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아페토 공작가에서 벌어진 끔찍한 실험 증거물들을 자네들이 수거해 왔다고 들었는데, 그게 정말인가?”
“그건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유더의 반문에 노마법사는 그저 웃기만 했다.
“허허. 나도 귀가 있네. 그게 정말이라면 혹 내게도 일견할 기회를 줄 수 있겠나?”
“안 됩니다. 그 실험은…….”
단호하게 거절하려 하는 말을 가로막으며 타이스 율만이 두 손을 들고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속삭였다.
“불순한 의도는 없네. 그 실험의 목적이나 결과에도 관심 없어. 다만 자네들 각성자의 힘을 연구하여 기록한 부분이 있다면 저 붉은 돌의 힘을 살필 때 뭔가 더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여서 말이야. 단지 그게 확인하고 싶을 뿐이라네. 어렵겠나?”
각성자의 힘과 붉은 돌의 힘 사이의 상관관계를 알아내고 싶다는 말에 유더는 순간적으로 멈칫 입을 닫았다.
붉은 돌이 떨어지며 뿜어져 나온 힘의 여파로 각성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이다. 그러니 그가 그런 말을 한 이유 자체는 이해가 되었다.
‘물론 벨트레일 원로사제가 그런 쓸모 있는 연구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축제가 끝나고 나면 황제가 약속했던 1달의 시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다. 그 시간 안에 붉은 돌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지는 못하더라도, 그 안에 든 힘의 정보를 일부라도 알아내어야 조금 더 시간을 달라는 말을 하거나, 혹은 이후에 이어질 연구에 손이라도 대어볼 수 있을 터였다.
유더가 망설이는 기색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는지 노마법사는 재빨리 몇 마디를 더 보탰다.
“제자가 방어진을 치는 동안 나라고 놀기만 한 게 아니네. 미완성이긴 하지만 그간 마력과 붉은 돌의 힘 사이의 연관관계를 살피며 기록해 온 글들이 있어. 필요하다면 지금 줄 테니 공작 전하께 보여드리겠나? 그러면 의견을 정하실 때에 도움이 되실 테니.”
눈을 빛내며 답을 기다리는 노마법사를 향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페토에서 가져온 물건 중 율만 님께서 원하시는 부분은 아마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단 단장님께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
“좋네, 좋아. 자, 이걸 가져가게.”
희색이 돈 타이스가 테이블 근처에 돌돌 말린 채 쌓여 있던 종이 뭉치 몇 개를 유더의 품 안에 들려주었다. 유더는 일단 그것을 받고 일어섰다. 그가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등 뒤에서 알릭이 달려와 인사를 했다.
“이제 가세요?”
“네. 차 잘 마셨습니다.”
“뭘요. 여기 내려왔을 때보다 안색이 훨씬 나아지신 것을 보니 기쁘네요.”
“…제 안색이 그렇게 안 좋았습니까?”
유더는 이곳에 내려오기 전 제 안색을 걱정하던 칸나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알릭이 몰랐냐는 듯 호들갑을 떨며 대꾸했다.
“아 모르셨습니까? 잠을 설쳐 피로가 쌓인 분들이 주로 그렇게 눈이 퀭하고 안색이 창백하거든요. 내버려 두면 두통으로 발전하기 십상이라 일부러 잠이 깨고 정신이 명확해지는 약초를 넣어 드린 겁니다. 진통 효과도 조금 있는 녀석이죠.”
그러고 보면 악몽을 꾸고 일어난 이래 무거웠던 머리도 어느새 좀 가벼워진 듯도 했다. 유더는 솔직하게 그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잘 아시나 보군요.”
“하하. 별건 아닙니다. 스승님이 워낙 신전 가기를 싫어하시면서 엄살은 강하시다 보니 제가 좀 이런 데 지식이 늘었죠.”
“알릭! 쓸데없는 소리 말거라.”
타이스의 타박에 찔끔한 알릭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그를 향해 입을 열어 질문을 했다.
“펠긴 님. 뭔가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너무 예의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계속 얼굴을 볼 텐데 예의를 차리는 것도 불편하니까요. 대신 저도 그냥 유더라고 불러도 될까요?”
“알겠습니다… 알릭.”
유더가 이름을 부르자 알릭이 “좋아요. 무슨 질문인데요?” 하고 반문했다.
“알릭은 마법사이니… 혹 방어에 도움이 되는 마도구를 파는 분을 알고 계시다면 추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방어용이요? 주변의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하던가요?”
알릭은 그 방어용 마도구가 필요한 사람이 유더 본인일지도 모른다고는 생각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어차피 방어용 마도구를 필요로 하게 된 이유도 남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제2성 발현 때문이었기에 유더는 굳이 그의 오해를 풀어주지 않기로 했다.
“네.”
“흐음. 1회용이라면 제가 몇 개 가지고 있긴 한데…….”
“1회용이요?”
“스승님과 이곳으로 오기 전에 걱정이 되어서 친구 녀석에게 만들어 달라 하여 가져온 것들이에요. 일정 시간 동안 주변에 방어막을 치고 은신하게 해 주는 도구인데 아무래도 제대로 된 것들보다는 지속시간이 짧고 위력도 강하지 않죠.”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혹시 제게 팔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뭘 또 사겠다고 하십니까. 그간 도움도 많이 받았으니 그냥 드리죠, 뭐.”
시원하게 대답하고 잠깐 제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던 알릭이 한참 뒤진 끝에 아주 작은 검은색 돌을 꿰어 만든 실팔찌를 들고 나타났다.
“사용 방법은 간단합니다. 여기 꿴 돌을 부수면 방어막이 한 번 발동해요. 대충 몇 분 정도는 어지간한 공격에서 착용자를 막아줄 겁니다.”
팔찌는 몹시 조악한 생김새였다. 겉보기에는 전혀 마도구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유더는 오히려 그래서 그 팔찌가 제 목적에 더 걸맞다고 생각했다.
“돌이 총 다섯이니 다섯 번 쓸 수 있는 겁니까?”
“그렇죠. 약한 녀석들이라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지니까 조심해야 해요.”
“감사합니다.”
유더는 언제가 되었든 알릭에게 이번의 도움을 꼭 갚겠다 생각하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마도구는 몹시 비싼 편인 데다 제대로 된 제작자를 찾기도 힘들기에 대단한 지출을 예상했었는데, 일이 이리 되어 다행이었다.
‘마법사들이 여기 머물게 되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유더는 지하실을 떠나자마자 그 팔찌를 손목 안쪽에 찼다. 제복 소매에 가려 있으니 다른 이들은 그 팔찌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터였다.
***
그날 저녁, 유더는 드디어 칸나와 함께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 두 사람을 만나러 갔다. 깨어난 지는 이미 몇 시간이 지난 상태였으나 그가 먼저 찾아가기보다는 그쪽에서 먼저 마병단 담당자를 만나겠다는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예상보다 만남이 늦어졌다.
그들이 머무는 방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지키고 있던 마병단원 두 명이 유더와 칸나를 보고는 반색하며 인사를 건넸다.
“오. 드디어 온 거야? 이제 더 안 지켜도 되는 건가? 할 일이 없어서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아니. 우리가 나올 때까지만 조금 더 있어줘.”
유더의 부탁을 들은 단원들은 싫은 기색 없이 수긍한 뒤 도로 자리에 앉았다.
“안에 있는 이들은 어때. 난동을 피우지는 않았어?”
“아니.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계속 조용했어. 잠만 자나 의심될 정도로.”
“알겠어. 문을 열어 줘.”
밖에서 세 개의 자물쇠를 걸어 잠근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칸나가 유더의 곁에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이제 시작이구나.”
“칸나. 혹시 긴장되면…….”
“아니야. 하나도 긴장 안 돼. 이제부턴 나만 믿어, 유더. 그동안 열심히 수련한 결과를 오늘 보여줄 테니까.”
칸나는 유더와 함께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을 만나 직접 대화를 나누고 정보를 캐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도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수련해 온 결과를 드디어 유더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몹시 고무된 눈치였다.
“열렸으니 들어가.”
두 사람은 열린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다른 마병단원들의 숙소와 그리 다를 바 없었다.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있던 두 사내가 유더를 보고는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분명 높은 사람을 불러 달라고 말했는데…….”
“그래서 왔잖아.”
유더의 짤막한 답에 두 사내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다, 당신이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이여? 제일 높은 사람은 단장이라던데…….”
“나는 단장님의 보좌다.”
“보, 보좌가 뭐여?”
“나도 몰러.”
“단장님의 바로 곁에서 오른팔처럼 일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당황해하는 두 사내를 향해 칸나가 설명해 주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너… 너는 그러면 누군데?”
“나는 부단장.”
정확히는 부단장 중 한 명이겠지만 사내들에게 거기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 그들은 그쯤에서 만족한 듯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높은 사람은 왜 보자고 말했지?”
“어어……. 그러니까… 당신들이 우릴 잡아왔잖아. 그런데 아직까지 때리거나 고문을 안 하고 아까는 밥을 주니까… 언제쯤 감옥에 가두고 고문할 건지 물어보려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무언가 이상하다 여겼는지 아리송한 표정이었으나, 사내 중 한 명이 겨우 제 할 말을 다 끝냈다.
‘이 녀석들, 이런 일에 대비한 교육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나?’
유더는 예상보다 훨씬 더 어리숙한 사내들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싸울 때는 제법 날카롭게 합을 맞추더니, 이렇게 무기를 빼앗긴 채 마주하고 있자 시골을 지나다 흔히 만나는 순박한 청년들과 다를 바 없었다.
칸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묘한 표정이었다.
“먼저 말해두겠는데, 내가 너희들을 잡아온 게 아니야.”
“그, 그러면?”
“내가 너희들을 기절시킨 이후 네 동료들이 왔었어.”
“나한과 호산라 말여?!”
“그래. 그런데 구하지 않고 그냥 둘이 먼저 사라지기에 너희들을 두고 가기도 이상해서 그냥 데려온 것뿐이야. 그러니까 잡아온 게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