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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33화 (133/805)

133화

“세상에 이렇게 큰 저택이 다 있다니… 수도는 정말 대단하구나.”

“황궁은 더 커요, 에버 언니. 거긴 아예 벽 하나가 전부 궁인걸요.”

“정말? 상상이 안 가네.”

유더는 즐거워 보이는 에버와 칸나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오늘은 드디어 키시아르가 아페토 본저에 발을 디딘 중요한 날이었다.

본래대로라면 공작의 행차답게 수많은 이들이 그의 뒤를 따라야겠지만 키시아르는 유더를 포함해 칸나, 에버, 지미, 가케인, 엘더 남매까지 단 7명의 마병단원과 부관 나단 주커만만을 이끌고 이곳에 왔다. 공작의 공식 방문치고는 한없이 적은 인원수였다.

인원이 이리 적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아페토 가에서 키시아르에게 수행 인원수 제한을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굴욕을 주려는 얄팍한 수작이었으나 키시아르는 오히려 몹시 즐거워하며 직접 데려갈 사람을 뽑았다.

‘그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은 겉보기에 가장 위협적이지 않은 이들을 데려가 줘야겠군. 우리가 그곳에서 해야 할 일들을 위해서도 오히려 쉽게 보이는 편이 더 나을 테니 말이네.’

그렇게 해서 뽑힌 마병단원들은 자신들이 무슨 기준으로 뽑혔는지 모른 채 아페토 본저 내부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응접실에서 내려다보며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마치 실제 자연을 그대로 옮겨다 둔 듯 웅장한 정원은 어떤 면에서는 황궁의 정원보다도 화려해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공작가의 권세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들 다과를 잘 먹는군. 다 먹고 나면 얼마든지 다시 요청해도 되니 사양하지 말고 먹고 싶은 만큼 먹게.”

“그래도 되나요?”

응접실 중앙에 우아하게 앉아 단원들이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키시아르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바닥을 드러낸 과자 그릇을 보며 다정히 입을 열었다. 아쉬운 마음에 포크를 놓지 못하고 있던 지미가 반색하자 키시아르의 뒤쪽에 시립해 있던 나단이 질린 표정을 짓고 있는 아페토 가의 하인을 향해 손짓을 했다.

“새 과자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아페토 가는 키시아르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응접실에 안내한 뒤 1시간이 넘도록 방치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분노하여 화를 낼 상황임에도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과자를 먹고 정원을 감상하며 떠들어 대는 마병단원들 때문에 아페토 가 하인들의 표정만 시간이 갈수록 죽을상이 되어갔다.

‘이런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지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다들 참 알아서 잘해 주는군.’

유더는 응접실 내부를 뛰어다니며 기물을 아낌없이 파손하면서 놀고 있는 엘더 남매와 과자를 열심히 먹는 지미, 칸나와 에버 사이에 끼어들어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가케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을 방치 중인 아페토 공작이 지금쯤 얼마나 미친 듯 화를 내고 있을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키시아르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오늘따라 차 맛이 좋군.”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레블린이 그린 지도와 실제 건물 위치가 일치하는지는 모두 확인했나?”

찻잔으로 입술을 살짝 가린 키시아르가 느긋한 얼굴로 물었다. 유더는 칸나와 에버, 가케인이 서 있는 쪽에 위치한 거대한 창문을 흘긋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자마자 확인했습니다. 창문 위치가 저택 부지 전체를 파악하기 좋은 곳에 있더군요.”

“오. 과연 유서 깊은 아페토 공작가 본저다워. 손님 대접이 훌륭하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더의 태연한 대꾸에 키시아르가 낮게 웃었다.

“어제 전달한 계획은 모두 숙지했겠지?”

“물론입니다.”

“자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 해서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걸 기억해 두게.”

키시아르는 어젯밤 단원들을 불러 오늘 아페토 가에서 그들이 해야 할 임무를 설명했다. 아페토 가에서 최대한 빨리, 그리고 다양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일곱 명의 단원은 각각 다른 역할을 부여받았다. 유더는 그중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감금된 각성자 탐색 및 탈출 도움을 맡은 상태였다.

“저, 명하신 대로 새로운 과자를 가져왔습니다.”

그가 머릿속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동안 과자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을 든 하인이 쭈뼛대며 테이블로 다가왔다.

“와. 맛있겠다.”

지미가 입맛을 다시며 기뻐했다. 제2성 발현이 끝난 뒤 무섭도록 빠르게 키가 크는 중인 소년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왕성해진 식욕을 자랑하는 중이었다.

“아페토 공작께서는 아직 준비가 덜 되셨다고 하던가?”

키시아르는 과자 그릇을 놓고 재빨리 물러나려 한 하인에게 말을 걸었다. 하인은 부디 키시아르가 분노하여 그를 죽이지만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레 미리 명령받은 대답을 읊었다.

“예, 예……. 공교롭게도 몸이 좋지 않으셔서 준비를 끝내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신다 합니다.”

“그렇군. 그러면 나의 귀여운 임시단원 레블린 공자는?”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3공자의 이름을 애완동물 부르듯 하는 키시아르 때문에 하인은 그대로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3공자님께서도…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시어…….”

“1시간째 말이지.”

“예……. 몸이 약한 분이시라 어쩔 수 없이…….”

“흐음.”

키시아르가 한숨에 가까운 소리를 흘리는 순간 하인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페토 가에서 이런 답을 공작에게 한다면 당장 머리를 벽에 처박혀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도 요즘 공작의 주변에서는 그를 모시던 하인들이 중상을 입어 교체당하는 일이 무척 잦았다.

하인은 키시아르 또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나 돌아온 것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군. 기다릴 만큼 기다렸으니 내 쪽에서 직접 만나러 가는 수밖에.”

“……예?”

키시아르가 부드럽지만 반박할 수 없는 힘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바쁜 몸이네. 이 정도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으니 몸소 움직이는 수밖에 없지 않나.”

하인은 혼비백산하여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아페토 공작님께서 아직……!”

“내가 보러 온 건 애초에 아페토 공작이 아니라 내 단원이야. 다른 이들은 준비가 되거든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전하면 되겠지. 비키게.”

“공작님의 앞을 막지 마십시오.”

키시아르의 부관 나단 주커만이 가볍게 앞으로 나서서 길을 내자 키시아르가 성큼성큼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자 단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뒤에 일제히 따라붙었다.

“아, 아쉽네요. 조금 더 먹고 싶었는데.”

“언제 가시는지 기다리느라 좀이 쑤셔 죽을 뻔했어요.”

“이제부터 드디어 레블린 공자님을 찾으러 가는 건가요?”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예의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방금 전까지 늘어져 있었던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하인은 저도 모르게 그들의 기세에 밀려 물러나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아, 안 되는데…….”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텅 빈 응접실을 빠져나갔을 때, 펠레타 공작 일행은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긴급 사태였다. 하인은 황급히 보고를 위해 꽁지가 빠지게 달려갔다.

“나는 이대로 레블린을 찾으러 올라가겠네.”

응접실을 나선 키시아르는 앞만 보고 빠르게 걸으며 입을 열었다.

“위급 상황에서 신호를 남기는 법은 모두 기억하고 있나?”

“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임무가 아니라 그대들의 안전과 목숨임을 명심하도록. 그러면 곧바로 갈라져 움직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타난 계단을 향해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몸을 돌리자 나단과 칸나, 지미, 엘더 남매가 그의 뒤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유더는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 그대로 계속 복도를 걷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에버와 가케인이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은 레블린이 편지에 쓴 정보를 이용하여 교묘하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래로 내려갔다. 중간에 본채 입구를 나서기 전 한 하인과 마주칠 뻔했었지만, 옆방에 몸을 숨기고 새로 온 일꾼들인 척 떠들자 그는 이내 아무 의심 없이 그들이 있는 방 앞을 지나쳐 사라져 버렸다.

레블린은 분노를 잘 참지 못하는 공작과 레노어 때문에 아페토 가의 하인들이 상당히 자주 바뀌는 편이라 전했다. 그 덕에 아페토 가의 하인들은 못 보던 이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기척이 느껴져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본채를 나선 유더는 별채로 향하는 지름길 표식을 빠르게 확인하여 나아가면서 등 뒤의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별채에 도착하면 안에 사람이 있는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움직이는 건 그다음입니다.”

계획에 따르면 에버가 별채 3층으로 올라가 단데니온을 구출하고, 가케인은 지하로 내려가 각성자들의 흔적 및 증거를 찾기로 되어 있었다.

“알겠어요. 구출하면 곧바로 약속된 장소로 가서 합류한다. 맞죠?”

에버가 손가락을 드러낸 전투용 장갑 끝을 당기며 가볍게 반문을 던졌다. 특수한 몬스터 가죽으로 만든 그 청색 장갑은 이번 축제 기간을 앞두고 그녀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전용 보호구였다.

“맞습니다. 혹 단데니온이 말을 안 듣거든…….”

“눈이 마주치기 전에 빠르게 기절시키라고 했잖아요. 자신 있어요.”

에버가 웃으며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더없이 선량해 보이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누구도 그녀가 지닌 힘을 예상하지 못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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