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유더가 장갑을 낀 것을 확인한 뒤 키시아르는 뒤에 시립해 있던 나단 주커만에게 간식을 가져오라 명령했다. 대륙 최고의 소드마스터일 남자가 듣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명령이었지만 그는 싫은 기색 없이 뒤로 물러났다.
“자. 그러면 이제 해야 할 이야기들을 시작해 볼까. 우선 나그란의 별이라는 자들에 대해서부터.”
어제 아페토 가에서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키시아르는 한시도 쉬지 않고 모든 일을 처리했다. 본래 예정과 다른 일이 벌어졌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페토 가를 몰아붙이는 한편, 뒤로는 레블린과 단데니온을 포함해 유더가 지켜낸 알파 각성자들과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 2명을 모두 빼내기 위해 힘을 썼다.
밤을 새 가며 공세를 몰아친 끝에 마침내 아페토 공작이 한동안 밖으로 나서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뒤에야 겨우 자리에 앉았으니 이제 조금 쉬고 싶을 만도 하련만, 그의 눈은 여전히 피로 따위는 모르는 듯 선명히 빛났다.
그 모습을 보며 유더는 문득 지친 눈으로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곤 하던 이전 생의 그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 너무나 달랐다.
“왜 그렇게 보나?”
“아뇨…. 아닙니다.”
시선을 들킨 유더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키시아르는 다행히 더 묻지 않고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와 아페토 가에서 빼낸 각성자들이 들려준 정보를 토대로 곧 나그란의 별에 대해 1차 탐색을 시작할 예정이네. 나단에게 확인해 보니 자네가 들었다는 대로 ‘나그란’은 남국 말로 ‘낙원’이라는 뜻이 맞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여러모로 남국과 관계가 있어 보이는 건 확실한데 남국은 다른 지역보다 정세 파악이 어려운 곳이라서 말이지……. 일단 자네가 잡아 온 자 둘이 깨어나 진정하는 대로 조사를 해 볼 생각이야. ‘그분’이라는 자가 누구인지, 그 단체의 결성목적과 방향에 대해서 알아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듯하니.”
유더에게 관자놀이 부분을 정확하게 얻어맞고 기절한 두 사내는 아직껏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빈방에 격리된 채 누워 있었다.
‘이름이 가일과 두일이라고 했었나.’
마지막에 나한이 사라지기 직전 했던 말을 생각하면 그들은 언제고 동료를 되찾기 위해 올 것이다. 물론 순순히 넘겨줄 생각은 없지만 최대한 빨리 정보를 알아내는 편이 마병단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의 심문은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어차피 제가 잡아 오지 않았습니까.”
키시아르는 잠시 유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는, 이내 희미한 미소와 함께 “좋네.” 하고 답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화를 해야 해. 겁을 먹게는 하지 말고.”
“그 부분은 칸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정보를 읽는 능력을 지닌 칸나는 그 특성 덕인지 처음 본 타인과도 금세 잘 친해지고는 했다. 마음의 벽을 금방 낮출 수 있으니 이런 일에 도움이 될 터였다.
“그리고 아페토 가에서 데려온 각성자들의 거취 말인데.”
“네.”
유더는 제가 기도소에서 구해 데려온 각성자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모두 다 알파만 있는 줄 알았던 12명의 각성자 중 사실 진짜 알파는 5명뿐이었고, 그 중 발정기에 돌입한 이는 4명이었다. 나머지 각성자들은 벨트레일이 그들을 상대로 강제로 2성 발현을 시키려 연구 중이었다고 말했다.
강제로 제2성 미각성자를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시키는 방법이라니, 유더가 아는 한 그런 방법은 미래에도 없었다.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지 생각하면 벨트레일이 죗값을 치르기 전 곱게 미쳐 버린 것조차 아쉬울 따름이었다.
“발정기를 겪는 이들이 그 기간을 잘 넘기고 회복을 끝내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돌려보내고, 아닌 자는 원한다면 이곳에서 일하게 할까 싶군.”
“이곳에서 말입니까.”
“마병단이 사용할 땅과 건물이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테니 일할 사람도 계속 구해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이곳에서 일할 이들은 처음부터 대부분 각성자로 채우려 계획하고 있었네. 관련한 일을 먼저 나단에게 시켰었지만, 앞으로는 부단장들과 자네도 하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이런 계획을 듣고도 무모하다 놀라지 않는군.”
놀랄 일이 무어 있겠는가. 현재는 행정 및 관리 등의 일반 업무를 볼 일이 거의 없다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을 전담할 사람들도 필요해질 수밖에 없다.
각성자들만으로 구성된 마병단을 가장 잘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이들은 역시 같은 힘을 지닌 이들이었다. 이전 생에도 키시아르는 똑같은 일을 했고, 마병단의 규모가 커져갈수록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확실히 증명되었다.
유더는 그 모든 감정을 담아 한 마디로 대답했다.
“단장님이 하시는 일이니 무모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키시아르는 잠시 답이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입술 끝이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나는 가끔… 자네가 나를 꼬드기러 온 유혹의 사자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유혹이라뇨.”
유더가 귀를 의심하며 반문하자 키시아르가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자꾸 달콤한 말만 하지 않나.”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지금.”
“아부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제 말은…….”
“알고 있네. 설명하지 않아도 돼.”
또다시 농담으로 넘기려는 것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린 유더를 향해 키시아르가 웃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지. 나는 스스로에게 언제나 의심을 품으라 배운 자인데도,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내가 하려는 일들이 옳은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거든.”
“…그건 실제로 옳은 일로 나아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라고. 지금도 말이야.”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손에 턱을 괴며 하아 하고 작게 웃음을 담은 숨을 내쉬었다. 마주한 붉은 눈동자가 유더의 속을 모조리 파헤치려는 듯 곧게 바라보았다.
“신기하군. 어디서 자네 같은 이가 나타났을까.”
“…….”
“처음부터 그랬어. 자네는 마치 내가 가는 길의 끝을 먼저 보고 오기라도 한 사람처럼 늘 알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생경하리만치 낮은 목소리에 유더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키시아르의 시선이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어 내려가는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몸이 시선에 반응하는 것을 피하려 눈을 돌렸으나,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만은 도망칠 수 없이 선명하게 귀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자네의 그 까닭 모를 확신에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군.”
유더는 그제야 다시 눈을 돌렸다. 금빛 속눈썹이 드리운 그늘 아래, 막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향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를, 혹 의심하십니까.”
그간 나름대로 감춘다고 감추기는 했지만, 키시아르가 유더의 정체를 의심하려면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물론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허황된 추측보다는 좀 더 말이 되는 의심을 하고 있겠지만, 그러는 쪽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음에도 어쩐지 시선을 바로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글쎄. 의심하기엔 자네는 너무 나와 마병단을 위하고 있지 않나.”
돌아온 답은 간결했다. 유더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 느릿하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거면 충분하다는 뜻이네.”
한마디로 유더의 말문을 막히게 한 뒤 키시아르는 아무렇지 않게 도로 일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그런 게 아니지. 남은 축제를 잘 마무리한 뒤에 꼬리를 말고 집 안으로 들어간 아페토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금방 사라질 만큼 바빠지지 않겠나.”
사람들은 그 아페토 가가 저택의 문을 닫고 칩거하게 된 것만으로도 키시아르와 황제가 한 방 크게 먹였다고들 말하였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거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음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아페토 가에서 데려온 각성자들의 진술 말고도 뭔가 더 내보이실 생각이십니까?”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즐겁게 대꾸했다.
“잊었나? 자네가 보고했던 하르탄 사건 때 말이네. 아페토 가의 이들이 부렸던 각성자 용병 중 2사람이 도망쳤다고 했었지.”
“네. 기억납니다.”
“그들을 찾았다고 오늘 아침 하르탄의 영주 대리가 편지를 보냈더군.”
“그렇다면…….”
“나는 그들과 하르탄에 아직 머물고 있는 각성자들을 모두 수도로 데려와 재판장에 세워 증언시킬 생각이네. 이전부터 모아 둔 증거는 많아. 앞으로 아페토의 이름을 단 자들이 백 년 정도는 함부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부숴줄 셈이야.”
얼핏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에 유더의 몸에 가벼운 전율이 일었다.
‘그 아페토 공작가를, 부순다고?’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는 그런 말은커녕 내색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오래 전부터 모아 둔 증거가 있다는 대담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그것을 드러내 놓고 제게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아까 나눈 대화 때문에 뭔가 시험하려 하는 것일까? 유더는 약간의 혼란 속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이전부터…라면, 단장님께서 본디 아페토 가를 무너뜨리려 계획 중이셨다는 뜻입니까?”
“아페토 가뿐만은 아니라네.”
키시아르의 답은 깔끔했다.
“공작가 전부. 나아가서는 무능하게 제국을 좀먹는 이들 모두 나의 청산 목표지. 이번은 시작일 뿐이야.”
너무나 거대한 포부에 유더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진심인가?’
세계 정복을 꿈꾸겠다는 말만큼이나 허황된 소리로 들렸으나 키시아르는 평온하기만 했다. 유더는 혼란 속에서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