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루산이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아페토 가 소년의 금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괜찮…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신성력은 상처뿐만이 아니라 지나친 긴장 완화에도 효과가 좋아요.”
“네?”
그 말에 소년이 겨우 딱딱한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웃을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 루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신성력을 약간 발해 그의 몸에 흘려보냈다. 신전 앞 광장에 내리쬐는 밝은 햇살이 신성력이 내뿜는 빛을 가려준 덕에 누구도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잠시 후 소년의 흰 뺨에 혈색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 루산은 끈을 모두 묶은 척 손을 떼어냈다. 스스로 생각해도 감탄스러울 만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이제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기대도 하지 않았던 감사 인사가 돌아온 바람에 루산은 조금 놀랐다.
“방금 베풀어 준 은혜, 꼭 갚을게요. 정말 고마워요.”
‘어?’
“루산!”
그때, 다른 수련사제들이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앞쪽에 서 있는 루산을 향해 나이 든 사제가 고함을 쳤다. 루산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느라 방금 들었던 말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방금 그 말,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던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겠지?’
성화를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대신전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화 ‘글린’에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성력이 깃들어 있었기에, 받아가서 방 안에 꽂아두기만 해도 어느 정도 치유 효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천금 같은 기회를 얻고자 온 가난한 평민들이 간혹 지나치게 흥분하여 행사를 망친 적도 있었다지만, 이제는 치안 유지를 위해 파견된 이들 덕분에 그런 걱정은 없었다.
“루산. 저기 봐. 올해는 제국군 말고도 마병단에서 사람이 왔대. 저기 검은 제복 보여?”
루산의 곁에 서 있던 동료 사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말대로 제국군 사이에 검은 제복 차림의 낯선 이들 몇 명이 섞여 있었다. 루산 또한 수도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은 바 있어 마병단이 어떤 곳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각성자란 말이지?’
고작 다섯 명뿐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몹시 무섭고 강해 보였다. 다양하게 생긴 무기를 지닌 탓에 더 그렇게 보이는 듯도 했다. 성화를 받으러 온 이들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단상에 올라 꽃을 받는 이들의 태도가 작년보다 훨씬 얌전하고 다소곳했다.
“원로사제님께서 오셨다.”
행사 담당 원로사제인 벨트레일 샨 아페토는 그 누구보다도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행사 준비를 하느라 애쓴 이들에게 칭찬 한마디 없이 자리에 앉은 그는 약간 피로한 기색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하나도 안 도와줬으면서 나중에 나타나 준비를 이따위로 했느냐고 혼을 내는 사람보다야 낫긴 한데, 그렇다고 저런 태도가 좋은 것도 아니지.’
그 오만한 태도에 화가 난 듯 다른 사제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루산은 자연스럽게 아까 그가 도와주었던 아페토 가의 소년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같은 가문 출신임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닮았지만 풍기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확실히 그 소년에게는 일반적인 귀족답지 않은 면모가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지? 내가 가족이 없어서 모르는 건가?’
모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성화 나눔 행사는 예정대로 잘 진행되어 갔다. 애초에 특별한 힘이 필요하지도, 외워야 할 기도문이나 예식 순서 없이 그저 꽃을 나누어 주기만 하면 끝인 간단한 행사였다.
그러나 꽃이 절반 정도 소진되었을 때, 사건은 갑작스레 일어났다.
- 삐이이익!
“으아악!”
“무, 무슨 일이야?”
갑자기 귀가 찢어질 듯 강렬한 소리가 광장 전체에 크게 울려 퍼졌다. 도무지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소리에 순간 귀가 먹먹해지며 머리가 아찔해졌다. 루산은 귀를 틀어막으며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향해 신성력을 썼다. 신성력의 따스한 빛이 몸을 감싸자 겨우 어지럼증이 조금 사라지며 정신이 들었다.
“…….”
그의 눈에 비친 풍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무료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던 행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귀를 틀어막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지고 비명을 질러 댔지만 루산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삐익거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너무 큰 탓에 바로 옆에서 지르는 고함조차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게 뭐야.’
루산은 혼비백산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에 있던 동료 사제들 중 몇 명은 귀를 막은 채 쓰러져 꿈틀거렸고, 누군가는 신전 안쪽으로 도망을 쳤다. 단상 위에서 꽃을 나누어 주던 귀족 자제들은 대부분이 귀를 막고 쓰러져 울거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질러대는 중이었다.
‘이 저주받은 소리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만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소리를 내는 원인이 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신이시여…….’
태어난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을 가득 담아 신을 부른 루산이 비틀거린 순간, 누군가 그의 팔을 강하게 잡아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었다.
“가, 감사…….”
들리지 않을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든 루산은 저를 도와준 이가 검은 제복을 입고 있음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마병단?’
검은 제복에 검은 머리칼, 검은 장갑까지 합하여 마치 밤의 어둠을 빨아먹고 나타난 듯한 인상의 사내는 그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사람의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루산을 본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 입을 열어 말을 했다. 하지만 당연히도 귀에 들려온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
그러자 다시 한번 입을 연 남자가 이번에는 입 모양을 읽을 수 있도록 아주 크고 천천히 말을 했다.
‘원로사제는?’
아. 루산은 그제야 이 사태를 확인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바로 원로사제였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까 전까지만 해도 원로사제가 앉아 있었던 자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저기 있었는데…… 설마 사람들을 전부 두고 도망쳤어?’
기가 막혔지만 일단 마병단 사내에게 답은 해 주어야 했다. 숨을 헐떡대며 텅 빈 자리를 손짓 발짓으로 가리키는 루산을 본 마병단 사내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행히 어떻게든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를 찢는 소음이 머리를 아프게 파고드는 와중임에도 그는 놀랄 만큼 침착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귀가 들리지 않는 분은 아닌 듯한데.’
그때였다.
루산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불쑥 파고들었다.
- 헌금함!
“네?”
루산은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소음도 여전히 건재했다. 설마 환청을 들은 것인가 싶었으나 옆에 서 있는 마병단 남자를 본 순간 착각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방향에는 모두가 도망친 단상 위에 비틀대면서도 홀로 서 있는 단 한 명의 귀족 소년이 있었다.
아페토 가의 소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귀를 막은 채 루산과 마병단 사내,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무어라 입술을 벙긋거렸다.
- 처음에 헌금함 쪽에서 작은 폭음을 들었습니다!
- 이 목소리가 들리는 분은 부디, 그곳으로, 어서…….
루산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각성자’라는 이들이 능력을 쓰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나고 자란 신전에서 각성자를 보기란 힘든 일이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소리가 바로 말로만 들었던 그 기이한 능력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몇 번인가 마법사들의 마법을 볼 때 느꼈던 감각과는 전혀 달랐다. 그건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른 이들도 루산과 같은 생각을 한 듯, 귀를 막고 괴로워하던 와중에도 얼빠진 얼굴로 단상 위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산은 제 팔을 잡아주고 있던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떨어져 나가는 감각을 느끼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검은 머리의 마병단 사내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고 보라색 천으로 덮은 헌금함 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 맞아. 헌금함 쪽이라고 했는데……!’
안에 무엇이 있을 줄 알고 저렇게 망설임 없이 뛰어간단 말인가. 기겁한 루산이 뒤따라 달려갔으나 남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헌금함 앞에 도달했다.
“잠깐……!”
귀를 찢는 고음 속에서 남자가 헌금함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루산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안돼……! ……어… 어어……?”
“…….”
“아…….”
믿을 수 없게도 헌금함이 두 동강 나는 것과 동시에 소음이 그대로 멎었다. 루산은 제가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던 도중 어색하게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귀를 막고 웅크려 있던 다른 사람들도 갑자기 사라진 소리에 놀라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었다. 마병단 사내는 자신에게 몰린 시선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듯한 침착한 태도로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부서진 헌금함 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잔해 속에서 금이 간 붉은색 마정석을 끄집어냈다. 모두가 그의 움직임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바라보는 동안,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다급히 말을 타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태양신의 현신이라는 묘사가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사내가 찌푸린 얼굴로 아수라장이 된 광장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루산은 그를 며칠 전 대예배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바로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