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43화 (143/805)

143화

“…….”

“유더. 네 예복은 색이… 우리랑 조금 다른데?”

침묵 속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이는 데브란이었다. 유더는 예복 소매와 옷깃 부분을 매만져 정리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께서 부단장들과 보좌는 다른 디자인으로 만들었다고 하셨어.”

“그랬나? 아까 스티버가 입은 걸 봤지만 뭔가 그거하곤 느낌이…….”

“형. 그 옷을 입으니까 완전… 어, 단장님처럼 엄청 높은 분 같아요!”

데브란이 낯선 이를 보는 듯한 얼굴로 중얼대는 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지미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외쳤다. 유더는 제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냥 단장님의 제복과 색이 비슷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진짜로요! 이만큼! 이만큼 높은 귀족 같다니까요! 엄청 멋있고! 잘생겨 보여요!”

“음… 고맙다 지미.”

머리 위로 손을 높이 올려 흔들면서 제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려 열심히 노력하는 소년의 모습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던 분위기도 동시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유더. 그런 예복을 전에도 입어본 적 있어?”

“아니. 없어. 왜?”

“많이 입어본 것처럼 익숙해 보여서.”

가까이 다가온 가케인이 유더가 미처 보지 못한 등 뒤쪽에 묻은 실 조각 하나를 떼어 주며 미소를 지었다.

“검은 단복도 어울렸는데, 흰색도 정말 잘 어울려. 우아해 보이고.”

“너야말로.”

한 귀로 흘릴 말에 가장 좋은 대답은 무조건 상대에게 같은 말을 하여 돌리는 것이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유더에게 가르친 가장 쓸모 있는 화술 중 하나였다.

유더의 답에 가케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나는 많이 입어 봤으니까 익숙해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이렇게 멋진 예복은 처음이지만.”

“많이 입어 봤다고? 왜?”

무심코 반문한 뒤 유더는 그의 출신을 깨닫고 옷을 살피던 손을 멈추었다.

“아. 이전에도 파티에 참석할 일이 꽤 있었겠군.”

“아니. 그런 것뿐만은 아니고.”

제가 입은 예복 옷자락을 내려다보는 가케인의 눈동자에 문득 씁쓸하면서도 속 시원해 보이는 기색이 서렸다.

“예복을 입는 건 파티에 참석할 때보다는 어려운 자리에 나가야 할 때가 더 많지. 이를테면 맞선이라거나…….”

“유더 형. 바지 아랫단까지 전부 살폈는데 멀쩡해요.”

그 순간, 허리를 숙이고 함께 옷을 살펴 주던 지미가 머리를 들고 끼어들었기 때문에 유더는 가케인의 말을 더 듣지 못했다.

“고마워.”

“있잖아요 형. 파티가 열리는 델루마 궁에 있는 홀에는 대마법사 루마가 마법으로 만든 움직이는 갑옷 기사가 있대요. 정말 궁금한데 저도 볼 수 있을까요?”

“그런 게 있대? 그 대마법사 양반은 시간이 아주 많았나 봐. 그렇지 않아도 수도 곳곳에 그 양반 이름을 딴 게 많더니, 별걸 다 만들었네.”

데브란의 대꾸가 이전 생에서 제가 처음으로 델루마 궁의 움직이는 갑옷 기사를 봤을 때 했던 생각과 똑같았기에 유더는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었다.

“운이 좋으면 볼 수 있겠지.”

모든 축제 행사가 아무런 사고 없이 잘 지나갔다는 사실이 지미의 밝은 얼굴을 통해 실감이 났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지만 그것만은 정말 다행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율만 님, 펠긴 님.”

“오. 간만에 바쁘신 몸께서 오셨군.”

예복 시착을 마친 뒤 유더는 곧장 지하로 내려가 마법사들을 만났다. 그사이 그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결계를 치는 데 성공했는지 지하의 분위기는 전만큼 무겁지 않았다.

“어떤가. 우리의 24중 방어진. 이제 압박감이 전혀 없지?”

드넓은 천장과 벽, 바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으로 빛나고 있는 거대한 방어용 마법진들 사이에 선 타이스 율만이 흐뭇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옆에 선 제자 알릭 펠긴은 스승과 달리 몹시 핼쑥한 몰골이었으나 유더를 보고는 반가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오셨군요. 전에 펠레타 공작님… 아니, 단장님께서 보내주신 마정석과 재료들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설마 마정석을 수레 가득 실어다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뭡니까.”

그들의 주변에 전에 보지 못했던 가구나 생활 시설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키시아르가 신경을 꽤 써준 모양이었다.

알릭은 예상보다 더 많은 마정석을 받은 덕에 본래 15중으로 만들려 했던 방어진을 24중까지 강화할 수 있었다는 말을 쉴 새 없이 주절대며 유더에게 차를 대접했다. 이전에도 마셨던 진주탑 특제 연구용 꽃차였다.

“드세요. 잠을 깨는 데 아주 좋은 것도 하나 섞었습니다.”

“연구 진행은 어떻게 되어가고 계십니까?”

유더가 차를 마시며 묻자 알릭이 씩 웃으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붉은 돌을 가리켜 보였다. 그것은 여전히 투명한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은 주변을 작게 빙 둘러 흰 원이 그려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저기, 원이 보이십니까?”

“네.”

“현재 방어진의 힘이 저곳까지 닿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붉은 돌의 힘은 저 흰 원 밖으로 발산되지 못해요. 저처럼 허약한 마법사도 저기까지는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이죠.”

“대단하군요.”

“대단하죠. 이 정도 방어진을 칠 수 있는 마법사는 전 대륙을 통틀어도 흔치 않거든요.”

유더의 칭찬에 알릭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뒤를 따라 타이스 율만도 말을 보탰다.

“저 녀석 자만에 박자를 맞춰주면 안 된다네. 내 제자지만 겸손을 몰라서 큰일이거든. 내가 혼자 했으면 더 빨리 할 수 있었는데 저 녀석이 세 번이나 진을 잘못 그린 바람에…….”

“아 스승님. 제가 며칠 밤을 새며 저걸 완성했는지 보셨지 않습니까. 역작이란 말입니다. 이 정도 칭찬에도 기뻐하면 안 된답니까?”

“쯧쯧. 가서 어서 재료 손질이나 더 해라. 잠이 덜 깬 모양이니.”

스승의 말에 알릭이 울상이 되어 차를 허겁지겁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스는 축 처진 제자의 등을 향해 들으라는 듯 혀를 몇 번 더 차고는 유더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마정석 외에도, 며칠 전 요청했던 3가지 매개체 재료도 모두 받았네. 급히 구하셨다며 양이 아주 적기는 했지만, 그리 빨리 주실 줄은 몰랐어. 솔직히 놀랐지.”

“그러면 지금은 매개체를 만들고 계신 겁니까?”

“아니. 우선 그것들이 얼마나 붉은 돌의 힘과 적합한지를 시험해 보았네. 요정의 가루는 영 쓸모가 없었고, 고대 용의 심장과 유칼락티움은 상성이 괜찮은 편이더군. 조금 더 시험해 보아야 알겠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용의 심장 쪽이 더 나을 것 같네.”

“그렇군요. 그러면 심장 쪽을 더 구해 달라 단장님께 요청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아는군그래. 고맙네.”

타이스 율만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재료가 충분히 준비되면 매개체를 곧 만들 수 있도록 지금 제자가 열심히 틀을 만들고 있다네. 매개체가 완성되는 대로 자네와 칸나를 불러 거기에 저 돌의 힘을 넣는 실험을 해 볼 생각이야. 그때 도와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든든하군.”

그렇게 말한 뒤, 타이스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그러고 보니.’ 하고 말을 이었다.

“곧 축제 기간이 끝난다면서? 마지막에는 항상 그… 델루마 궁에서 아주 큰 파티가 열리지 않나.”

“네.”

“본래는 나도 거기에 초대를 받아서 가야 하는데, 영 가기가 싫어. 이리 재미있는 연구를 두고 왜 그런 재미없는 곳에 가겠나. 거기에 올 진주탑 녀석들과 다른 마법사 녀석들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 그래서 말이지… 이번에 나는 빼고 저 제자 놈만 그쪽에 끼워서 같이 가게 하면 안 되겠나?”

솔직하기 그지없는 노마법사의 말에 유더가 잠시 침묵을 지키자, 타이스가 히죽 웃으며 입을 가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걸었다.

“나는 갑작스레 감기에 걸려 아픈 것으로 해 두고, 나머지는 저 녀석에게만 맡기면 되네. 어차피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이도 거의 없을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거든. 게다가 그쪽에서도 이곳을 지킬 이가 필요하지 않겠나?”

“단장님께 말씀을 해 보아야 알겠습니다만… 아마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괜찮다고 하실 겁니다.”

“그렇겠지? 흐흐.”

스승 대신 파티에 끌려가 귀찮은 이들을 상대해야 할 알릭의 미래가 보여 약간 불쌍해졌지만, 어차피 모두가 자리를 비울 동안 숙소를 지킬 이가 필요하기도 했었기에 노마법사의 제안은 달갑게 느껴졌다.

키시아르는 나단 주커만을 비롯한 펠레타 기사단을 숙소에 배치해 레블린과 그의 연인 단데니온, 아페토 가에서 온 각성자들, 지하에 있는 붉은 돌 등을 지키게 할 생각인 듯했으나 유더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겼다.

소드 마스터인 나단 주커만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환상능력자와 이동능력자가 함께 있는 나그란의 별을 생각하면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유더는 그러한 생각을 담아 타이스 율만에게 간략히 부탁을 했다.

“다만 그사이 단에 일이 조금 많았기 때문에, 침입자가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혹시 모르니 당일에는 평소보다 안전에 신중을 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다른 이들처럼 속성마법을 뻥뻥 쓰지는 못하지만, 대신 다른 게 있거든. 내가 있는 한 이곳은 누가 와도 안전해! 마음 놓아도 좋네.”

타이스 율만이 끌끌 웃으며 지하실의 안전을 장담했다. 유더 또한 그와 함께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타이스의 제자 알릭 펠긴의 미래 또한 결정된 셈이었다.

“그러면 이후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혹 연구를 진행하시던 도중 더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을 주십시오.”

“아. 필요한 것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게 있긴 하군.”

타이스 율만이 갑자기 흥미로 가득한 눈빛이 되어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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