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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38화 (138/805)

138화

‘되돌아와서 제일 좋은 건 역시 젊은 몸이야.’

목숨을 잃을 뻔한 부상을 많이 입었던 이전 생에서는 언제나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치료를 받아도 한계가 있어 죽기 전쯤에는 매일같이 통증을 줄여 주는 약초를 밥처럼 씹어먹고서야 하루를 시작하곤 했었다. 그에 비하면 마음먹은 대로 얼마든지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지금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일, 두일! 이제 너희들 차례야! 어서…!”

정신을 잃은 사내들을 넘어 나아가려던 유더의 앞에, 낯선 이가 나무 사이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가는 깜짝 놀라 물러섰다. 붉은 기가 강하게 도는 전형적인 남국계 피부색을 지닌 젊은 청년이었다.

“당신이 나한이 말한 그 마병단……?”

“호산라. 가까이 가지 마.”

그때 남자의 뒤에서 나타난 나한이 그의 어깨를 잡아채며 보호하려는 듯 제 뒤로 밀쳤다. 유더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두 사람의 뒤편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며 입을 열었다.

“오메가 각성자들을 어디로 데려간 거지?”

“그 형제자매들은 이미 이곳에 없어.”

“…없다고?”

“그래. 지금쯤 먼 곳에 있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만났겠지. 안타깝지만 형제는 한발 늦었어.”

아무래도 저 말이 오메가 각성자들을 죽였다는 뜻은 아닌 듯하니 남는 가정은 하나뿐이었다. 유더는 나한의 뒤에서 몹시 힘겨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쪽이 이동능력자인가 보지?”

“어떻게…….”

호산라라 불린 청년의 표정이 순간 허를 찔린 듯 허물어졌다. 어떻게 추론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거야 우리 쪽에서 엘더 남매를 투입한 이유도 이동능력 때문이었으니까.’

엘더 남매의 이동능력은 아직 제한이 많기는 해도 이번 같은 임무에서 생길지 모를 돌발상황에 가장 유용했다. 본래 유더가 각성자들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지하 통로에서 외부로 나가는 가장 경계가 삼엄한 부분에서 그 능력을 이용하려 계획 중이기도 했다.

이동능력이란 게 지금은 소문으로조차 들려오지 않을 만큼 희귀하다지만, 미래에까지 그렇지는 않다. 유더가 죽기 전쯤에는 뛰어난 이동능력자가 몇 사람이나 단에 들어와 급한 임무를 위해 파견되는 단원들을 돕는 임무를 전담했을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저쪽에도 이동능력자가 있었다니. 예상대로라고 해야 하나.’

같은 이동능력자라 해도 실력은 천차만별이니 저 청년이 과연 어느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한과 그의 동료들의 탈출을 돕는 것으로도 모자라 10명에 가까운 오메가 각성자들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능력자라면 이전 생의 경험을 통틀어도 그리 약한 실력이 아니었다.

그런 이를 데리고 왔으니 수도에서도 가장 경계가 삼엄한 4대 공작가 중 한 곳의 본저에서 일을 저지르고도 나한이 태연했던 이유가 있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도망칠 퇴로를 늘 확실하게 준비하고 일하는군. 영악한 놈 같으니.’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동안 호산라라는 청년이 굳은 얼굴로 유더를 보며 그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동료 두 명을 가리켰다.

“…동료들은 죽었습니까?”

“기절한 것뿐이야.”

“그렇군요.”

호산라가 겨우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자 나한이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밀었다.

“확인했으니 됐지. 지금 당장은 저 둘까지 구할 수 없어. 우리라도 돌아가야 해.”

“하지만 도련님…….”

“저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는 순간 나도 저 꼴이 될지 몰라. 그걸 바라나?”

“아뇨. 물론 아니죠. 그렇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그분께서 무어라 하실지…….”

마음이 약해 보이는 호산라를 향해 냉정하게 반문한 나한이 기도소 쪽을 아쉽다는 듯 바라보았다.

“전부를 구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 정도로도 할 일은 다 한 거야. 그분께서도 이해하실 거다. 가일과 두일은 나중에 다시 구하면 돼. 그러니까…….”

‘허. 누가 그렇게 되도록 두고 볼까 봐.’

유더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고 한마디 하려 입을 연 순간, 멀리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

유더는 저도 모르게 잠시 멈칫했다. 그 틈을 타 나한이 빠르게 호산라를 재촉했다.

“빨리, 호산라!”

호산라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유더, 괜찮아?”

유더가 손을 들어 공격할 틈도 없이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낸 이는 그림자 분신과 함께 달려온 가케인이었다. 그의 시선이 유더의 발치에 쓰러진 두 사내와 문이 열린 기도소를 빠르게 훑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쪽에 엄청나게 많은 시체가 있던데…….”

“…많은 일이 있었지.”

유더는 나한과 호산라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본 뒤 몸을 돌렸다.

“여기 기절해 있는 녀석들, 묶어서 분신에 실어 줘. 별채에 감금되어 있던 각성자 일부가 기도소 안에 있으니 그 사람들도 함께 데려가야 해. 에버는?”

“에버는 단데니온을 무사히 구출해 왔어. 그런데 네가 약속장소에 없고 통로에 시체가 줄줄이 있는 데다 신호까지 남겨 놔서… 에버는 단장님 쪽으로 소식을 전하러 갔고 내가 먼저 여기로 온 거야.”

“잘했어. 통로 안에 벨트레일 원로사제가 있었을 텐데, 그건 봤어?”

“아, 응.”

가케인이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를 보자마자 비명을 질러서 기절시켜 놨지만… 살아는 있어.”

“별채 지하에서 찾으라고 말했던 증거는?”

“생각보다 남아 있는 물건이 많아서, 주머니에 넣을 만큼 넣고 남은 건 바닥에 묻어 뒀는데 그거면 된 거지?”

“그래. 충분해.”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한의 동료들이 키시아르가 있는 본채 쪽까지 가지는 않은 듯해 다행이었다. 뒷일은 소식을 들은 키시아르가 알아서 잘 책임져 주리라. 혼자서 모든 일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새삼 무척 편하게 느껴졌다.

유더는 지금쯤 3공자 레블린을 구하고 분노로 날뛰는 아페토 공작을 즐겁게 상대 중일 키시아르를 생각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그제야 장갑으로 감싼 손끝이 작게 욱신대는 감각이 선명히 찾아들었다.

힘을 최대한 적게 쓰려고 노력하기는 했다지만 역시 영향이 아주 없기는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검에 박아넣은 보석과 이논이 준 끈 덕분인지 이전보다는 한결 통증의 진행 범위가 더뎌져 다행이었다.

“유더. 몸이 안 좋아? 혹시 또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손끝을 흘긋 바라보았을 뿐인데도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느꼈는지 가케인이 옆을 돌아보며 안색을 살폈다. 유더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하지만 왠지…….”

말끝을 흐리며 유더를 바라보던 가케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

“뭐야…?”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치워 줘.”

유더는 가볍게 그의 손을 걷어내며 앞서서 기도소를 향해 걸었다.

“혹시라도 상태가 안 좋은 거라면 전처럼 숨기면 절대 안 돼. 아픈 건 억누를수록 심해지는 법이야. 알지?”

동부에서 반점에 침식당해 팔 한쪽이 전부 시커멓게 변한 모습을 본 이후 가케인은 은근슬쩍 걱정이 많아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팔 하나가 아니라 양쪽이 전부 없어진다 해도 가케인보다 훨씬 강할 터이지만, 진심을 담아 걱정하는 눈빛을 향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유더는 계속해서 걱정 어린 잔소리를 하며 뒤따라오는 붉은 머리 미남을 향해 대충 손을 내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됐으니 빨리 가자.”

***

최초로 공작가 출신 마병단원이 나오게 될지를 두고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던 날이 지나고, 수도는 전혀 다른 이유로 다시 한번 크게 들썩였다.

“세상에, 벨트레일 원로 사제가 각성자를 수십 명 데려다 끔찍한 짓을 했다니. 이전에 대신전에서 열린 예배에 갔을 때 그분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난 그런 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어떻게 신을 모신다는 사제가 그런 짓을 하나. 그러니 그 꼴이 되는 거야!”

시장통에 모여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지나치던 부스스한 잿빛 머리칼의 사내, 이논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내내 가는 곳마다 모든 이들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제 아페토 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대해서였다.

“문제의 3공자가 마병단 명예단원으로만 남게 되었다지만 결국 아페토 가 전체가 모든 축제 일정을 취소하고 본저 방문객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니 그쪽이 진 게지.”

“결국 이긴 건 펠레타 공작뿐이네. 그 끔찍한 짓을 발견한 것도 마병단원들이라면서?”

마병단 이야기가 나오자 모여서 한마디씩 보태던 사람들의 얼굴에 이전과 다른 미소와 흥분감이 서렸다.

“으하하. 맞아. 평민 출신 단원들이 그 꼴을 발견했으니 귀족 나으리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나! 저택 문을 닫기로 한 것도 다 그래서가 아니겠어? 솔직히 속이 다 시원하더군.”

“그 집에 일하러 갔다가 죽어서 나온 하인이 어디 한둘인가? 이전엔 각성한 사람을 보면 괜히 좀 무서웠었는데, 마병단 때문인지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

“맞아. 저 윗집 엠버 씨네 딸도 각성자랬던가? 하하. 크면 나중에 마병단에 들어갈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 그러면 완전 출세하는 게지…….”

거기까지 듣고 난 뒤 이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허름한 시장에 어울리는 작은 과일 가게 앞이었다.

“레몬 둘.”

가게 안에서 열심히 상자를 나르던 주인 청년은 다짜고짜 레몬을 달라고 말하는 이논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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