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유더는 흠칫하여 겨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키시아르가 그의 이상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었다.
“너무… 과분합니다.”
“과분하지 않네. 그동안 그토록 많은 일을 했으니,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이 정도 상은 충분히 받을 수 있어. 아니면 내 것과 바꾸겠나?”
“그건 더 비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키시아르가 손을 들어 장갑을 벗으려 들었기에 유더는 재빨리 그를 만류했다.
“알겠습니다. 단장님께서 내려주신 것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유더는 검은 장갑을 벗고 그가 보는 앞에서 흰 장갑을 꼈다. 예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장갑을 모두 끼자 복잡한 심경이 가슴속에서 잠시 치밀다가는 이내 가라앉았다.
“준비를 모두 마치셨군요.”
그때, 마침 나단 주커만이 단장실로 들어서며 말을 건넸다. 그는 평소와 달리 펠레타 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키시아르의 화려한 모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가온 남국인 사내는 옆에 서 있던 유더를 보고 잠시 시선을 멈춘 채 눈을 깜박였다.
“예복이 잘 어울리시는군요, 아일 경.”
“……칭찬 감사합니다, 주커만 경.”
“좀 기쁘게 받아들이게. 나단은 아무에게나 저런 칭찬을 하지 않는다고.”
자신감 넘치는 키시아르의 미소에 유더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나단 주커만 또한 주군의 농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제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공작님께서 호출하신 펠레타 기사단 30인 모두 도착하여 현재 배치 완료한 상태임을 보고하러 왔습니다. 자리를 비우신 직후부터 돌아오실 때까지 이 건물 전체와 황궁기사단 부지 곳곳을 방어할 예정입니다.”
“좋네. 타이스 율만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사 타이스 율만에 대해 물었다. 유더가 한 보고와 타이스가 보낸 종이뭉치를 받은 그는 고집 센 노마법사가 원하는 대로 이곳에 남아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스승 없이 홀로 파티에 끌려가게 생긴 그의 제자 알릭 펠긴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으나 그를 위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께서는 지하실에 홀로 계신 것을 확인하고 올라온 참입니다. 그분 이외의 다른 사람이 지하실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기에, 기사 1인을 입구 근처에 배치했습니다.”
“어제 그의 제자가 주변을 돌아다닌다는 보고가 들어오던데 그건 무엇 때문이라 말하던가?”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만……. 아마 이 건물을 지키기 위해 함정이나 방어진을 설치한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둘 모두일 겁니다.”
유더는 드디어 제가 나설 틈을 찾았다. 사실 키시아르에게 본래 하려던 말도 그 부분에 대한 것이었으나 여태 말하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제 알릭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율만 님께서 지하실과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지시하셨다고 하더군요.”
“어지간히 파티에 가기 싫었던 모양이군. 덕분에 든든해졌으니 다행이야.”
짧게 끄덕이며 그렇게 평가를 내린 뒤 키시아르가 유더와 나단을 돌아보았다.
“나는 오늘 황궁에 머무르게 될 가능성이 크네. 어젯밤 폐하께서 갑작스럽게 가족끼리 모여 식사라도 하는 건 어떻겠냐는 편지를 보내셨거든. 아마 황후 폐하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신 거겠지.”
“그러면 마병단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자네와 몇 사람 정도는 내 곁에 남고, 나머지 인원은 파티가 끝나는 대로 돌아가도록 조치하게. 그때까지는 나단. 네가 이곳을 지켜야 한다.”
“맡겨 주신 바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검 손잡이를 가볍게 쥐고 머리를 숙인 나단을 보며 키시아르의 눈 속에 잘 벼린 칼날처럼 예리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을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마병단에게 최고의 하루가 되도록 만들어 보자고. 자, 그러면 가 볼까.”
키시아르가 망토 자락을 날리며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로 유더와 나단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뒤를 따랐다. 그들이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곳곳에 모여 있던 마병단원들과 펠레타의 기사들이 일제히 휘둥그렇게 눈을 뜨고는 벅차오른 기색이 역력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오랜만에 건강하신 모습을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주군.”
“나도 반갑군, 티커. 오늘 임무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키시아르는 인사를 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들어 마주 인사를 돌려주거나, 때로는 가벼운 말을 던지기도 하며 밑으로 계속해서 내려갔다. 1층까지 내려가자 마병단 숙소 앞에 줄줄이 줄지어 서 있는 마차들이 보였다. 수없이 모여든 마차의 물결이 자아낸 장관에 몰려든 단원들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대단하다. 이게 전부 우리가 타고 갈 마차들이라니…….”
“단장님! 오셨군요.”
단원들을 차례차례 태우며 인원수를 점검하고 있던 부단장들이 키시아르의 도착을 알아채고는 서둘러 달려왔다.
머리칼을 위로 넘겨 평소의 푸근한 인상을 누그러뜨린 스티버와 긴 머리를 땋아 틀어 올린 에버, 단발을 귀 뒤로 넘겨 핀을 꽂은 칸나의 모습을 보며 유더는 보석이 없이도 충분히 아름답도록 예복을 만들었다던 키시아르의 말을 이해했다.
그들 또한 키시아르의 예복 차림을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 옆에 서 있던 유더를 보고는 눈을 더욱 동그랗게 떴다.
“와, 단장님께서 예복을 입으시니 정말… 빛이 현신하신 듯합니다.”
“하하. 스티버. 칭찬이 대단하군. 고맙네.”
“유더. 네 옷은 우리와 색이 좀 다르네. 잘 어울려!”
스티버의 뒤에서 칸나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너도.”
짤막한 대답이었으나 칸나는 섭섭해하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엄지손가락을 슬쩍 들었다가 내리는 그녀를 보며 유더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 지금은 어느 정도 탑승한 상태인가?”
키시아르의 질문에 스티버가 대표로 나서서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현재… 어, 대충 반 정도 탄 상태입니다. 단장님께서 타고 가실 마차는 제일 앞에 있으니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수고가 많네.”
“이 정도는 행사 치안 협력 일에 비하면 전혀 힘든 일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에버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경례를 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뒤를 따라 마차 행렬의 맨 앞으로 향했다. 황실의 문장을 문에 새기고 위로 펠레타 공작의 문장이 그려진 천을 붙여 늘어뜨린 아름다운 마차 앞에는 마부와 함께 알릭 펠긴이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 전하. 함께 황궁으로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흠잡을 곳 없는 인사였으나 유더는 젊은 마법사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울적함과 짙은 피로를 보았다. 타이스 율만 없이 홀로, 그것도 어렵기 짝이 없는 키시아르와 함께 갈 생각을 하니 몹시 절망스러운 모양이었다.
“뭘. 마병단에 방문해 주신 귀한 손님과 함께하는 건 단장으로서 당연한 일인 것을. 가는 동안 연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군.”
“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알릭 펠긴의 옆에 서 있던 마부가 공손히 절을 한 뒤 문을 열었다. 키시아르가 마차에 타기 전, 나단 주커만이 경례를 하고는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일정이 갑작스레 바뀌셨으니 부디 더욱 몸을 조심하십시오.”
“가족끼리의 식사와 하룻밤을 그리 경계할 필요야 있겠나.”
“주기가 얼마 남지 않으셨다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랬지.”
간결하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충직한 부관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설령 문제가 생긴다 해도, 이제 다치는 쪽은 내가 아니다. 그러니 지나친 걱정은 묻어 둬, 나단.”
나단 주커만은 작은 한숨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모두가 올라탄 뒤 마차의 문이 닫히자 알릭 펠긴은 화장실에라도 가고 싶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부디 키시아르가 그에게 정말로 말을 걸어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나 그런 행운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단원들이 마차에 탑승했는지, 마부가 작은 창을 열어 출발하겠다는 말을 건네 왔다. 마차가 차례차례 움직이면서 말발굽 소리와 몸 아래 덜컹이는 진동이 느껴졌다.
“자. 도착하려면 시간이 꽤 남았으니 이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유더의 옆에 앉은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알릭을 향해 말을 걸었다.
“내가 그동안 바빠서 직접 지하실로 내려가지 못하여 궁금한 부분이 무척 많다네. 이야기로만 들어 온 진주탑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듣고 싶군.”
“아… 아, 예.”
“왜 그렇게 땀을 흘리나? 손수건이 필요하다면 줄 테니 말하게.”
“아, 아닙니다. 제게도 있습니다…….”
그간 마병단 내부를 돌아다니며 스승의 눈과 귀 노릇을 대신해 온 알릭의 눈에 비친 키시아르 라 오르는 이제 더 이상 모자라고 방탕하다 일컬어졌던 쭉정이 공작이 아니었다.
그는 타이스 율만의 말마따나 기회를 노리며 몸을 웅크리고 발톱을 숨겨왔던 영리한 맹수와 같았다. 그런 무시무시한 이를 마침 곁에서 볼 수 있게 된 건 대단히 흥미롭고 좋은 기회라 스승은 말했지만 간이 작은 알릭은 그런 무서운 이의 옆에 그리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보라. 연구와 진주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
‘그걸 알면서도 저 혼자 여길 보내시다니……. 스승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남은 건 최대한 얌전히 말에 따르는 것뿐이었다. 알릭은 부디 펠레타 공작의 옆에 앉아 있는 유더 아일이 제 지원군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키시아르와 더듬더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