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35화 (135/805)

135화

벨트레일은 즉시 편지의 주인에게 약속을 잡자는 뜻을 전했다. 답장은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 편지를 전달했던 하인을 통해 도착했다.

‘원로사제님의 고견에 크게 감탄한 바, 오늘 뵙고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오늘이라니. 이리 갑자기 멋대로 약속을 잡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대관절 무슨 소리인가 싶었으나 상대가 외국에서 온 사절이라는 사실을 이내 떠올리고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예의도 모르는 자 같으니.’

편지에 적힌 이야기는 몹시 구미가 당겼다지만, 벨트레일은 이리 갑작스러운 방문에 응해줄 만큼 한가한 이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가 아페토 본가에 찾아온다 한들 벨트레일이 만나주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로사제님. 편지를 가져온 하인이 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답을 바로 보내시겠습니까?’

‘됐다. 지금은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너도 별채 하인 중 하나였지? 밑으로 내려가 일을 돕도록 해라.’

펠레타 공작이 마병단을 이끌고 아페토 본저에 오기 전 별채 지하에 격리해 둔 실험체들을 모두 옮기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벨트레일은 곧 쓸데없는 일들에서 관심을 거두었다.

그러나 각성자 용병들을 앞세우고 실험체들과 하인들을 거느린 채 지하 통로를 걷고 있던 때, 별안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크아아악!’

야명석 이외에는 안을 비추는 빛이 아무것도 없는 통로 내부에서 갑자기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며 하인 한 사람이 쓰러졌다.

‘사람 살려. 내가, 내가 잘못했어! 다신 저놈들에게 손대지 않겠습니다! 안 돼!’

그는 미친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바닥을 기고 비명을 질렀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조용했던 통로 내부는 일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당장 조용히들 하지 못하겠는가?’

벨트레일은 일단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는 하인들을 조용히 시키고 몸소 쓰러진 하인이 있는 곳으로 나섰다.

‘네놈. 뭐 하는 짓이냐. 정신을 차리지 못할까!’

보조사제 한 사람을 시켜 쓰러진 하인에게 신성력을 불어넣게 하자 그는 겨우 정신이 든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겁에 질린 사람들을 돌아보다 벨트레일의 냉정한 얼굴에서 시선을 멈춘 하인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원로사제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살려 달라니. 네가 뭘 잘못했단 말이냐?’

‘제, 제가 원로사제님의 명을 어기고, 그간 저 각성자 놈들에게 손을 댔…… 커억!’

하인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별안간 다시 쓰러졌다. 이번에는 아무도 그에게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하인은 마치 거대한 손에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몸을 기괴하게 비틀다가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았다. 순식간에 스스로의 가슴을 찔러 절명한 하인은 아주 무서운 뭔가를 본 양 두 눈을 크게 흡뜬 상태였다.

‘이런. 너무 빨리 죽었군요. 이래서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충격에 빠진 사람들 속에서 갑자기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트레일은 그 말을 한 이가 제게 편지를 가져다준 하인임을 알아차리고 간신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하인이면 하인답게 당장…….’

‘이런. 손발을 벌벌 떨며 말해 봤자 전혀 위엄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원로사제님.’

하인, 아니. 낯선 사내가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벨트레일을 향해 악마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벨트레일은 그제야 그 사내가 제가 알던 얼굴이 아니라 아주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어두운 군청색 머리칼, 불로 지진 듯 시뻘겋게 뒤틀린 왼쪽 얼굴, 그리고 그와 달리 차갑고 수려한 오른쪽 얼굴. 허옇게 풀린 왼쪽 눈동자를 본 순간 오금이 저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분명 그는 처음부터 벨트레일 일행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그런 모습이었단 말인가?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 보아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벨트레일은 심지어 제가 기억한다고 믿었던 하인의 인상착의조차 확신할 수 없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 하인의 이름도, 얼굴도, 모두 누군가 기억을 지운 듯이 흐릿했다.

‘너, 넌. 대체. 누구…….’

‘제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끔찍한 흉터를 가진 남자가 한쪽 입술만을 끌어올려 낮게 웃었다.

‘어차피 이제 모두 여기서 죽게 될 텐데 말입니다.’

‘건방진 놈.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저놈을 해치워!’

벨트레일은 제가 남자가 내뿜는 기운에 짓눌려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황급히 각성자 용병들을 시켜 남자를 공격하라 명했으나 무슨 수를 썼는지 그들은 남자의 근처에도 가기 전에 갑자기 모습을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경악한 하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죽일 수가!’

‘애초부터 그 사람들이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드시는 모양이군요.’

‘마법인가? 아니면 각성자? 대체 어디서 온 놈이냐!’

남자는 대답 대신 출구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술래잡기를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모두가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남자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없으십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배워 보시죠. 어서 도망치지 않으시면 여러분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벨트레일은 조롱하는 남자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으나 보조사제들이 그의 팔을 부축하여 뛰기 시작했기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원로사제님. 저자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보통 놈이 아닌 듯하니 최대한 빨리 나가셔서 본가에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쪽이 우선입니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지하에서는 본가에 도움을 청할 수 없으니 일단 밖으로 나가야 했다. 벨트레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뛰는 낯선 경험을 했다. 아름다웠던 사제복 자락이 그토록 불편한 줄 처음으로 알았다. 거추장스럽게 달라붙는 무거운 옷자락을 움켜쥐고서 뒤뚱뒤뚱 달리는 동안 등 뒤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자꾸만 들려왔다.

그렇게 벨트레일은 마침내 출구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본래 목적지였던 서쪽 숲에 도달했다 하여 기뻐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게도 흉터를 지닌 사내가 먼저 도착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 유령이라도 만난 표정을 짓고 계시군요. 그래서, 술래잡기는 재미있으셨습니까?’

‘대체, 어떻게 먼저……?’

‘그토록 중요히 여겼던 당신의 실험체들조차 내팽개치고 달려가시는 모습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원로사제님. 제 생애 그보다 더 우스운 광경을 볼 일이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말이죠.’

그의 웃는 표정은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였다.

‘아니야!’

벨트레일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도리질쳤다. 그는 필사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저 악마를 쓰러트리고 자신을 지키라 외쳤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각성자 용병들이 사라졌고, 사제들은 남자가 손도 대지 않았음에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벨트레일은 마치 끔찍한 악몽을 꾸는 기분으로 쓰러져 격앙된 감정 때문에 올라온 피를 토했다.

분명 저자는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가 보낸 자이리라. 실험체들을 가로채고 방해가 되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마병단을 보낸 것임에 틀림없었다. 벨트레일의 절망에 가득한 머리는 남자의 정체를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 네놈이 가져왔던 편지도 처음부터 모두 거짓말이었던 거지? 나를 방심하게 만든 뒤 실험체들을 가로채려고……! 내 실험체들을 어떻게 했지? 지하통로에서 빼돌린 건가? 아니면 죽였나?”

“목숨이 아까워 버린 것들인데, 이제 와 어떻게 되었든, 그것이 뭐 그리 궁금하십니까?”

남자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벨트레일은 극도의 모욕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피 섞인 기침을 토했다.

“쿨럭쿨럭, 어차, 피… 그 실험체들을 확보한들 날 죽일 순 없을 거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나는 대신전의 원로사제 중 하나이며 아페토 가의 일원이다. 이번 일이 밝혀진다 한들 얼마든지 다시 다른 실험체들을 확보하여 연구를 계속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펠레타 공작은 이리 경솔하게 자신과 아페토를 적으로 돌린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벨트레일의 피 맺힌 저주를 들은 남자는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잠시 낮게 웃고는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잘못 알고 계시는 점이 몇 가지 있으니 일단 정정하고 가겠습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우선 저는 펠레타 공작의 수하가 아닙니다. 마병단은 더더욱 아니지요.”

“……뭐?”

남자가 무슨 말을 하든 절대로 믿지 않으려 했던 벨트레일은 순간적으로 그 생각조차 잊고 멍하니 반문하고 말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그들은 지금쯤 제게 선수를 빼앗긴 것을 깨닫고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뭐, 상관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넌 대체 누구란 말이지? 펠레타 공작의 수하가 아닌데 이 아페토 가 한복판까지 단신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바로 두 번째로 정정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남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벨트레일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벨트레일은 저도 모르게 몸을 필사적으로 뒤로 물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 다가오지 마!”

“‘우리’는 가능합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형제자매가 있는 한, 그들을 위해 어디든 가지요.”

“우…리라니.”

벨트레일이 힘겹게 반문하자 남자의 눈동자 속에 빛이 반들거렸다. 마치 그 질문만을 기다렸던 듯 기뻐 보이는 기색이었다.

“‘나그란의 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선 단어를 벨트레일은 알아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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