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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48화 (148/805)

148화

마병단이 탄 마차가 줄지어 황궁을 향해 달리고 있던 그 시각, 고요하게 닫혀 있던 아페토 공작가에서도 마차 한 대가 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2공자님, 정말 이대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공작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시끄러워. 언제부터 내 말에 그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반대했지? 네놈도 내가 후계자 자리에서 영영 멀어졌다 여기는 게로구나. 여기서 죽고 싶으냐?”

마차 안에 탄 이는 2공자 레노어 샨 아페토와 그의 하인이었다. 레노어는 며칠 전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아페토 공작의 명으로 자숙이라는 이름의 감금 중이었으나, 작정하고 저택을 빠져나가는 그를 하인들은 감히 막지 못했다. 그가 그간 저질러 온 지독한 폭력의 기억이 아직도 저택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레노어를 두려워하는 건 그를 모시기 위해 강제로 따라온 하인도 마찬가지였다. 레노어가 자숙 명령을 어기고 저택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될 아페토 공작의 뒷감당이 두려워 겨우 용기를 내 말을 해 보았으나 레노어의 불호령 앞에서 그 마음은 순식간에 모조리 소진되었다.

“제,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겠습니까요 공자님. 아둔한 놈이 그만 공자님을 걱정하는 마음에 실언을 했습니다!”

하인이 황급히 마차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찧으며 사죄했지만 레노어는 분을 참지 못하고 그의 몸을 구둣발로 걷어찼다.

“억!”

“멍청한 놈. 너 말고 다른 놈을 데려왔어야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아무나 골랐더니 네까짓 놈이 감히 나를 욕보여?”

“사, 살려 주십시오 공자님. 제발…! 잘못했습니다……. 자비를…….”

레노어는 구두 앞코가 붉게 물들 때까지 하인을 걷어찬 뒤에야 겨우 분기를 조금 가라앉혔다.

“내가 널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는 게 자비인 줄 알아라. 더러운 피가 묻었으니 당장 깨끗하게 닦아.”

“예, 예에. 감사합니다…….”

하인이 흐느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피가 난 이마를 감싸지도 못한 채 익숙한 태도로 레노어의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그 굼뜬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번 더 매질을 할까 싶었으나 그랬다가 하인이 나자빠져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황궁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레노어를 막았다. 레노어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뒤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생각을 떠올렸다.

‘편지. 편지를 떠올리자. 나는 지금 다시 얻은 기회를 향해 가고 있는 거야. 그러니 시작부터 흥분하여 일을 그르쳐서는 안 돼.’

그 생각은 효과가 있었다. 레노어는 팔짱 낀 안쪽 손을 움직여 예복 안주머니에 숨겨 둔 작은 편지의 윤곽을 매만졌다. 그 편지가 바로 레노어를 갑작스럽게 아페토 공작의 명을 어기고 저택 밖으로 빠져나오게 만든 원인이었다.

이틀 전, 레노어는 감금되어 있던 방 안에서 작은 쪽지를 받았다. 하녀가 가져온 간식 쟁반 안에 교묘하게 숨겨진 쪽지 속에는 뜻밖에 상상조차 못 했던 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카치안 라 오르 황태자가…… 나를?’

편지에 적힌 필체는 우아했고, 내용은 간결했다. 그는 레노어에게 자신이 기회를 다시 줄 수 있다고 말했다.

- …에이셰스 샨 아페토가 마병단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나는 즉시 당신에게 손을 내밀기로 마음먹었소. 그것이 전부요. 선택은 당신의 몫이지. 답신을 보낼 마음이 생겼다면 같은 방식으로 보내시오.

레노어가 아페토 공작의 눈 밖에 난 일로 지금 가장 행복해하고 있을 에이셰스가 마병단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에이셰스가 레노어를 다시 기어 올라올 단 하나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거꾸러뜨리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는 뜻이었다.

레노어는 제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데 치를 떨었고, 그다음에는 불안에 가득 차 방안을 빙빙 돌았다. 이전의 그는 아페토 가의 비밀 정보원들 중 상당수를 손에 쥐고 마음대로 굴렸으나 이제는 황태자의 편지로 겨우 바깥 정세를 조금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스스로 가졌다 여겼던 모든 힘이 사실 아페토 공작의 것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끼자 난생 처음 혼란과 공포가 찾아들었다.

‘아버지는 정말 날 이대로 내치시려는 건가? 유일하게 멀쩡한 자식인 날?’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편지를 본 이후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아페토 공작의 성정을 가장 닮은 자식이었기에 공작의 비정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는 제 얼굴에 먹칠을 한 이들을 아무런 이득 없이 용서할 자가 아니었다.

‘그래. 어차피 날 믿을 생각이 없는 아버지에게 끝까지 복종하다 비참하게 쫓겨나느니 차라리 제3의 길을 찾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아페토라는 거대한 가문은 그 자체로 거대한 철옹성과 같다. 그 성의 수장이 누가 되든, 그 과정에서 몇이 죽어나가든 가문은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부모와 자식이 권력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의심하며 죽고 죽인 일이 공작가의 오랜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났었는지를 되새겨 본 뒤 레노어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황태자의 편지 뒷면에 답신을 썼다.

‘어차피 이 편지의 뒤에 있는 실질적 주인은 디아카 공작이라 봐야겠지. 이 일로 디아카 쪽에 약점을 잡힌다면 상당히 구역질 나겠지만… 내가 아페토 공작만 될 수 있다면 그만이야. 전부 덮을 수 있다.’

카치안 황태자를 황태자 자리에 올린 이후 훗날의 실질적 황가가 될 디아카 공작가에서 다른 가문들에게 내보인 은근한 우월감은 은연중 상당한 반감을 샀다. 레노어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사는 쪽이 우선이었다.

카치안 황태자의 두 번째 편지는 바로 다음날 아침 도착했다. 이전처럼 식사가 담긴 쟁반 안에 숨겨져 있던 편지에는 레노어의 협력을 기껍게 받아들이겠다는 뜻과 함께 추신이 적혀 있었다.

- 내가 당신을 떠오르는 태양처럼 분명히 믿을 수 있도록, 편지는 도로 돌려보내고 다음 답신은 직접 건네주시오.

빌어먹을 디아카 놈들. 레노어는 황태자의 편지 뒤에서 웃고 있을 디아카 공작을 욕하며 편지를 구겼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분명한 믿음을 달라는 말은 유명한 연극 구절 중 하나로, 큰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믿음을 주어야 할 때 비유처럼 쓰이는 문구였다.

현재 레노어가 답신을 황태자에게 직접 건네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참석해야 했을 수확철 축제 마지막 날의 파티에 참석해야만 했다.

‘자숙을 스스로 깨고 거기로 가게 되면 나는 두 번 다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알고 있으니 요구한 거겠지.’

돌아갈 길이 없으면 중간에 발을 뺄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황태자와 디아카 가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른 사람을 찾아내 같은 제안을 할 터였다.

‘이를테면… 레블린 같은 녀석에게 제안하겠지. 눈앞의 꿀에 눈이 먼 그 멍청한 녀석은 이런 제안이 어떤 기회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겠지만!’

벨트레일이 미쳐 버리고 레노어가 추락했던 그날, 모두의 혼란을 뒤로 하고 기쁜 얼굴로 펠레타 공작을 따라 집을 떠난 동생을 떠올리자 이가 저절로 갈렸다. 레노어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으리라 지레짐작하고는 분노에 휩싸여 곧장 답신을 썼다.

그리고는 날이 밝자마자 저택을 빠져나와 지금에 이르렀다.

“곧 도착하겠습니다. 검문대가 보이니 준비하십시오, 공자님.”

레노어는 마부가 조심스레 건네는 말을 들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잔뜩 굳어 있던 하인이 시퍼런 안광을 마주하고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으나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두 개의 편지봉투를 꺼냈다. 하나는 제대로 황태자에게 쓴 답신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두 번째로 받았던 황태자의 편지 원본이었다.

‘아무리 내가 궁지에 몰려 여기까지 왔다지만, 상대를 아주 믿을 순 없으니까.’

혹시나 황태자와 디아카 공작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레노어는 편지 원본을 제가 가지고 쟁반에는 필적을 따라 베낀 가짜를 돌려보냈다. 설마 돌려받은 편지까지 그쪽에서 공들여 검수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고, 설령 들키더라도 황태자와의 만남 이후 변명하면 그만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황태자의 편지 원본 뒤쪽에 간략하게 그간 제게 일어난 일들을 적은 뒤 서명을 남겨두었다. 만약 오늘 그가 황태자와의 만남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면 이 두 번째 편지는 영원히 세상에 나갈 일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너. 내가 황궁에 있는 동안 이걸 가지고 있거라.”

“네? 네! 알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레노어는 두 번째 편지를 하인에게 건넸다. 하인은 레노어가 준 편지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공손히 받아들었다.

“품에 넣어두고 하인들이 대기하는 곳에 있다가 내가 돌아오면 돌려주고, 혹 직접 받으러 올 수 없을 듯하다고 전하거든… 흠. 그래. 레블린에게 그 편지를 보내거라.”

레블린의 이름을 입에 담은 건 순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비록 이번에 기껍지 않은 사이가 되기는 했다지만 그래도 아페토 가에서 가장 의심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만만한 상대는 레블린뿐이었다.

“마… 마병단으로 가셨다는 레블린 공자님 말입니까? 괜찮으신 겁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레노어의 으름장에 하인이 곧장 머리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빌었다.

‘저 모자란 놈이 편지를 안 잃어버리면 다행이겠군.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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