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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49화 (149/805)
  • 잠시 후 마차가 멈추었다. 2벽 내부에서 가장 큰 건물인 델루마 궁 앞은 쉴 새 없이 도착하고 떠나는 마차들로 산을 이루었다. 한 해 동안 수고한 모든 이들을 불러 모아 축하와 상을 내린다는 취지로 열리는 특별 수여식 파티에는 아무리 적어도 늘 500명 이상이 참여했지만, 올해는 마병단 전체가 초청받으면서 더욱 인산인해를 이루었다.149화

    레노어는 일부러 사람들에 눈에 띄지 않도록 구식 예복을 걸치고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궁 안으로 들어섰다. 워낙 사람이 많아 아무도 제 주변을 스치는 사람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참석자를 정신없이 확인하던 열 명의 시종 중 한 사람에게 다가가 이름을 말하고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건네자 그가 흠칫 어깨를 굳히고는 고개를 들어 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패를 돌려주고는 안쪽을 향해 공손히 손을 내밀어 인사를 했다.

    “들어가십시오.”

    델루마 궁에서 열리는 파티는 참석자의 신분과 중요도에 따라 입장할 수 있는 장소가 제한되었다.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이들은 1층에만 머물렀지만 ‘정말로’ 중요한 이들은 곧장 2층으로 입장할 자격이 주어졌다. 힘 있는 귀족들과 이름난 기사, 마법사, 그리고 이번 추수철 축제를 맞이하여 제국에 방문한 타국 사절들 등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레노어는 곧장 2층으로 들어섰다. 사람은 아주 많았으나 거대한 홀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가져다 둔 몇 개의 의자는 모두 주인 없이 텅 빈 상태였다. 그것은 황제와 황후, 황태자와 펠레타 공작 등의 황족들을 위하여 마련된 자리였다.

    그러나 황제는 몇 년간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줄곧 황후에게 대행을 맡긴 채 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참석한 이들은 올해도 당연히 그러려니 여겼다.

    ‘황태자도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군.’

    그는 주변을 몰래 두리번대며 참석한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아페토 가에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도 델루마 홀 2층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하기만 했다. 아직 마병단이 들어오지 않은 탓에 가장 큰 무리라 해 보아야 외국 사절 중 가장 유명인사인 넬라른 왕국의 2왕자 주변에 몰려든 이들이 전부였다.

    레노어는 우아한 미소를 나누며 떠드는 이들을 보며 기묘한 분노와 억울함을 느꼈다. 주먹을 꽉 쥐어도 그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설마 했는데 정말 레노어 공자셨군요.”

    그때, 누군가 레노어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흠칫 놀라 뒤돌아본 레노어는 안면이 있던 몇몇 젊은 귀족들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그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여기저기서 시선이 쏠렸다.

    “어떻게 오신 겁니까? 아페토 가는 이번에 참석하지 않으신다고 들었는데요. 혹 공작님께서 뜻을 거두신 겁니까?”

    “그, 렇다 할 수 있겠군요.”

    밥 먹듯 해 온 거짓말임에도 제 인생의 방향키가 바뀌는 순간을 앞둔 덕분인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역시. 펠레타 공작이 준비 중이라던 재판 따위에 아페토가 꿈쩍할 리 없다고 저는 믿었습니다. 공자께서 오셨으니 제 생각이 맞았다 자랑할 수 있겠군요.”

    웃으며 말을 거는 어느 귀족의 말에 레노어의 심장이 순간 크게 뛰었다.

    그도 황태자의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저 귀족과 같은 생각을 했었더랬다. 마병단 따위가 아무리 아페토를 흔들려 한다 해도 소용없다고, 모든 책임은 미쳐버린 벨트레일이 졌으니 아버지가 분노를 좀 가라앉히면 자신은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만 여겼었다.

    하지만 카치안 황태자는 그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고 냉혹한 현실을 알려주었다. 에이셰스가 작정하고 마병단 측에 레노어의 허물과 관련한 정보를 넘겼다면 공작의 눈 밖에 나 수족을 잃은 상태인 그는 대응할 수 없다.

    귀족들이 떠들어 대는 말과 흥미 섞인 눈빛을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넘기면서, 레노어는 카치안 황태자와의 만남을 수락한 제 선택이 역시 최선이었다 느꼈다.

    ‘그래. 훗날을 위해 지금의 이런 상황 정도는 참아 넘겨야겠지.’

    “왜 출입구를 품위 없이 떼로 몰려들어 가로막고 있는 겁니까? 적당히 좀 비켜 주시죠.”

    그때, 막 안으로 들어선 누군가가 레노어를 둘러싼 귀족들을 향해 날카롭게 불만을 터트렸다. 품위가 없다는 직설적인 모욕에 화가 난 이들이 고개를 돌렸으나, 그의 얼굴을 보고는 이내 찔끔하여 제각기 흩어져 갔다. 레노어는 물러서는 무리를 뚫고 걸어 나오는 이를 보고 그들이 왜 흩어졌는지 곧바로 이해했다.

    ‘키올레 다 디아카.’

    안하무인으로 유명한 그를 좋아하는 이는 그리 없었다. 하지만 키올레의 뒤에 있는 가문의 이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레노어는 그가 혹 저를 향해 무어라 말할까 싶어 턱을 당기고 힘을 주었으나, 키올레는 의외로 시선만 한 번 흘긋 주고는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레노어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듯한 태도였다.

    ‘저 건방진 자식.’

    레노어는 이를 갈며 키올레를 노려보았다.

    ‘내가 오늘 왜 왔는지 알고 있으니 저따위로 무시하는 거겠지. 오냐. 오늘은 디아카 공작의 후광이 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훗날엔 아닐 거다.’

    “마병단이 모두 내렸다고 하는군. 곧 올라오겠어.”

    “어디, 펠레타 공작이 얼마나 콧대 높은 모습으로 들어오는지 볼까.”

    그로부터 얼마 후 또다시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고개를 돌린 레노어는 순간 거대한 금빛 출입구 문 바깥에서부터 안을 향해 불어오는 낯선 바람을 느끼고 당혹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느긋하게 정체되어 있던 홀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그 바람을 타고 뒤바뀌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모든 이들이 같은 곳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모두를 사로잡은 서늘한 바람을 두르고서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선 장신의 사내는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을 수 없을 만큼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펠레타 공작이다.”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야.”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의 등장에 넋이 나간 이들이 파도처럼 술렁였다. 어떤 이들은 방금까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샹들리에 불빛이 마치 그를 향해서만 비춰지는 듯하다 느꼈다. 키시아르를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이든, 그렇지 않은 이든 그 짧은 순간 그에게 압도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키시아르의 뒤를 이어 4열로 줄을 선 이들이 차례차례 들어서자 홀 내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뒤바뀌었다.

    “저들이 바로 그 마병단이군. 기세가 대단해.”

    “평민 출신이 대다수라 들었는데, 겉보기에는 여느 전통 있는 기사단 같지 않은가!”

    어떤 이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마병단의 품위와 절도 있는 모습에 감탄했다.

    “이번 축제 내내 한 번도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게 전부 그들 덕분이라면서?”

    “고국으로 돌아가면 우리나라에도 저런 이들을 모아 일을 맡겨 보자 건의해 볼 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축제 내내 이름을 떨쳤던 마병단의 무용담과 그들로 인해 뒤바뀔 미래를 이야기했다. 마치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모습에 레노어는 현기증을 느꼈다.

    ‘저자들이 내게, 아페토에게 무슨 짓을 했는데 어째서 아무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거야!’

    레노어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레블린을 등 뒤에 숨긴 채 아페토 공작과 레노어 자신을 상대로 혓바닥을 거침없이 놀려 대던 키시아르의 모습이 공포에 가깝게 남아 있었다. 화려한 예복을 걸친 채 무엇이 그리 기쁜지 실실 웃고 있는 펠레타 공작의 낯짝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속이 좋지 않았다.

    ‘젠장할. 카치안 황태자는 어째서 아직도 오지 않은 거지? 나와의 약속을 기억하고는 있는 건가?’

    레노어는 파티장 곳곳으로 흩어지는 마병단원들의 흰 예복을 보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그들 중 분명 키시아르와 함께 아페토 가에 와서 제 얼굴을 보았던 단원들도 있을 텐데, 그리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홀 구석으로 향했다. 심장이 불쾌할 정도로 빠르게 뛰어대는 중이라 아무래도 휴게실에 좀 들어가 있다가 나오는 쪽이 나을 듯도 했다.

    작게 숨을 헐떡이며 걷던 레노어는 또다시 누군가와 부딪쳤다.

    “앗.”

    그가 아는 귀빈이라면 사과하려 했으나 상대는 처음 보는 귀족 여인이었다. 레노어는 그녀를 무시하고 그대로 걸어가려 했으나, 옷자락을 밟고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한 그녀를 뒤에서 받쳐 준 또 다른 이가 제 손을 잡아채 그럴 수 없었다.

    “실례지만 사과를 먼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선을 돌린 레노어는 그 무례하고 건방진 이가 하필 기억에 있는 마병단원이라는 사실에 목 안쪽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저자는 분명…….’

    불길한 어둠을 담은 듯한 머리칼과 눈동자. 인간다운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섬뜩한 저 얼굴! 틀림없었다.

    ‘그날 벨트레일 숙부를 짐처럼 끌어다 우리 앞에 내팽개쳤던 자가 아닌가!’

    “놔, 놔라.”

    레노어는 순간적으로 이성이 마비된 채 품위조차 잊고 팔을 마구 흔들어 남자의 손을 떨쳐냈다. 그리고는 곧장 몸을 돌려 뛰듯이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다 또다시 누군가와 부딪칠 뻔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 상대는 황금빛 술잔 몇 개를 쟁반에 받쳐 든 시종이었다. 레노어는 비로소 제대로 화를 낼 상대를 찾았다 느끼며 그간의 분노를 모두 담아 목소리를 높였다.

    “멍청하기는. 눈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게냐!”

    “죄송합니다. 혹 몸이 불편하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곧바로 조치를…….”

    “드… 됐, 어!”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목이 바짝 말라 소리가 갈라졌다. 레노어는 그제야 제 안의 격렬한 갈증을 자각하고는 숨을 헐떡이며 시종이 든 술잔을 향해 거칠게 손을 뻗었다.

    “이거나 한 잔 내놓아라.”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그 술은…….”

    “시끄럽다. 새로 한 잔 더 받아오면 되지 않느냐!”

    시종이 만류하기도 전 다급히 들이킨 술이 식도를 타고 화하게 내려갔다. 레노어는 잠시 시원해진 목을 쓰다듬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러나 편안함도 잠시, 다음 순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고통이 뱃속에서 목 끝까지 일직선으로 치솟았다.

    “커…억?”

    숨을 삼킴과 동시에 들고 있던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들으며 레노어는 목을 감싸 쥐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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