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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34화 (134/805)

134화

‘레블린이 알려준 단데니온의 능력은 눈이 마주친 상대의 몸을 굳게 만드는 것. 한꺼번에 전부 굳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했으니 에버를 상대로 이기기는 힘들겠지.’

에버라면 오랫동안 감금당해 약을 투여 당한 단데니온의 상태가 아무리 안 좋다 해도 충분히 설득하거나, 혹은 제압할 수 있을 터다. 그것이 키시아르가 그녀를 이 역할로 지정한 이유였다.

“지하에 남아 있는 증거가 생각보다 더 많으면 어떻게 할까 유더? 생각해 보니 나는 뭐가 더 중요한지 바로 판단할 수가 없잖아?”

기다렸다는 듯 가케인도 빠르게 질문했다. 유더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을 해 주었다.

“종이나 책, 아니면 칸나가 읽기 좋을 만한 소지품을 우선으로 해. 다 못 가져올 듯하면 나머지는 네 그림자 분신을 이용해 적당히 숨겨 두고.”

“종이라. 좋아. 알겠어.”

가케인이 제복 코트 안쪽에서 여러 번 접어 숨겨 두었던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주머니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사실 안에 들어간 물건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마법이 걸린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흰 지붕을 지닌 별채가 나타났다. 세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마주한 뒤, 일사불란하게 하인들이 이용하는 뒤쪽 입구로 향했다. 별채 부엌과 바로 이어지는 그 입구가 가장 침입하기 쉬운 통로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 이 또한 물론 레블린이었다.

‘매수해 둔 하인을 통해 오늘 이곳 문을 열어두겠다고 했었지.’

유더는 망설임 없이 작은 문 앞으로 다가가 고리를 당겼다. 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곧바로 열렸다.

‘부엌에 식료품이 그대로인데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으니… 역시 키시아르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었나 보군.’

유더는 바로 몇 시간 전에 설거지를 하여 정돈해 놓았을 법한 그릇더미와 과일, 곡식 등이 그대로 정돈되어 있는 부엌 곳곳을 둘러보았다. 흔적이 이리 선명한데도 하인들이 전부 보이지 않을 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지하에 갇혀 있는 실험대상 각성자들을 옮길 인원을 제외하고는 일부러 모두 내보낸 것이다.

‘혹시나 이곳에 온 키시아르의 시선을 끌까 걱정되어 이런 일을 했겠지만 덕분에 우리까지 일이 수월해질 줄은 몰랐겠지.’

키시아르는 아페토 측에서 별채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다 해도 3층에 갇혀 있을 단데니온만은 그대로 감금해 두었으리라 예측했다. 그는 실험대상이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벌을 받느라 갇혀 있을 뿐인 레블린의 호위였다. 누군가에게 들킨다 해도 거리낄 일이 없을 테니 그까지 숨길 이유가 없었다.

아페토 가의 인간들은 과연 그들이 키시아르의 손안에 여기까지 꽉 잡혀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유더는 에버와 가케인을 돌아보며 안쪽으로 들어가라는 고갯짓을 했다.

“…….”

세 사람 사이에 인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유더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간 에버와 가케인이 각각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한 뒤 부엌 문을 닫았다. 그가 향할 곳은 건물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있는 우물 옆 헛간이었다.

레블린이 그린 지도에 의하면 그곳이 바로 별채의 지하 통로 입구였다. 서슴없이 그곳으로 들어가 바닥을 살핀 그는 이내 주변에 쌓인 식료품 포대 사이로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을 발견했다.

그 주변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희미한 발자국들 사이로 피 냄새가 얼핏 느껴지는 듯도 했다. 유더는 심호흡을 깊이 한 번 한 뒤 문을 열고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어젯밤 이곳에 대해 말하던 키시아르의 설명이 머릿속에 아스라이 떠올랐다.

‘최종 목적지는 저택 부지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숲이 될 가능성이 높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으니 누군가의 눈에 뜨일 일도 없고, 가묘와 기도소가 마련되어 있어 사람을 숨기기 좋다고 여길 테니까.’

지하통로는 수레 하나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컸고 야명석이 박혀 있어 어둡지도 않았다. 본래는 새벽에 외부에서 아페토 가에 식료품을 전달하기 위해 이용하는 곳이라더니, 과연 목적에 걸맞게 잘 정비된 길이었다.

유더는 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했다.

‘우선 벨트레일 원로사제를 비롯한 사제들과 하인들을 발견 즉시 제압 후 기절시킨다. 그 뒤 붙잡혀 있는 각성자들을 데리고 이 통로로 돌아와 임무를 끝내고 왔을 에버, 가케인과 합류. 그 뒤 외부로 나가 대기 중인 펠레타 기사단과 접촉하면 끝.’

20인이나 된다는 각성자들을 끌고 가려면 아페토 가에서도 제법 많은 사람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 많은 이들이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 전 단신으로 순식간에 제압하려면 그만한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유더는 검은 장갑으로 감싼 제 손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상태는… 좋아.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러나 마음을 다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더는 문득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를 맡았다. 기분 탓인가 했으나 아니었다.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그 익숙하고도 짙은 냄새의 정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 수 있었다.

‘이건…….’

유더는 통로 한가운데 벌렁 나자빠져 죽어 있는 시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공포에 질린 표정을 그대로 드러낸 채 입을 벌리고 죽어 있는 이름 모를 남자는 가슴에 박힌 단검 손잡이를 꽉 쥔 상태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더는 즉시 앞을 향해 달렸다. 이후에도 몇 구의 시체가 더 그의 앞에 나타났다. 다른 시체는 전부 무시하고 달렸지만 흰 사제복을 입은 남자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는 그럴 수 없었다.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이전까지 본 다른 시체들과 조금 다른 자세로 죽어 있었다. 유더는 통로 벽에 기대어 죽은 사제의 사인이 벽에 머리뼈가 부서지도록 세게 박은 탓임을 알아차렸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시체의 어깨를 잡아당기자 딱딱하게 굳은 몸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피로 젖은 얼굴은 여태 보아 온 다른 시체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눈을 크게 흡뜬 채 입을 벌린 표정에서 극도의 공포감이 엿보였다는 뜻이었다.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채 죽어 있던 시체들. 사제는 스스로 머리를 박아 죽었지만 그 외의 이들은 전부 무기로 가슴을 찌른 채 손잡이 부분을 잡고 쓰러져 있었다.

이 모든 일이 과연 우연일까.

유더는 사제의 시체를 내버려 두고 다시 몸을 돌려 뛰었다. 더욱 확실해진 묘한 예감 때문인지 방금 전보다 심장이 더 크게 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쪽 숲으로 나가는 출구가 나타났다. 활짝 열린 출구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속도를 줄이고 기척을 죽인 유더는 벽에 붙어 몸을 숨긴 상태로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대체, 대체 넌 누구지? 펠레타 공작의 수하인가?”

제일 먼저 눈에 뜨인 장면은 큰 모자가 달린 망토를 뒤집어쓴 한 사내의 뒷모습과, 그 앞에 쓰러진 수많은 이들이었다. 유더는 쓰러진 이들 중 유일하게 상체를 세우고 절규 중인 한 명이 다름 아닌 벨트레일 샨 아페토 원로사제임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네, 네놈이 각성자인 줄 알았다면, 절대로… 나는……! 쿨럭…!”

이마가 찢어져 얼굴 반쪽이 피로 물든 벨트레일이 핏대를 세우며 절규하다 별안간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피가 섞인 기침을 하다 겨우 엎드려 숨을 헐떡였다. 그 모습을 미동 없이 바라보던 망토 쓴 사내가 그제야 낮게 웃으며 모자를 뒤로 넘겨 벗었다.

“각성자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 자신하셨던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영 재미가 없군요, 사제님.”

“…….”

그 차가운 목소리를 들은 순간 등골을 타고 저릿한 감각이 흘렀다. 유더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보았던 시체들 때문에 설마 싶기는 했으나, 그 설마가 현실이 된 광경을 보는 건 역시 조금 다른 문제였다.

나한. 동부에서 만나 여러모로 유더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사라진 환상 능력자가 아페토 본저 내에 태연하게 발을 딛고 선 채 웃고 있었다.

***

평생을 고귀한 원로사제로서 살아온 벨트레일 샨 아페토는 저를 짓밟은 채 웃고 있는 사내의 반은 일그러지고 반은 멀쩡한 끔찍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충격에 몸을 떨었다. 이 세상에 각성자란 존재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그들을 연구해 왔으며, 누구보다도 각성자에 대해 잘 안다 여겼던 그로서는 현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아까까지는 평범한 하인이었어. 능력을 쓰는 기색도 전혀 없었고 각성자 용병들도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저자는 대체 언제부터 내 곁에 잠입해 모두를 현혹시켰단 말인가……?’

벨트레일이 그 사내를, 아니. 그가 위장했던 모습의 하인을 처음 인식한 때는 아주 예전이었다. 별채와 대신전을 오고 가면서 그런 하인이 있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하인은 다른 평범한 하인들과 다를 바 없이 벨트레일을 두려워했고, 단 한 번도 주제넘게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런 하인이 이틀 전 벨트레일에게 편지 한 장을 전달해 주었다. 벨트레일을 통해 대신전에 연을 대기를 바라는 이들이 종종 본가인 아페토 가 쪽으로 편지를 보내곤 했기에 그 자체는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이 예상보다 조금 특이했다.

편지를 쓴 이는 자신이 이번 축제를 맞아 외국에서 온 사절이라 소개했다. 그는 벨트레일이 여태 발표해 온 각성자 관련 연구에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가능하다면 조만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정중히 요청했다. 레노어와 아페토 가를 벗어나서도 계속 연구할 길을 찾고 있던 벨트레일에게는 참으로 적절한 시기에 온 편지라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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