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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37화 (137/805)

137화

‘숨긴 곳은 뻔해 보이는데… 다만 나한 혼자 이곳에 왔을 것 같지 않은 점이 마음에 걸리는군.’

나한의 환상 능력은 대단하지만 다수의 인원을 데리고 외부로 나가 탈출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분명 1명 이상의 동료가 근처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반면 유더의 동료인 에버와 가케인이 개인 임무를 마치고 약속 장소에 유더가 없음을 확인한 뒤 여기까지 오려면 아직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하통로 내부에 신호를 남겨 두고 오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시간이 걸리겠지.’

사실 혼자라 해서 그리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나한 같은 능력자를 상대로는 오히려 다수가 불리할 수도 있었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점이 있다면 키시아르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던 다치지 말라는 경고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임무가 아니라 그대들의 안전과 목숨임을 명심하도록.

“…….”

잠시 침묵을 지킨 유더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 떠오른 키시아르의 목소리를 떨쳐냈다.

‘이 상황에 무슨.’

어떤 상황이든 우선순위는 변하지 않는다. 각성자들을 찾아내 지키는 임무가 우선이고, 나한을 제압하고 벨트레일의 목숨을 살리는 건 다음이었다. 유더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각오를 다지자 낌새를 눈치챈 나한이 손을 앞으로 내밀어 제지했다.

“움직이지 마. 형제는 위험한 힘을 지녔으니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힘을 써야 하니까.”

“써 봐.”

망설이지 않고 숲 안쪽을 향해 계속 걸어가는 유더를 보며 나한이 인상을 찌푸린 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용감한 건지, 아니면 다른 수가 생긴 건지 모르겠군. 정 그렇게 말한다면…….”

그가 유더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면서 내뻗은 손에 힘을 준 순간 유더는 나한의 뒤쪽에 쓰러져 꿈틀대던 벨트레일의 몸이 축 늘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주변에 설정된 영역 범위 안에서 집중적으로 사용 중이던 힘을 거두었다는 증거였으며 바로 유더가 원했던 틈이기도 했다.

‘지금이다.’

유더는 그 즉시 몸을 낮추고 나한 쪽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발밑에 실은 바람의 힘이 용솟음치며 속도를 폭발적으로 배가시켰다.

놀란 표정을 지은 나한이 옆으로 피하면서 생긴 공간을 향해 뛰어든 유더는 그대로 쓰러져 있는 벨트레일 원로사제의 뒷덜미를 양손으로 꽉 잡고 바로 뒤쪽에 있던 지하통로 출구 안으로 굴리듯 던져 넣었다.

쿵!

벨트레일의 몸이 검은 통로 안쪽으로 굴러떨어진 것을 확인한 유더는 멈추지 않고 곧바로 다시 한번 방향을 바꾸어 숲 안쪽을 향해 달렸다.

‘환상 능력이 강력하기는 해도 결국 설정된 범위 내에서만 작용하는 힘이다. 범위를 바꾸는 사이사이에 짧아도 틈이 생길 수밖에 없어. 게다가 환상이라는 게 아무리 강력해도 당하는 이 모두에게 똑같이 작용하지는 못하지. 그게 네놈의 약점이다.’

유더와 나한은 동부에서 이미 서로의 힘을 어느 정도 겨뤄보았다. 그때는 나한이 힘을 사용하기 위한 영역을 변경하는 순간을 거의 눈치채지 못해 뜨거운 맛을 봤으나 이번은 달랐다.

유더는 그때의 경험으로 나한이 능력을 쓸 때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오는 아지랑이 같은 미세한 기운도 훨씬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한 또한 유더가 얼마나 가차 없이 환상을 뚫고 나올 수 있는지를 보았기에 이전보다 훨씬 경계가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토록 빠르게 환상을 깰 수 있는 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 또한 그만큼 강한 힘을 써야 하는데, 벨트레일 일행을 상대하느라 줄곧 힘을 써 왔을 나한에게 전처럼 제한을 풀면서까지 유더를 제압할 만한 힘이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숲속에 있을 각성자들과 놈의 동료들을 찾아내면 그때부터는 내가 더 유리해지지.’

지켜야 할 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힘을 쓰기 어려워지는 건 누구든 똑같다. 숲속에 있을 각성자 20명은 유더에게 반드시 지켜내야 할 존재이나 나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 중요했다.

그가 전처럼 함부로 환상을 보여주다가 유더가 아무 곳에나 힘을 난사한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건 그와 그의 동료들이 될 터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이 숲을 전부 뒤엎어 버리고 끝냈을 텐데.’

하지만 다치지 말고 오라던 누군가의 말이 자꾸만 신경 구석을 긁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이곳에 오기 전 키시아르가 보여준 지도가 아직 머릿속에 선했기에 유더는 길을 헤매지 않고 곧바로 기도소를 찾아냈다.

고대 양식을 본따 만든 아름다운 기도소 앞에 낯선 사내 두어 명이 어슬렁거리다 달려오는 유더와 나한을 보고 깜짝 놀라 물러섰다.

“누구… 나한?”

“그를 막아! 안으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돼!”

나한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했을 때 유더는 이미 땅을 박차고 바람을 한 번 밟으며 공중을 돌아 기도소 지붕 위에 올라선 뒤였다.

“호산라!”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나한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유더는 검으로 기도소 지붕에 달린 채광창을 거침없이 내리쳤다.

와장창!

태양신 문양을 형상화한 두터운 색유리가 순식간에 쩍 깨지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유더는 깨진 유리 틈으로 몸을 날렸다.

‘제대로 찾았군.’

땅에 착지하자마자 보인 광경은 제대로 목적지를 찾았음을 알려주는 모습들로 가득했다. 내부 가구를 전부 치워 버리고 만든 공간을 가득 채운 허름한 수레, 그리고 그 위에 힘없이 눕거나 웅크린 사람들이 큰 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낯선 불청객을 올려다보았다. 유더는 그들 중 몇 사람이 열에 들떠 헐떡이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발정기로 인한 열인가.’

대충 눈으로 세어 보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열 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

“저,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유더가 그들을 살피는 동안 개중 그나마 멀쩡한 듯한 각성자 한 명이 기침을 하며 물었다.

“우릴 구해 준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황제 폐하를 따르는 마병단 소속 유더 아일입니다. 당신들을 보호하고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습니다.”

유더의 빠른 답을 들은 이들이 그가 걸친 제복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병단…? 황제 폐하라니. 그러면 우릴 구해 준 사람들은 누구란 말이요?”

“그들은…….”

대답해 주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 밖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앞으로 나섰다.

“죄송합니다만 여러분과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오메가들을 말하는 거라면……. 발정기인 이들을 분리한다고 다른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말에 유더는 잠시 멈칫했다.

‘이곳에 있던 이들이 알파였군.’

제가 아직 제2성을 발현한 상태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었다. 발정기에 돌입한 알파가 몇 사람이나 곁에 있는데도 그들이 알파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여러분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들은 나그란의 별이라는 각성자 집단입니다.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어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절대로 따라가시면 안 됩니다.”

“나그란의 별……?”

“저는 오메가 분들을 데리러 갈 테니, 그 사이 누군가 들어온다면 소리를 질러 저를 부르십시오.”

유더는 말을 끝낸 뒤 신중하게 문 쪽으로 다가가 숨을 죽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속으로 셋을 센 뒤 문을 휙 열자 텅 빈 복도가 보였다. 유더가 방금까지 있던 큰 기도실 맞은편에 보다 작은 기도실이 하나 있었으나, 그곳에 있었을 이들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유더는 그곳으로 달려가 열린 문 뒤쪽에 또 다른 문이 있음을 파악하고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나한!”

“젠장, 왔다! 빨리 내보내!”

뒷문 밖으로 나간 유더의 눈에 몇 명의 사람들을 붙잡고 이동시키는 사내들이 보였다. 아까 기도소 밖에서 보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유더를 보자마자 앞을 가로막으며 비장한 얼굴로 검을 들고 나섰다.

“형제를 상대로는 나서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리도 시간을 끌어야 하니께……!”

“비켜.”

유더는 그들을 떨치고 사라진 이들을 쫓으려 했으나, 사내들이 휘두른 검에 맺힌 기운이 의외로 빠르고 유연하게 따라붙어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합을 맞추어 온 듯 익숙하게 양쪽에서 유더를 밀어붙였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 데다 검 실력 자체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검에 맺힌 푸른 기운만은 무시하기 힘들 만큼 위협적이었다.

유더는 곧바로 검을 들어 그들을 상대했다. 보통 검이었다면 상대가 사용하는 푸른 기운 앞에서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깨져나갔겠지만, 키시아르가 준 검은 과연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검기나 다를 바 없는 기운을 상대로도 아무렇지 않게 버티는 검을 보며 두 각성자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동요가 일었다.

“불하고 바람 같은 걸 쓴다더니, 왜 검도 이렇게 잘 쓰는 겨?”

“그 나한이 보통 형제가 아니랬잖어!”

“아무리 그래도…… 으억!”

아무렴 10년을 넘게 구르며 살아온 경험이 있는데, 너희 같은 초짜들에게 밀릴까.

유더는 대답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생각하며 빈틈을 노려 한 사내의 검을 강하게 쳐냈다. 뒤이어 두 사내의 검을 이루는 철을 향해 힘을 쓰자, 검 두 개가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휘면서 순식간에 무기로서의 기능을 모조리 상실했다.

“마, 맙소사. 인간이여?!”

“도망……허억!”

유더는 그들이 말을 끝내기 전 가차 없이 다리를 들어 머리를 돌려찼다. 무장이 해제된 두 사내를 기절시키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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