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30화 (130/805)

130화

“저는 황금도, 보석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말하게.”

말끝을 흐리자마자 곧바로 부추기듯 대답한 키시아르를 향해 레블린이 긴장감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부터 소식을 들으며 흠모해 왔던… 마병단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마병단?”

키시아르는 그 말을 듣고 눈썹만 한 번 살짝 올렸으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뜻밖이었던 레블린의 요청에 여기저기서 급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산 또한 귀를 의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작가의 도련님이 마병단을?’

수도의 유력가 귀족들 중에는 여태 각성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무려 4대 공작가 중 한 곳인 아페토 가의 적자가 각성자임을 밝힌 것으로도 모자라 황제의 가장 가까운 신하이자 혈족인 펠레타 공작이 만든 마병단에 들어가고 싶다고 요청하다니. 귀족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마병단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놀랄 만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조금 놀랍군. 진심인가?”

“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레블린은 제게 다른 상은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는 이라 해도 오르 제국에서 대를 이어가며 계속된 황제와 4대 공작가 사이의 반목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레블린 샨 아페토는 아직 어린 소년이라 그런 정치적 문제를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키시아르는 그렇지 않으니 아마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일은 없을 터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좋네.”

하지만 키시아르 라 오르는 그런 짐작을 이번에도 손쉽게 뒤집어 버렸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겠지.”

“정말이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의 능력이 탐이 난 이유가 크네. 하지만 시험을 치고 들어온 단원들이 있는데 한 사람만 예외로 중간에 받아들이기는 좀 어려우니 다음 마병단 모집 시기까지 임시 단원으로 이름을 올리는 쪽은 어떠한가?”

레블린은 큰 목소리로 곧장 대답했다.

“저야 물론 정말 좋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

너무나 손쉽게 두 사람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나 버리는 모습을 보며 루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저리 쉽게 받아들여도 괜찮은 건가?’

“나 키시아르 라 오르는 지금 이 순간부터 레블린 샨 아페토를 마병단 임시 단원으로 받아들임을 이곳에서 선포한다.”

“우, 우와아아아!”

루산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이 뒤늦게 키시아르의 선포를 들으며 환호를 보냈다. 방금과 비교하면 다소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키시아르가 놀라운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입니까!”

그러나 놀람과 환호의 시간은 짧았다. 신전 안쪽에서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원로사제 벨트레일의 고함으로 인해 광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타난 벨트레일은 펠레타 공작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조카인 레블린에게로 곧장 다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페토 가의 적자가 이게 무슨 꼴입니까, 3공자? 각성자에 마병단이라니. 제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요?”

“숙부님. 저는…….”

“오, 벨트레일 샨 아페토 원로사제. 오랜만에 보는군.”

레블린이 잔뜩 굳어 무어라 대답하기 전, 키시아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인사를 건넸다.

“사건을 책임져야 할 이가 자리를 비웠다기에 어떤 급한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 참으로 궁금했는데 건강해 보여 기쁘네.”

본래대로라면 타인이 대화를 나누던 중 끼어드는 행위는 예의에 몹시 어긋나는 태도였으나, 펠레타 공작인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그를 억지로 못 본 척하려 했던 벨트레일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입술을 비틀며 고개를 숙였다.

“…네. 설마 전하께서 이곳에 몸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저도 참으로 기쁩니다.”

“그렇지. 나도 이곳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네. 아까까지만 해도 저 풍요의 언덕 위에서 사절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곳에서 큰일이 벌어진 듯 난리가 나지 않겠나? 그 길로 달려와 보니 자네의 훌륭한 조카 덕분에 다행히 사상자 없이 조기에 일이 해결되었다더군.”

키시아르가 광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언덕 쪽을 살짝 가리켜 보이며 웃음을 흘렸다.

“다행한 일이었지. 레블린이 지닌 능력이 없었다면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 뛰어난 능력을 지닌 데다 겸손하기까지 한 조카를 두어 얼마나 기쁜가.”

“전하. 아무래도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벨트레일은 키시아르의 옆에 선 레블린을 노려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간파하여 곧장 도움을 청하러 신전에 갔었는데, 그사이 빠르게 해결이 되었다니 그것은 저 또한 무척 기쁩니다. 하지만 3공자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이해할 수 없단 말인가?”

“제가 아는 바로 3공자는 각성자가 아닙니다.”

벨트레일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키시아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무슨 소리인가? 그는 스스로 각성자임을 인정하였어. 그가 능력을 쓰는 모습을 이곳의 많은 백성들이 보았네.”

“다른 이가 사용한 능력을 본인이 쓴 것이라 거짓말을 한 것이겠지요. 3공자는 어린 시절부터 몸이 좋지 않은 탓에 간혹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는가?”

억지를 부리는 벨트레일을 보며 키시아르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속에 숨은 뜻을 눈치챈 다른 이들은 아무도 웃지 못했다.

벨트레일은 귀족들이 흔히 사용하는 정치적 화법 중 하나를 사용한 상태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힘을 지닌 귀족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면 공식적으로는 정말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 즉 벨트레일은 키시아르의 앞에서 레블린이 각성자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덮어 버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벨트레일을 비롯한 공작가의 일원들이 얼마나 펠레타 공작을 우습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발언에 여러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병단을 만든 이래 이미지가 조금 달라지고 있기는 하다지만, 그래도 펠레타 공작은 옛날부터 ‘하자품’이란 소문으로 더욱 유명한 존재였다.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 나선 이는 레블린이었다. 숙부와 키시아르 사이에 끼어든 소년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었다.

“숙부님. 저는 각성자가 맞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병단원이 되었고요. 펠레타 공작님, 아니. 단장님께서 몸소 허락해 주셨는데 왜 부정하려 하십니까. 제가 가진 힘으로 사람들을 구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 아닙니까?”

“3공자.”

벨트레일이 싸늘한 얼굴로 레블린을 불렀다.

“현명하지 못한 발언은 그만두고, 아페토 공작님과 2공자를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숙부님도 제가 각성했을 때……!”

“아무래도 몸이 다 낫지 않았는데 혼자 행사에 참석시킨 게 악영향을 미친 모양이니 집에 돌아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빠르게 레블린의 말허리를 자른 벨트레일이 손짓을 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건장한 기사들이 소년의 어깨를 붙잡았다.

“숙부님!”

“3공자를 아페토 본저로 모셔라. 어서.”

레블린이 기사들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

“레블린. 사고를 수습하느라 지쳤을 테니 지금은 일단 돌아가게.”

“단장님……!”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가 이미 내 단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네. 이리 많은 이들이 보지 않았나. 추후 다시 연락할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서 쉬고 있도록.”

말은 레블린에게 하는 듯했으나 그의 붉은 눈동자는 벨트레일 원로사제의 얼굴에 고정된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중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레블린은 감격하여 울 듯한 표정을 지은 채 꼭 연락을 달라는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기사들에게 이끌려 사라졌다.

“…꼭 이렇게 하셔야겠습니까.”

“원로사제야말로 나와 마병단을 좀 오해하는 것 같아 슬프군.”

레블린이 사라진 뒤 벨트레일과 키시아르 사이에는 거칠 것 없는 찬바람이 불었다. 표정은 모두 웃고 있었지만 눈은 서릿발이 불 듯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 일은 아페토 공작님께 곧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그대가 오늘 행사에서 일어난 사고를 어찌 수습하여 제대로 책임을 지는지 지켜보도록 하겠네.”

“…….”

그 말을 듣고서야 겨우 성화 나눔 행사에서 일어난 사고를 수습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다시 떠올린 벨트레일 원로사제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잊고 있었나 보네. 사고 따위보다 조카가 각성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이 더 급하셨나 보지?’

그 모습을 지켜본 루산은 그의 머릿속에 저와 같은 평범한 이들은 전혀 들어있지 않음을 새삼스레 느끼며 코를 씰룩였다.

“내 단원이 헌금함 안에서 이것을 찾아내어 파괴했네. 유일한 증거품이지.”

키시아르가 손에 쥐고 있던 금이 간 마정석을 보란 듯 가볍게 들어 올린 뒤 벨트레일에게 건네주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행사를 망치고 신성한 축제 주간을 어지럽혔는지 꼭 찾아내어 벌해 주기를 바라네. 이 사건은 단순히 작은 사고가 아니라 외국 사절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대담한 도발 행위니 말이지.”

그러니 태양신 신전의 명예를 걸고 꼭 해결해 주길 바라네. 더없이 상냥한 말투였으나 그 말을 듣는 벨트레일의 표정에서는 점점 더 웃음이 사라져 갔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물러남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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