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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32화 (132/805)

132화

‘어림없어. 단순히 건강한 자식은 내게 필요 없다! 에이셰스는 몸이 조금 약하다 해도 여태 한 번도 너희 같은 짓을 한 적이 없어. 혈통이 다르니 당연하겠지!’

‘아버님.’

레노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공작을 불렀다. 현 후계자이자 1공자 에이셰스 샨 아페토의 어머니는 아페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4대 공작가 중 한 곳인 타인 공작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레노어와 레블린은 그녀의 사후 아페토 공작이 재혼한 백작가 차녀의 소생이었다. 그 백작가도 그리 힘없는 가문은 아니었으나 공작가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아페토 공작은 사사건건 그 사실을 거론하며 레노어의 열등감을 자극하고는 했다.

‘가서 네 동생을 설득하거라. 그러지 못하면 네가 하던 일들 모두 접을 각오를 해!’

레노어는 공작에게 쫓겨난 뒤 곧장 레블린을 만나러 왔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의 동생을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후계자의 자리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되리란 생각이 그를 참게 했다.

그는 억지로 침착함과 다정함을 꾸며내어 레블린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너도 그자들이 흙발로 아페토 본저의 땅을 밟길 원하지는 않을 것 아니냐. 으응? 대체 펠레타 공작의 광대 집단에 불과한 마병단 따위가 왜 좋단 거냐. 펠레타 공작이 정말 널 마음에 들어 한 줄 알아?”

“…….”

“아니. 그자는 그저 아페토를 비웃을 생각으로 널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제발 정신을 차려라. 네가 원하는 거라면 형이 뭐든 들어줄 테니까. 응?”

레노어는 동생이 갖고 싶어 할 만한 것들의 이름을 마구 주워섬겼다. 그러나 검도, 보석도, 명마도 동생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인내심이 짧았던 레노어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맞이했다.

“젠장. 너 때문에 내가 아버님께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아? 네가 저지른 이 멍청한 짓 때문에 내가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면 너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 레블린!”

그가 집어던진 꽃병이 벽에 부딪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닥치는 대로 레블린 주위의 물건들을 때려 부순 뒤 숨을 헐떡이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놀랍게도 레블린은 아직도 겁을 먹지 않고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소년은 차가운 눈빛으로 드디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드디어 내가 아는 형이네.”

“뭐?”

“갑자기 친절한 척을 해서 이상했거든. 형이 그렇게 화를 참을 사람이 아닌데, 이제야 안심했어.”

레노어는 순간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너…….”

“그거 알아? 형이 말한 것들 중에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도 없어. 아버지도, 숙부도, 모두 마찬가지야. 하나같이 화만 내거나 바보 취급을 하며 가둬 두기만 하고,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지.”

“그러면 그 작자는. 펠레타 공작은 다르단 거냐?”

“그래. 다르셔.”

레블린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분은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걸 제대로 들어주셨거든.”

“하. 그래? 네가 원한다는 그게 대체 뭔데. 나도 들어나 보자!”

“난 이미 말했어. 몇 번이나.”

“말했다고? 네가 언제?”

레노어는 동생이 거짓말을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동생의 증오로 가득한 싸늘한 눈빛을 본 순간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말했잖아. 간절하게 매달려서 수도 없이 부탁했잖아! 기억하지 못하는 건 형이지 내가 아니야!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말고 가서 형이 그토록 원하는 후계자 자리를 얻을 궁리나 해!”

분노와 조롱 가득한 눈빛 앞에서 레노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블린이… 언제부터 저런 표정을 할 줄 알았었지?’

레노어의 기억 속 레블린은 언제나 곧 죽을 듯 죽지 않는 허약한 아이였다. 레노어는 그 불쌍한 동생에게 대개 무관심했으나 그래도 동복형제였기에 가끔은 내키는 대로 동정을 베풀었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어떠한가. 지금의 레블린은 조금도 약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느덧 레노어에게 칼을 들이댈 만큼 성큼 자란 상태였다.

그것을 깨달은 레노어가 깊은 충격을 받은 채 레블린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하인이 다급히 다가와 벨트레일 원로사제가 그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숙부님께서 나를 찾아? 그걸 왜 이제 말한단 말이냐? 멍청한 놈!”

레노어는 레블린 때문에 얻은 분노를 죄 없는 하인의 뺨을 날리며 푼 뒤 별채로 향했다. 별채 지하실은 이전에 왔을 때와 다를 바 없었으나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던 벨트레일의 표정만은 이전과 전혀 달랐다.

“공작님께서 결국 숙이신 이상 펠레타 공작이 여기 오는 결과가 바뀌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희도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공자?”

“무슨 대비 말씀입니까.”

“여기 있는 이들을 그러면 계속 두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주변을 돌아보는 벨트레일을 보고서야 레노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깨달았다.

‘난 또,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레노어는 그가 어려움에 빠진 자신을 도울 방안을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숙부가 꺼낸 말은 오로지 자신의 연구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살펴 달라는 요청뿐이었다.

‘이 상황에 어떻게 자기 생각만 저리 할 수가 있지?’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 일이 터진 직접적 원인이 바로 벨트레일 때문이었다. 벨트레일이 성화 나눔 행사에서 자리를 비우지 않고 레블린을 잘 지켜보았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터다. 그런데도 벨트레일은 반성은커녕 사제라는 이유로 책임에서 한발 물러섰고, 아페토 공작의 분노는 모조리 레노어가 뒤집어썼다.

그런데도 사과 한마디 없이 연구대상들을 펠레타 공작의 눈에 띄지 않게 숨기는 걸 도와달라고 바쁜 사람을 부르기까지 하다니.

‘애초에 내가 숙부를 도운 건 모두 미래의 후계자 자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지 않나. 내가 이리 어려운데 숙부는 그간 받은 도움을 갚으려 하기는커녕 제 연구만 생각하다니.’

불공평하다. 너무나 불공평했다.

‘내가 무너지면 나 혼자 끝나는 게 아니야. 내 덕에 지원을 받던 이 쓸모없는 연구도 함께 날아가는 거라고!’

“2공자?”

“네. 숙부님.”

레노어는 벨트레일의 부름에 답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가장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이들을 펠레타 공작이 오기 전에 옮기고 싶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소문을 듣자 하니 마병단에는 각성자의 기척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자도 존재한다고 합니다. 펠레타 공작이 그런 자를 데려와 이곳을 발견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 소문은 키시아르가 일부러 흘려보낸 이야기였으나 그들은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어찌 되기는. 불리해지면 또 내게 떠넘길 셈이겠지.’

한번 심기가 비틀리자 레노어는 자애로운 미소를 띤 벨트레일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졌다. 그는 숙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펠레타 공작은 내일 온다고 하니, 그 전에 하인들을 시켜 옮기도록 하지요.”

“외부로 아예 내보내면 안 됩니다.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평소와 달리 날카로운 답에 벨트레일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대신전 내부의 세력싸움에 닳고 닳은 눈치를 발휘하여 이내 젊은 조카가 저를 귀찮아하고 있음을 빠르게 깨달았다.

“…2공자. 제가 이 요청을 드리는 건 모두 공자를 위함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요. 저는 숙부께서 정말 저를 도울 생각이 있으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돕고 싶으셨다면 여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결과 하나 정돈 내셨겠지요.”

“섭섭한 마음 모두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끼리 의심하며 무너지는 것이야말로 바로 펠레타 공작이 바라는 바임을 아셔야 합니다. 3공자를 그들의 손에 넘기지 않도록 보호하고, 이곳을 지키셔야지요.”

벨트레일은 잔혹하고 이기적인 2공자 레노어를 사실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가 있어야 제 연구를 계속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똑똑히 알았다. 어쩔 수 없이 비위를 맞춰 설득해야 했다.

“그리고 연구도 현재 몹시 중요한 국면에 접어든 참입니다. 어제 이곳의 실험체 중 세 명이 발정기에 접어들었죠. 발정기에 접어든 각성자는 제2성이 발현되지 않은 각성자에게 강제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콜록, 콜록!”

평소보다 빠르게 말을 잇던 벨트레일이 갑자기 기침을 했다. 입을 가린 손을 떼었을 때 그의 흰 사제복 소매는 피로 곳곳이 물든 상태였다.

“……후우.”

그 모습을 보고 레노어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서 피를 토했지만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아페토 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페토 가의 ‘축복받은 피’는 가문을 떠나 일찌감치 사제가 되었던 벨트레일에게도 예외 없이 작용했다. 그 또한 에이셰스나 레블린처럼 어린 시절부터 지독하게 허약했던 사람이었다.

“…아무튼 이번엔 반드시 성과를 낼 테니 저를 믿어주십시오.”

사실 레노어는 벨트레일이 그런 몸을 타고났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연구에 몰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아무 이유 없이 숙부를 믿은 건 아니었다.

“내일 오전에 하인들을 보낼 테니, 그들이 오면 실험체들을 데리고 식료품 보급용 지하통로를 따라 서쪽 숲으로 가 계십시오. 거기라면 펠레타 공작이 마병단을 다 끌고 와도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레노어의 말에 벨트레일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성과를 내겠다는 말씀, 지켜 주십시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요.”

레노어는 그렇게 말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채를 떠났다.

아름다운 아페토 공작가 본저는 이후 내내 불안에 싸인 채 기묘한 침묵을 지켰다. 각 건물을 오가는 하인과 하녀들조차 평소처럼 밝은 표정을 짓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루가 지났다.

해와 나무, 그리고 불이 어우러진 문양을 새긴 말을 탄 펠레타 공작이 드디어 아페토 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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