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예복이 시간 낭비라는 생각만은 아직도 변함없지만 이번은 그런 개인적 호오를 따질 때가 아니다. 유더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각 과의 부단장과 보좌인 자네에겐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른 장식이 추가되어 있을 거야. 내가 직접 골랐지.”
“바쁘신 와중에 말이죠.”
등 뒤에서 나단 주커만이 무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리며 “맞아.” 하고 답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수도 사교계와 의상실들에서 그간 안목 높기로 이름을 꽤 날렸거든. 기대해도 좋네.”
애초에 파티를 기대한 적 없고, 앞으로도 유더가 예복에 일희일비할 날은 오지 않겠지만 키시아르의 유들유들한 미소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네.”
유더는 조용히 대답한 뒤 제 숙소로 내려갔다. 여분의 제복과 옷이 걸려 있는 것 이외에 생활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방은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사이에도 깨끗이 청소된 상태였다.
코트를 벗고 침대에 눕자 그제야 고개를 쳐든 피로가 기다렸다는 듯 전신을 무겁게 감싸 안았다.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 장갑을 벗었다.
언뜻 보기에는 깨끗해 보이는 손이었으나 손등 오른쪽 부분에 작은 보랏빛 반점이 찍혀 있었다. 치료를 받았음에도 손등과 손바닥 안쪽이 아직도 묵직한 열을 머금은 채 근지럽게 저렸다. 키시아르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유더는 그 상태가 반점이 처음 생겼던 때와는 다소 다름을 알았다.
‘처음에는 치료를 받고 나면 깨끗하게 멀쩡해졌었지. 그런데 어깨까지 한번 침범했던 뒤로는 치료를 받아도 통증과 저린 감각이 흔적처럼 어느 정도 남아 있어.’
물론 그 흔적 같은 감각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지만, 그것도 치료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더 길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문제였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고름이 안에 조금씩 남아 축적되는 기분이었다.
‘신성력만으로는 완전히 치유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나.’
이 기이한 반점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대체 무엇이 더 필요할까. 아무래도 조만간 이논의 얼굴을 한번 더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더는 괜스레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편 뒤 눈을 감았다. 본래는 쉬지 않고 곧바로 지하로 내려가 마법사들을 만나고 그간의 연구 경과를 들어볼 생각이었는데, 영 몸이 무거워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아마도 치료의 여파일 터였다.
그러나 문득,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어떤 생각이 내려앉으려던 눈꺼풀을 도로 빠르게 들어 올리도록 만들었다.
‘…혹 이게 발현이 가까워진 징조라면?’
유더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간의 기억을 돌이켜 보며 제 몸상태를 깊이 점검해 보았다. 몸 바깥과 안을 가득 채운 힘, 고요하게 안정된 상태의 마나 홀, 미열조차 없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몸.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아직은.
그것을 몇 번이나 확신한 뒤에야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불쾌한 감각과 기억들이 겨우 스르르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 발정기에 들어선 알파를 몇 명이나 만났으니 과민해질 만도 하지.’
유더는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면서 최대한 빨리 제2성 발현을 대비한 준비를 해 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잠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몸이 아직 무거우니 조금 더 쉬다가 나가는 쪽이 좋을 듯했다.
***
‘미안하네.’
머릿속을 울리는 무거운 목소리.
‘자네 탓이 아니야. 결국 이렇게 만든 건 내 쪽이니 나를 탓하는 쪽이 맞겠지.’
몇 번이나 돌이켜 떠올렸던.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도록 묻어두려 노력했음에도 번번이 실패했던 악몽.
.
.
.
“유더! 내 말 못 들었어?”
유더는 머릿속을 떠돌던 목소리의 잔상을 흘려보내며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제 몫의 예복 상자 하나를 옆구리에 낀 칸나가 다른 상자를 내민 채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네 건 이거라니까.”
“응. 고마워.”
유더는 그녀가 내민 종이 상자를 어색하게 받아들었다. 그들은 파티를 앞두고 날아온 예복을 받기 위해 휴게실에 와 있는 상태였다. 곳곳에서 단원들이 각자의 몫으로 받은 예복을 꺼내 확인해 보면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렘 가득한 즐거운 웃음을 보자 겨우 정신이 도로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멍하네. 정말 아픈 것 아냐?”
“아니야.”
“하지만 밥도 평소보다 적게 먹었잖아. 요즘 들어 빵을 열 개도 넘게 먹던 사람이 갑자기 3개밖에 안 먹으니까 이상했다구. 잠을 못 자서 그래?”
“그것도 아니야.”
제가 먹는 모습은 또 언제 보았단 말인가. 유더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으나 칸나는 여전히 걱정 반, 의심 반으로 뒤섞인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칸나! 예복은 찾았어? 이제 입어보러 가야지.”
말끝을 흐리던 칸나가 멀리서 저를 부르는 에버를 보고는 유더의 등을 살짝 두드리며 인사를 했다.
“먼저 가야겠다. 아까 먼저 살펴본 사람들이 그러는데, 소매 쪽 바느질이 잘 안 된 경우가 있다고 하니까 그 부분 꼭 살펴야 해.”
“응.”
투명하게 속을 비추는 거울 같은 눈빛이 유더의 안색을 짧지만 확실하게 살폈다.
“정말 괜찮은 거지?”
유더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며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렸다.
“괜찮아.”
“알겠어. 혹시 오늘 행사 일정을 바꾸고 싶으면 내가 대신해 줄 수 있으니까 부담 없이 말해줘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유더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담은 그 눈빛을 보니 제가 그렇게나 정신을 놓고 있었던가 싶어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가 친구들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변의 떠들썩함도, 행복한 분위기도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더 저와는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제 주변에만 공기로 된 투명한 막을 하나 씌워둔 듯한 이상한 기분이 오늘 아침부터 계속해서 감정을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이유는 뭐… 어제 꾼 꿈 때문이겠지.’
어젯밤 유더는 내내 악몽을 꾸었다.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꾸었던 하나만은 일어난 이후에도 잊을 만하면 자꾸만 떠올라 머리를 아프게 했다.
바로 이전 생에서 제2성을 발현한 이후 일어났던 일과 관련된 꿈이었다.
아마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했던 걱정 때문에 그런 꿈을 꾸었겠지만, 원인을 안다 해서 달가운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다.
온통 혼란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유더는 언제나 무언가가 목 안에 걸린 듯 껄끄러운 감각을 느끼고는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며, 동시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또한 앞으로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할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음에도 왜 이렇게 기분이 복잡한지 알 수 없어 불쾌했다. 유더는 찌푸린 이마를 손으로 가볍게 쓸며 손에 든 예복 상자에 힘을 주었다.
“유더!”, “유더 형!”
홀로 숙소로 올라가려던 그를 붙잡은 이는 데브란과 지미였다. 하르탄 사건 이후 꽤 많이 친해져 종종 함께 다니는 모습이 보이던 두 사람은 평소의 검은 제복 대신 이미 흰 예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드디어 찾았네. 어딜 가?”
“돌아가서 예복을 살펴보려고.”
“뭘 또 귀찮게 올라가서 살펴. 여기 간의 탈의실도 있잖아.”
데브란이 웃음을 터트리며 휴게실에서 이어지는 작은 방 하나를 가리켰다.
“맞아요. 형도 여기서 그냥 입어요. 제가 잘못 만들어진 곳 없나 잘 봐드릴게요. 엄마가 전에 의상실도 하셨어서, 저 그런 거 잘 보거든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하기도 무엇하여 유더는 하는 수 없이 작은 방 앞에 섰다. 단원들이 간의 탈의실로 사용 중인 방은 유더가 선 곳 외에도 몇 개 더 있었는데, 그중 유난히 한 곳에만 사람들이 몰려 있는 중이었다. 유더가 그곳에 시선을 주자 데브란과 지미가 히죽대며 시선을 마주했다.
“저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게요.”
“누군데.”
“가케인 형요.”
“그 녀석 얼굴 하나는 최고잖아. 다들 구경하겠다고 저러고 있는 거야.”
유더는 가케인이 잘생긴 것이 이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 말만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방 안에서 흰 예복 차림의 가케인이 얼굴을 내밀자, 몰려 있던 단원들이 일시에 환호를 지르며 떠들기 시작했다.
“역시 잘 어울리네!”
“단장님만큼은 아니라도, 너 정도면 절대 거기서 꿇리지 않을 거야!”
“좋아. 이 녀석을 제일 앞에 세워서 귀족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자.”
“…….”
저를 둘러싸고 일어난 환호 속에서 가케인은 텅 빈 눈으로 허허 웃었다. 미남의 인생도 보기만큼 그리 손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약간의 동정을 느끼며 유더는 때마침 빈 옆방에 들어갔다. 종이 상자 안에서 꺼낸 그의 예복은 다른 단원들과 똑같이 진줏빛을 내는 흰 천을 바탕으로 만든 옷이었다.
다만 은단추에 연한 푸른색 실을 쓴 다른 단원들의 예복과는 달리, 그의 것은 소매부터 가슴, 배에 이르기까지 전부 금단추를 달고 검은 실로 소매와 옷깃에 아낌없이 무늬를 넣어 배는 더 묵직하고 화려해 보였다.
키시아르는 이런 예복을 300벌이나 짓게 만드는 데 대체 얼마나 많은 예산을 썼을까. 보기만 해도 아찔해지는 돈 생각을 애써 거두며 유더는 입고 있던 제복을 벗고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나왔다.”
“빨리 나왔네요 혀…엉.”
유더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데브란과 지미, 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합류한 듯한 지친 얼굴의 가케인, 그리고 갈아입을 차례를 기다리던 몇몇 단원들이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일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