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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45화 (145/805)

145화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한이 두 사내를 구할 시도조차 하지 않고 호산라만 데리고 사라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두 사내는 잠시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상황과 전혀 다른 답을 들으니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듯했다. 잠시 후 한 사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전과 달리 기가 바짝 죽은 존댓말이었다.

“그, 그러니까. 나한이랑 호산라가… 진짜 우릴 버리구 갔단 말여…요?”

“나중에 구해도 되니까 먼저 가자는 말은 하던데.”

“거짓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끼어든 두 번째 사내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유더는 그들을 향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원한다면 그때 나누던 대화까지 그대로 읊어줄 수 있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호산라는……!”

“됐어, 두일. 진정혀.”

처음에 존댓말을 했던 사내가 분노하여 발을 구른 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한이 믿기 힘든 남국 종자란 건 알고 있었잖어. 호산라는 착해 보여도 결국 도련님 도련님 거리면서 그놈 말에 껌벅 죽구.”

“그럼 가일 형은 저치 말을 믿겠단 말여?”

“사실 너도 믿고 있으니까 화낸 거잖여.”

두일이 찔끔한 얼굴로 입을 다물자 가일이라 불린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겠냐. 우리가 져서 잡혀버린 것을. 밥이라도 먹었으니 여한 없다 해야지.”

“…….”

“저기, 두 사람은 형제 사이지?”

침울해진 사내들에게 자연스레 말을 건 이는 칸나였다.

“가일에 두일. 이름도 비슷하고 얼굴도 닮았네. 어디 출신이야? 말투를 보니 역시 서부?”

사실 칸나는 이곳에 오기 전 가일과 두일이 들고 있던 무기에서 이미 1차로 먼저 정보를 읽고 온 상태였다. 무기를 지급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는지 알아낸 정보는 몇 개 없었다지만, 그래도 이름과 출신지 및 두 사내 간의 관계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미 아는 정보를 저렇게 태연하게 잘 물어보다니, 확실히 경험이 늘긴 했군.’

유더가 내심 감탄하는 사이 아무것도 모르는 가일과 두일은 칸나의 질문에 답했다.

“맞어. 형제여. 내가 형이고 두일이 동생. 서부서 살았던 것도 맞긴 한디…….”

“유더가 그러는데 둘이서 똑같은 능력을 쓴다며? 그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언제 각성했어? 수련은 어떻게?”

“어… 흔치 않나……? 잘 모르겠는데……. 각성한 진 1년 조금 안 되었고…….”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나오는 질문 중 직접적으로 나그란의 별을 언급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개인적인 사항을 궁금해하는 듯한 모습에 얼이 빠진 형제가 그 정도는 대답해도 괜찮겠다 싶었는지 천천히 대답을 시작했다.

유더는 칸나가 능수능란하게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새로이 알아낸 정보를 조합하여 필요한 사항들을 형제가 자연스럽게 답하도록 분위기를 바꾸는 모습을 한 발짝 물러서서 지켜보았다.

가일과 두일은 본디 서부 시골 출신의 고아 목동 형제로, 어느 날 양 떼를 맹수에게서 지키기 위해 지팡이를 들고 용감히 달려들다가 나란히 같은 능력을 각성했다.

이후 그들은 위험한 능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쫓겨나 굶주리며 헤매다가 우연히 각성자가 많이 있는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다. 정황상 그곳이 나그란의 별이 모여 있던 곳인 듯했다.

형제가 그 마을이 어디 있는지, 거기에 어떤 이들이 있는지는 쭈뼛대면서 말하려 하지 않았기에 칸나는 곧바로 화제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아까 나한과 호산라에 대해 말하던데, 그 사람들은 무슨 관계야?”

“우리도 잘 몰러. 우리보다 먼저 거기 있었거든. 근데 호산라가 나한을 항상 도련님이라고 부르니까 원래 나한네 하인이었나 보다 하지 뭐.”

가일의 답에 이어 두일이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난 나한이 남국에서는 귀족 도련님이었는데, 죽을 뻔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도 들은 적 있어… 진짠진 몰러. 아무튼 나한은 별로여. 그놈은 흉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눈깔이 무서워.”

“맞어. 호산라는 그렇게 착한데. 솔직히 이번에도 호산라의 부탁이 아니었음 안 왔어. 나한 그놈은 먹을 거 하나 안 가져오면서 맨날 먹을 입만 늘려서 온단 말이지.”

“분명히 호산라는 우릴 구하자고 했을 거야. 근데 그놈이 그냥 가자고 했겠지. 뻔혀.”

아무래도 가일과 두일은 호산라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한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욕을 아끼지 않았다. 유더는 그들이 당시 상황을 보지 못했음에도 마치 본 사람처럼 추리해내는 말을 들으며 나한이 어지간히도 인망이 없는 모양이라 짐작했다.

“다른 사람이 오면 안 되었던 거야? 왜 호산라는 너희에게만 부탁을 했는데?”

“거야 우리가 그만큼 세니까 그렇지. 나한한테 충성하는 패거리들은 아직 그분께 가르침을 받는 중이기도 하구…….”

“그분?”

“…….”

순간 잘 대답하던 형제의 얼굴 위로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쳤다.

“아, 그. 이건 다 거짓말이야. 우린 아무 말도 안 했어!”

‘이것 봐라.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분’과 관련된 사항이 최고 기밀인 모양이지?’

유더는 좀 더 파고들어 묻고 싶었으나 칸나는 아직 곧바로 파고들 때가 아니라 판단한 듯 빙긋이 웃으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

“알겠어. 그러면…….”

대화를 빙자한 정보털이가 끝나기까지는 그로부터 제법 오랜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나그란의 별이 어떤 목적을 지닌 단체인지, 그분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그 외에 얻은 곁다리 정보는 상당히 많았다.

“나그란의 별은 꽤 특이한 단체 같아. 저 형제가 말하는 것만 들으면 그냥 핍박받는 각성자들끼리 모여서 만든 평화로운 마을 같은데, 나한 얘기를 할 땐 그것만은 아닌 것 같거든. 유더는 어떻게 생각해?”

마지막으로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다며 가일 두일 형제가 입던 옷가지까지 받아 챙긴 칸나가 밖으로 나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내부에 세력이 두 파로 나뉘어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역시 그렇지? 그러면 가일과 두일은 온건파라 치고, 나한 그 사람은 강경파라고 생각해야겠네. 사이는 생각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아. 그리고 말하는 걸 보니 조직 내부에 남국 출신도 많아 보이던데…….”

두서없이 이어진 대화 속에서 이 정도까지 정보를 빠르게 뽑아낼 수 있었던 건 칸나가 아니었다면 무척 힘들었으리라. 코끝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긴 칸나를 향해 유더는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말을 건넸다.

“네가 같이 와주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 나만 믿으라고 했잖아. 검에서 읽은 사전 정보가 얼마 없긴 했지만 대화를 나눌 땐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었어.”

당당하게 어깨를 편 칸나가 이내 도로 진지한 표정이 되어 손에 든 낡은 옷가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아직 제일 중요한 건 못 알아냈으니까, 다음엔 꼭 알아낼 거야. 그때까진 이 옷을 살피면서 읽을 만한 정보가 검보다는 더 많길 바라야겠어.”

이야기를 듣자 하니 칸나는 그간 태양신 경전을 가지고 진행한 개인훈련을 자나 깨나 계속하면서, 정보를 선택하여 읽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했다.

“손에서 떨어진 물건을 읽는 능력은 아직 발전이 더디지만, 경전에 적힌 정보를 전보다 훨씬 세심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더니 다른 사람들하고 대화를 나눌 때 느껴지는 감각도 이전보다 훨씬 예민해졌지 뭐야.”

“감각이 예민해져?”

“응. 뭐라고 해야 하나? 상대의 감정이나, 어렴풋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같은 게 피부로 느껴져.”

저와 대화를 나누는 걸 꺼리게 될까 걱정되어 다른 동료들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유더에게만은 말할 수 있으니 좋다며 칸나가 씩 웃었다. 유더는 그녀가 요즘 들어 유난스레 그를 걱정하던 이유가 그 능력 발전 때문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전도 좋지만 능력이 정신에 지나치게 영향을 미치면 건강을 해칠지도 몰라. 혹시 능력 사용과 관련해 힘들거나 어려워지면 곧바로 찾아와.”

“물론이지. 난 걱정 말고 유더 네 상태나 더 잘 챙겨. 곧 있을 파티에도 오늘 아침처럼 그런 안색으로 나가면 안 돼.”

지지 않고 대답한 칸나가 이내 제 숙소 방향으로 사라졌다.

‘오늘 아침이라고 하니… 또 어제 꾼 꿈이 생각나는군.’

유더는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겨우 기억의 저편으로 밀었던 목소리가 또다시 떠오르는 바람에 기분이 약간 저조하게 가라앉았다.

***

마침내 수확철 축제 시기의 마지막을 장식할 날이 찾아왔다.

마병단은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그들이 있는 곳만을 노려 우연히도 찾아든 각종 기기묘묘한 사건들을 무사히 막아내고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명성을 거머쥐었다. 아직 유서 깊은 황궁기사단이나 궁중마법사단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전 대륙에서 온 사절들이 마병단의 활약을 무척 인상 깊게 보았으니 첫 단추는 성공적으로 꿴 셈이었다.

유더는 흰 예복을 입고 여기저기서 삼삼오오 모여 설렌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단원들을 지나 위층 계단을 올랐다. 익숙하고 편한 검은 제복 대신 팔다리를 지나치게 부드럽게 감싸는 흰 예복을 입고 있으니 영 기분이 묘했다.

‘이런 요란한 파티 참석은 부디 이번 년으로 끝나야 할 텐데.’

“단장님. 유더 아일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꼭대기 층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린 유더는 잠시 속으로 셋을 센 뒤 손잡이를 당겼다.

“오, 왔군.”

햇살이 드리운 창가에 서 있던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유더와 마찬가지로 그도 오늘은 제대로 된 파티용 예복 차림이었다.

다만 겉옷부터 하의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흰 천을 쓴 단원들의 예복과 달리, 그가 걸친 옷은 내의와 하의는 희되 겉옷에는 눈동자 색을 닮은 강렬한 붉은색을 썼고, 어깨 위에는 길고 부드럽게 늘어진 전통식 금빛 망토를 둘러 빈틈 하나 없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평소 흰 단장 제복만 걸쳤을 때도 지나치게 눈에 띄었던 사내가 작정하고 몇 겹이나 되는 예복을 보석과 함께 걸치니 화려하다는 말조차 그의 앞에서는 빛을 잃는 듯 느껴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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