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29화 (129/805)

129화

“단장님.”

존재 자체만으로도 광장 전체가 일시에 조용해질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펠레타 공작을 향해 헌금함을 박살 낸 마병단 사내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펠레타 공작이 곧 마병단 단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작스레 사고가 일어났습니다만, 다른 각성자의 도움으로 원인을 발견하여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고라고?”

“헌금함 안에… 이런 것이 들어있었습니다.”

검은 머리 사내에게서 붉은 마정석을 받아든 펠레타 공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루산은 펠레타 공작의 차가운 눈빛이 저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사상자는?”

“없습니다.”

“…이곳에도 분명 책임자가 있었을 텐데. 행사 책임자는 어디에 있나?”

“책임자이신 벨트레일 샨 아페토 원로 사제님은… 공교롭게도 사건 발생 직후 자리를 비우신 듯합니다.”

자리를 비웠다고 표현했으나 그것이 곧 도망쳤다는 뜻임을 모를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래…. 유감스럽군.”

키시아르가 텅 빈 원로사제의 자리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그의 등 뒤에서 뒤늦게 허둥지둥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왔다. 높은 계급임을 나타내는 금색 견장을 두른 제국군 장교들과 그들이 이끄는 병사, 그리고 타국에서 온 사절들이었다.

“공작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먼저 가시면 위험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꽃을 받으러 온 평민 신도와 루산 같은 사제들은 물론이고, 행사 치안에 도움을 주기 위해 파견된 제국군 일반 병사들도 아직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으나 장교들의 시선은 그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오로지 키시아르가 다쳤을까 전전긍긍하는 장교들을 보며 루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기대도 안 했어…….’

루산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어쨌든 사고에도 불구하고 다치거나 죽은 이는 없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정작 키시아르의 반응은 달랐다.

“사건은 이미 마병단에 의해 종료되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나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먼저가 아닌가?”

“예, 예? 아. 네. 맞습니다. 그렇지요.”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란 장교 한 명이 그제야 키시아르의 눈치를 보며 몸을 돌리고는 뒤따라온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 뭘 하는 게냐. 내가 가만히 있다고 너희들까지 그러고 있으면 공작 전하께서 어찌 생각하시겠어? 당장 쓰러진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부상자는 이송시켜!”

마치 모든 것이 저 때문이 아니라 모두 다 우둔한 병사들 때문이라는 양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가 웃음이 나올 만큼 노골적이었다. 루산은 나이 든 사제들에게 괜스레 야단을 맞던 저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병사들이 광장 곳곳을 향해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겨우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그래서… 이것이 헌금함 안에 있었단 말인가?”

“네.”

“장난치고는 꽤 질이 나쁘군. 이게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각성자는 누구지? 얼굴을 보고 싶군.”

병사들이 사람들을 돕는 동안 키시아르는 한시도 쉬지 않았다. 그는 검은 머리칼의 마병단 사내가 내민 붉은 마정석을 햇빛에 비추어 보며 살핀 뒤 좀 더 자세한 상황 파악을 위해 몸소 움직였다.

“저쪽에 계신 분입니다.”

검은 머리 사내가 지목한 아페토 가의 소년을 본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가까이 데려오라 명했다. 소년은 비록 기력이 다하여 쓰러져 있었으나 기절하지는 않았기에 병사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키시아르의 앞에 올 수 있었다. 소년이 걸친 하얀 케이프를 본 키시아르가 붉은 눈을 내리깔며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움을 주었다던 이가 설마 행사 참가자였을 줄이야. 어느 집안의 자제인가?”

“아페토 가의… 레블린 샨 아페토라 합니다.”

소년이 창백한 얼굴로 공작의 앞에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당장 쉬게 해 주어야 함이 옳음을 아나, 아무래도 상황을 확실히 파악하고 싶네.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이 행사를 담당하는 벨트레일 샨 아페토 원로사제와는 어떤 관계인가.”

“그분은 저의 숙부님이십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도움을 준 이가 모든 이들을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도망친 원로사제의 조카였다는 사실에 주변이 가볍게 술렁였다.

“그렇군. 내 단원은 자네가 각성자의 힘을 발휘하여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던데, 그것이 정말인가?”

레블린은 이전처럼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는 각성자입니다.”

“허어, 세상에.”

“공작가에서 각성자가……?”

이전보다 더욱 큰 술렁임이 광장을 메우기 시작하며 모두의 시선이 키시아르와 레블린에게로 쏠렸다.

“흥미롭군.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지?”

“공작님께서 궁금해하실 만큼 대단한 능력이 아닙니다. 그저 제 목소리를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 직접 전할 수 있는 능력이라…….”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하는 레블린을 보자 루산은 아까 보았던 것이 제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목소리를 전하는 능력이라. 그래서 그런 소음 속에서도 말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나.”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충분히 뛰어난 능력이니 스스로를 폄하하지 말게. 그 힘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을 테니.”

“가, 감사합니다.”

레블린은 성화를 나누어 주던 도중, 헌금함 쪽에서 갑자기 작은 폭음이 들렸고 이후 끔찍한 소음이 울려 퍼졌노라 진술했다.

헌금함은 꽃을 받으러 온 이들이 자유롭게 돈을 넣을 수 있도록 단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둔 상태였다. 그의 위치가 우연히도 헌금함에서 가장 가까운 쪽이었기에 모든 이가 그 설명에 딱히 의심을 품지 않았다. 루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장님. 남아 있는 이들의 상태를 모두 확인했습니다. 너무 놀라 기절한 사람 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만큼 멀쩡합니다.”

그때, 제국군 병사들보다 한발 먼저 나서서 쓰러진 이들을 살피러 갔던 나머지 마병단원들이 돌아와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키시아르에게 큰소리로 보고를 했다.

“청력에 문제가 생긴 이는 없나?”

“네. 소리가 끊긴 뒤에는 곧바로 청력이 회복되었고 후유증 또한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보고를 들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마병단이 또다시 모두를 구했다! 마병단 만세! 펠레타 공작 전하 만세!”

그 모습은 마치 축제 첫날 있었던 대행진의 날을 연상케 했다. 수도에 사는 모든 이들은 아직도 그날 마병단이 해치운 흉수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만세를 외친 이도 그 일을 떠올리고서 소리를 질렀을 터였다. 그가 반복해서 크게 만세를 외치자 거기에 이끌린 것처럼 사람들이 환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와아! 만세!”

“펠레타 공작님이야말로 제국의 진정한 영광이시다!”

개중에는 소수지만 레블린과 아페토의 이름을 외치며 박수를 치는 이도 보였다. 도망쳐버린 원로사제 때문에 반감을 살 뻔했던 아페토의 이름은 레블린 덕분에 다행히 더럽혀지지 않았다.

성화를 받은 이들은 레블린과 키시아르, 그리고 마병단원들을 향해 자신들이 가진 꽃을 아낌없이 던졌다. 비록 난리통에 짓밟힌 꽃이 다수였지만 키시아르는 평민들이 던진 꽃이라고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중 한 송이를 발치에서 주워들며 미소를 지었다.

시든 꽃을 들고도 우아함과 당당함을 조금도 잃지 않은 그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던 이들이 곧 벅찬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댔다.

‘뭐지. 이 기분은.’

그간 성화를 키우느라 죽도록 고생했던 루산은 키시아르의 그 모습을 보며 난생처음 코끝이 조금 찡해지는 경험을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명과 공포가 가득했던 광장이 순식간에 전혀 다른 의미의 외침으로 가득 찬 광경이 낯설다 못해 신비롭게까지 여겨졌다.

“보이는가? 이곳의 수많은 이들이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은 모두 적절한 순간 용기를 내어 나선 자네의 덕이다.”

환호 속에서 키시아르가 레블린 샨 아페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병단장으로서 직접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군.”

“아닙니다. 저는 직접 한 일이 없습니다. 일을 해결한 분은 공작님께서 이끄시는 마병단이니 칭찬은 부디 그분들께 돌려주심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레블린은 공작의 칭찬과 제게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도 전혀 교만하게 굴지 않았다. 그 나이대 소년다운 미소는커녕 도리어 아직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굳어 있는 표정을 보며 사람들은 더욱 큰 박수를 보냈다.

“그럴 수야 있나. 받은 은혜에는 반드시 답을 해야 하는 법.”

겸손하고 영웅다운 모습을 보여준 소년을 돌아보며 키시아르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손을 내밀었다.

“레블린 샨 아페토. 자네의 용기와 능력에 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무엇이든 말하라. 펠레타 공작의 이름으로 들어줄 테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레블린이 고개를 저었으나 키시아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네가 황제 폐하의 백성들을 지켜냈으니 이것은 곧 폐하의 의지이기도 하다. 옳은 일을 하고도 상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겠지. 자네는 폐하와 나를 부끄럽게 만들 셈인가?”

“아닙니다.”

몇 번 옥신각신한 끝에 결국 진 쪽은 레블린이었다. 사람들은 저 대단한 소년이 대체 상으로 무엇을 받고 싶다 말할지 궁금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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