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36화 (136/805)
  • 136화

    “‘나그란의 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선 단어를 벨트레일은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별?”

    그는 벨트레일이 제가 말한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음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낙원이라는 뜻을 지닌 좋은 단어입니다. 낙원의 별들. 오로지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죠. 그리고 우리는 당신 같은 쓰레기를 가장 혐오합니다.”

    네가 별채 지하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모를 것 같은가? 남자의 온기 하나 없는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벨트레일은 그 순간 본능적으로 그 남자가 저를 죽일 생각임을 깨닫고 크게 떨었다.

    그가 벨트레일을 마지막으로 남긴 이유는 단순히 그가 원로사제이기 때문도, 신분이 높아서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사냥할 대상에게 보다 긴 공포를, 큰 고통을 주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아니야. 나는, 나는 단지, 연구를, 연구를 위해서 행동했을 뿐…….”

    “연구라…. 전신의 피를 각성자의 피와 바꾸어 각성자가 되는 방법을 찾으려 했던 그 구역질나는 연구? 아니면 발정기의 각성자가 당신 가문의 저주받은 피를 이어받지 않은 아이를 낳아줄 수 있는지 확인하려 했던 저주받을 연구를 말하는 건가? 너무 많아서 뭘 말하는지도 모르겠군.”

    존대를 거둔 남자가 얼음 같은 눈빛으로 벨트레일을 조롱했다.

    “그런 건 연구라고 하지 않아.”

    “으, 으악!”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의 주변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이 일어나 기어오기 시작했다. 벨트레일은 텅 빈 눈으로 달라붙는 보조사제들의 시체가 뻗는 손길에서 도망가려 몸부림쳤으나 다리가 땅에 달라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안 돼!”

    갈퀴 같은 손이 사지를 붙잡고, 피에 젖은 이가 살점을 물어뜯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참혹한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정신은 너무나 깨끗하기 그지없어 미칠 것만 같았다. 벨트레일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

    “아아아악! 살려 줘! 내,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이것들을 떼어 줘!”

    “당신의 실험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당신은 무시하지 않았던가?”

    남자의 느릿한 말이 고통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벨트레일은 울부짖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두 다 ‘축복받은 피’ 때문에 고통받는 가문의 아이들과 대의를 위해서였어! 태어나자마자 죽어가는 운명을 타고난 아이들을 위해 연구한 것도 죄인가!”

    “축복받은 피는 무슨. ‘저주받은 피’겠지. 진짜 축복이라면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그리 발악을 하며 피하려 했을까. 전부 다 너희들이 금지된 힘을 끝도 없이 욕심낸 결과가 아닌가.”

    “아아악!”

    놀랍게도 시체들에게 사지를 반쯤 먹혔는데도 벨트레일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물론 그를 뜯어먹는 시체와 고통이 모두 환상이기 때문이었으나, 어마어마한 고통과 공포로 가득 찬 벨트레일의 머리는 이미 그에 대한 의문조차 가질 수 없을 만큼 마비되어 있었다.

    “너희는 신의 힘을 욕심낸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형제들의 힘과 목숨마저 욕심내려 하지. 대의를 위해서라면 당신 같은 쓰레기를 치우는 쪽이 더욱 옳아.”

    벨트레일은 시체가 얼굴을 물어뜯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느라 남자의 냉정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지만 저에게 내리꽂히는 살기가 한층 강해졌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고함을 질러 애원했다.

    “안돼. 제발, 뭐든지 할게. 제발 살려 줘!”

    동정의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남자가 벨트레일에게 최후의 명령을 내리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죽…….”

    그 순간, 어디선가 낯선 힘이 남자를 향해 거세게 날아들었다. 남자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저를 노리는 힘을 피했으나, 덕분에 벨트레일을 죽이려던 시도는 완성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벨트레일의 뒤쪽 지하 통로로 향했다.

    “이런.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군.”

    “나한.”

    통로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더가 조용히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거기서 물러서.”

    “반가운 얼굴이군. 또 쓰레기를 구하러 온 건가, 형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저번에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검을 뽑아 든 유더의 차가운 대꾸에 나한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유더가 숨어 있었던 통로 쪽으로 흘긋 향했다가는 다시 되돌아왔다.

    “저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나? 그러면 이자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짓을 했는지도 들었겠지. 그런데도 또 날 방해하겠다고?”

    유더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나한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심경이 혼란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나한이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자가 아닐 듯하다는 짐작은 했었지만, 설마 여기서 나그란의 별이라는 말을 듣다니.’

    이전 생에 그는 나그란의 별이라는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카치안 황제가 본격적으로 제국 대내외 세력들에 손을 대 저를 따르는 힘을 늘리려 하던 시기, 각성자들을 모아 각국의 귀족과 왕족을 공격하려 했던 어느 테러집단이 계획을 진행하던 도중 내부분열로 인해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집단 이름이 바로 나그란의 별이었다.

    그때 집단 내에서 일어난 싸움 때문에 본거지가 위치했던 곳이 초토화되었지만, 다행히 남쪽 사막 근처라 일반인의 피해는 적었다.

    카치안 황제가 그 사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유더는 개인적으로 단원 몇 명을 파견하여 조사를 시키고 나그란의 별이 완전히 와해되어 다시 결집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로 일을 마무리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 뒤, 재앙의 시작이 된 거대한 지진과 땅 틈에서 모습을 드러낸 정체 모를 몬스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오랫동안 제국을 비웠다 돌아온 유더는 뜻밖에도 사교계를 떠도는 소문 사이에서 또다시 그 이름을 듣게 되었다.

    어느 현자가 수많은 추종자를 이끌고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타국의 왕과 귀족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그 추종자 단체의 이름을 나그란의 별이라 일컫는다는 소문이었다. 제국 귀족들 중에는 타국까지 가서 그를 만나고 온 이들도 더러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현자와 나그란의 별은 세력을 키워 거대한 종교집단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었다. 그쯤 되자 카치안 황제도 그 현자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태양궁에 모습을 드러낸 현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나는 늙고 현명해 보이는 노인 마법사 같은 외견을 지니고 있었다.

    현자는 금세 카치안 황제의 마음도 사로잡았으나, 유더는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그 뒤 오랫동안 몰래 조사하여 그가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지닌 각성자로, 과거에 사라진 테러집단 ‘나그란의 별’과 관련된 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더는 카치안 황제의 명으로 그를 죽였다.

    그 사건으로 유더는 많은 적을 만들었다. 현자는 죽었으나 그를 광적으로 따르던 이들은 여전히 곳곳에, 심지어는 마병단 내부에도 남아 있었다. 현자를 죽이라고 유더에게 명을 내린 카치안 황제조차 이후 의심병이 더욱 깊어져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으니 일을 하고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셈이었다.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은 대륙에 닥친 수많은 자연재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더는 그 이름이 실질적으로 가장 큰 재앙 중 하나였다고 여겼다.

    ‘이번 생에서는 절대 그런 사기꾼들이 나타날 여지조차 주지 않으려 했는데… 설마 그 전초전을 벌써 여기서 볼 줄이야.’

    유더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나그란의 별이란 이름은 여전히 종교집단을 연상케 하던 현자와 그의 추종자들의 이미지가 컸다. 때문에 그는 11년 전으로 되돌아온 뒤 일찍부터 나그란의 별과 관련하여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여겼다.

    아직은 만들어지지조차 않았을 집단이라 생각했기에 대충 마병단 활동을 하다 눈에 걸리면 즉시 미래의 현자가 될 놈을 때려잡아 끝내주겠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눈앞의 나한을 보니 어쩌면 그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그란의 별이 내 생각보다 훨씬 일찍부터 존재했던 집단이라면, 이전 생에서 일어났던 내부분열 사건도 그때 했던 조사로 파악한 게 다가 아니었을 확률이 높아.’

    이전 생에 유더가 파견했던 조사팀 단원들은 그들의 분열 원인이 귀족들과 손을 잡으려 한 세력과, 그들을 배척하려 한 세력 간의 싸움이었다고 말했었다. 모두가 그와 같은 마음이라면 각성자들을 우습게 보는 귀족들과 손을 잡으려 할 리 없겠지만, 사람이 여럿 모이면 어디서나 세력이 갈리게 마련이다.

    유더가 만났던 나그란의 별 추종자들 중 나한이 없었으니 유더는 그가 이전에는 나그란의 별이 처음 와해되었을 때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추측했다.

    ‘각성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라……. 취지만은 키시아르 못지않군.’

    그러나 가능한 한 모두를 살리려 하는 키시아르와,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죽이려 하는 나한은 너무나 달랐다.

    유더의 복잡한 속내를 짐작하지 못할 나한은 대답이 없는 이유가 제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라 여긴 듯, 일그러진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날 방해하지 마, 형제. 여긴 이미 내가 다 끝내 놓은 곳이니까. 남은 건 저놈뿐이야.”

    “으, 으으……!”

    나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벨트레일이 꿈틀거리며 신음했다. 유더는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갇혀 있던 각성자들은 어디로 빼냈지? 설마 벌써 내보내지는 못했을 텐데.”

    “글쎄. 어디에 있을까?”

    대답해 줄 기색이 보이지 않는 나한에게서 눈을 돌린 유더는 쓰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다수의 발자국과 수레바퀴 자국을 발견했다. 그 자국은 숲 안쪽으로 이어진 상태였다. 키시아르가 아페토 가 저택 부지 서쪽 숲속에 가묘와 기도소가 있다고 했으니, 다수의 사람을 숨길 만한 곳은 역시 거기뿐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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