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약속이나 한 듯 카치안 황태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어도 독이 든 잔을 받았을 뻔한 소년 황태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는 들어서자마자 시종에게서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안색이 극도로 창백해졌지만 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인사를 하려는 모든 이들을 손을 들어 제지한 뒤 곧장 키시아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들은 말이 사실입니까? 암살 시도라니요.”
“현재 확인된 사항은 독이 든 잔 3개를 누군가 시종을 시켜 교묘하게 황태자 전하의 테이블 위에 놓으려 했다는 것뿐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의 답이 끝나자마자 뼈가 든 반문을 던진 이는 황태자였다. 그는 누군가 제지하기도 전 키시아르가 있는 곳까지 가까이 다가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멈춘 곳은 레노어의 시체 쪽이었다. 문득 소년의 눈동자 위로 잔혹한 미소가 스쳤지만 그 웃음은 누군가 알아채기도 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기억나게 해 주어야겠지만, 당장 여기서 심문을 하기보다는 일단 기사들을 시켜 구금하고 저 가엾은 공자를 어서 수습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는 게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죽었는데 어찌 구경거리처럼 놓아만 두십니까. 일단 수습부터 하신 뒤 범인을 쫓아도 늦지 않다 생각합니다.”
높은 확률로 자신을 노린 암살 시도임을 알았을 텐데도 소년 황태자는 침착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현명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주변의 술렁임이 높아졌다.
“황가의 피를 제대로 잇지 않은 양자라기에 어떨까 싶었었는데…. 대단하신 분이군. 저 나이에 저런 침착함이라니.”
“제대로 된 알맹이가 없는 쪽과는 역시 다르다 이건가.”
노골적인 비유를 중얼거린 대담한 외국 사절이 사방에서 꽂히는 마병단원들의 차가운 시선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마병단원의 수가 많다 한들, 분위기는 이미 바뀐 지 오래였다.
많은 이들이 마치 꿈에서 깨어난 마냥 키시아르의 겉모습만 보고 압도된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며 머쓱해했다. 겉모습만은 완벽한 신의 현신처럼 아름답지만 키시아르 라 오르는 쭉정이 한량 공작이었다. 왜 그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카치안 황태자는 어깨에 힘을 쭉 펴고 앞으로 나서서 시종들을 시켜 레노어의 시체를 수습하고, 붙잡힌 시종을 구금하라 명하였다. 황태자를 따라온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명령을 따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혼란도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황후 또한 안정을 되찾고 황제를 대신하여 이곳에 온 제국의 주인으로서 명을 내렸다.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이상 이대로 오늘의 일정을 이곳에서 지속하기는 힘들 듯하군. 수여식은 추후 다시 열 테니, 오늘은 모두 돌아가도록 하시오. 참석해 준 이들이 원한다면 1층에서 조금 더 쉬는 건 허락하겠지만…….”
“말도 안 돼…. 이렇게 갑자기 전부 끝나는 건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1층으로 일단 가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하는 것 아니겠어?”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유더는 주변에서 들려온 어느 마병단원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몹시 밝았던 단원들의 표정이 모두 어두웠다.
그는 단원들의 면면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1층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인파를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나아갔다. 그 끝에는 대충 수습된 레노어의 시체가 시종들의 손에 들려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키시아르가 홀로 서 있었다. 전신에 반짝이는 보석과 아름다운 예복을 두르고 있음에도, 어쩐지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외롭게 느껴졌다.
“단장님.”
“음? 1층으로 아직 안 내려가고 여기로 왔나?”
홀로 거목처럼 서 있던 키시아르의 목소리는 방금 전 느낀 감상적인 마음이 순식간에 싹 사라질 만큼 밝고 쾌활했다. 유더는 순간 맥이 빠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장님이야말로 안 내려가시고 왜 계속 여기에 계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물론 괜찮고말고. 다친 것도, 죽은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러면 왜…….”
“아무래도 이상해서 말이야.”
키시아르가 목소리를 낮추어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