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27화 (127/805)

127화

“…알겠습니다.”

“그 외의 더 자세한 사항은 지금 말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으니 좀 더 확실히 정해진 뒤 알려 주지.”

“네.”

유더는 이것이 대화의 끝임을 깨닫고 다 먹은 케이크 접시 위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키시아르의 얼굴 위에 약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깨끗이 먹었군. …역시 단 걸 좋아하는 게 아닌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딱히 재미있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키시아르는 무엇이 웃겼는지 입술에 힘을 주어 꾹 다물었다.

“알겠네. 나가 보게.”

“네.”

유더가 단장실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단 주커만이 교대하듯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오자마자 키시아르에게 건네준 물건은 특수한 방법으로 밀봉된 보고서 및 편지였다.

“어디서 온 것들이지?”

“제국군 내 동향 보고서가 둘, 하르탄에서 온 편지가 하나, 그리고 맨 위에 둔 것은 펠레타 성에서 온 편지입니다.”

키시아르는 자연스럽게 밀봉을 해제하고 순식간에 모든 내용을 읽었다.

얼마 전부터 제국군 내에서 뭉치기 시작한 각성자 일반 병사들 때문에 상부가 슬슬 경계심을 키우고 있다는 소식, 공작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아도 시킨 대로 열심히 영지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이들의 보고, 그리고 그의 충실한 펠레타 기사단들이 전 대륙에서 수행 중인 일들이 그 작은 몇 장의 종이 안에 모두 적혀 있었다.

“다들 잘해 나가고 있군. 하르탄에서 일어난 일을 디아카도, 아페토도 눈치채지 못한 게 확실해졌으니 한동안은 더 손을 쓰지 않아도 괜찮겠어. 나단 네가 잘해 주었다.”

“눈속임이야 저희가 항상 하던 일 아니겠습니까.”

가볍게 대답한 나단은 키시아르의 앞쪽에 놓인 빈 케이크 그릇과 여분의 찻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아일 경이 있었나 보군요.”

“그래. 아무래도 마병단 전속 의료체계를 빨리 만들어야 할 것 같다.”

“혹시 또 다친 겁니까?”

유더가 단장실에서 치료를 받던 날 내내 함께 있었던 나단의 표정에 알 만하다는 기색이 떠오르자, 키시아르가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지금 다친 건 아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그렇게 될 듯해서 말이야.”

“능력도, 인내심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쓰시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책임져 줄 거라 그리 확신하는 자의 기대를 어찌 저버리겠어?”

“예?”

나직하게 흘러나온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단 주커만이 반문하자 키시아르는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필요하다 싶어서 하는 일이니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

키시아르 라 오르는 본래부터 이해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어쩐지 평소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단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의원과 약사를 최대한 빨리 수소문해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입이 무거운 사제를 찾는 일은 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테니 구할 수 있는 쪽이라도 먼저 데려오는 게 낫겠지요. 성수와 정화석도 더 구해 두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하나 더.”

키시아르는 고개를 끄덕인 뒤 거기에 할 일을 하나 더 얹어 주었다.

“그 일과 함께 언제 사람을 구해도 곧바로 쓸 수 있도록 1층에 의무실을 만드는 공사도 진행해. 옆에 병상을 30개 정도 놓으면 더 좋겠군.”

“그것은 치유 능력을 가진 단원이 몇 명 더 생긴 후에나 만드실 생각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단 주커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나중에 만들면 정작 필요해질 때 늦을 수도 있어. 그리고 병상은 굳이 아픈 사람이 아니라도, 여러모로 격리가 필요할 때 쓸 수 있을 테니 미리 준비해 나쁠 것 없지.”

나단의 말대로 키시아르는 본래 의무실이나 병상 같은 시설은 마병단 내에 치유 관련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이 여럿 생긴 뒤에 만들어도 충분하다 여겼었다. 의원이나 약사보다 신전에서 가져온 성수나 정화석 하나가 더욱 빠르게 사람을 치료하는데, 굳이 당장 필요하지 않은 시설을 미리 만들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지미 오커의 제2성 발현이 일어났을 때 그를 따로 격리할 공간이 없어 개인 숙소에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모습을 본 뒤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각성자들의 몸은 평범한 이들과 다르다. 키시아르조차 각성자가 된 이후 변화한 제 육신에 대해 아직 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키시아르는 아마 몇 년만 지나도 각성자들을 위한 전용 의료의 필요성이 대두될 것이라 미래를 추측했다.

“알겠습니다.”

말속에 담긴 뜻들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납득하지는 못해도, 오래된 부관은 누구보다 충실히 그의 명에 따를 터다. 키시아르는 앞으로 더욱 변화해 나갈 마병단을 생각하다 문득 텅 빈 케이크 그릇에 시선을 주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아니. 그냥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군.”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나단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키시아르는 어깨를 작게 떨며 한참 동안 웃었다.

생각해 보면 순수하게 우스운 기억이 떠올라서 웃은 경험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

“도대체 원로사제께서는 이 뜻깊은 행사를 무어라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 참가할 이를 확정 지은 지가 언제인데 하루 전 참가자를 늘리란 말을 그리 쉽게 하신단 말인가?”

오늘 열릴 성화 나눔 행사를 돕기 위해 뽑힌 수련사제 루산은 바닥을 쓰는 척하며 바로 앞에서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는 나이 든 사제들의 대화에 몰래 귀를 기울였다. 어젯밤부터 사제들 사이에 당황한 기색이 오가기에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갑작스레 행사 참가자가 늘어난 게 원인이었던 모양이었다.

“반년도 전에 정해진 사안을 아무렇지 않게 엎지를 않나, 다 키운 꽃들을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바꾸라는 소릴 하질 않나……. 그래도 군말 않고 다 참았더니 이젠 공작가 도련님이 앉을 의자를 마련해 두라니! 정말 화가 나서 살 수가 없군.”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분만 그런 것도 아니고, 힘 있는 가문에서 오신 분들은 다 그렇지 않나. 아페토 가에서 대신전에 바치는 헌금 액수를 생각하면 그저 우리가 참고 수습하는 수밖에.”

“대체 신께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한 사제에게 가문이 다 무어야.”

그동안 성화 나눔 행사를 준비한답시고 그들에게 실컷 시달렸던 루산은 그들의 분노가 오히려 고소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너처럼 게으른 녀석은 절대로 정식 사제가 못 될 거라고 악담을 퍼붓더니, 얼굴 한번 안 내밀던 원로사제님 말에는 꼼짝도 못 하네. 우습다, 우스워.’

경전에 따르면 태양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세속과의 연을 끊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말을 지키는 이는 거의 없었다. 고아로 태어나 신전 앞에 버려진 루산 같은 이가 아니라면 대부분 출신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자리와 발언권이 달라지고는 했다.

자신들은 피해자이며 원로사제는 가문의 힘을 믿고 횡포를 부리는 양 말하는 저 사제들도 루산이 고아 출신이란 이유로 얼마나 무시하고 홀대했었는지 모른다. 루산의 눈에는 원로사제나 그들이나 다를 바 없었다.

“루산! 언제까지 거기서 같은 구역만 계속 쓸어댈 게냐? 게으름은 그만 피우고 어서 가서 성화 나르는 일이나 도와!”

말을 엿듣느라 너무 오랫동안 한자리에 머무르던 게 티가 났는지 나이 든 사제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리고 버럭 화를 냈다. 루산은 황급히 빗자루를 들고 도망치며 성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대답을 했다.

“아, 예에 예.”

“대답이 그게 뭐냐, 이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 고아 출신이 은혜를 받아 대신전까지 왔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대체 저 녀석은!”

‘어차피 나보다도 신성력이 적으시면서 대체 누가 누구더러 쓸모가 없다는 거야?’

루산은 1년간 손발이 부르트도록 키워낸 성화 무더기를 옮기고, 행사에 참여할 귀족 자제들이 설 단상과 테이블을 정리했다.

‘꽃을 키우고 수확해서 가시를 잘라 준비하는 건 전부 나 같은 사제들이 했는데 정작 여기 서서 나누어 주는 일은 귀족 자제들이 한다니. 이따위 무의미한 행사를 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그의 곁에서 일을 하는 다른 수련사제들도 비슷한 생각들을 하는지 표정이 전부 좋지 않았다. 누구 하나 행복한 이가 없는 이런 행사도 전통이랍시고 몇백 년이나 이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곧 참가할 분들이 오신다. 정리하고 어서 내려들 가거라.”

준비가 끝나자 고귀한 참가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성화 나눔 행사에 참석하는 귀족 자제들은 하나같이 고운 외모에 궂은일 한번 하지 않은 티가 역력한 손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형처럼 아름다운 적금발의 소년이 바로 갑작스럽게 행사에 참여하기로 하여 사제들을 화나게 만든 아페토 가 도련님이라고 했다.

루산을 비롯한 수련 사제들은 귀족 자제들이 옷 위에 흰색 사제용 케이프를 걸치는 것까지 도와주어야 했다. 루산의 담당은 바로 아페토 가 도련님이었다. 그의 어깨에 케이프를 걸치고 끈을 묶으려 했던 루산은 가까이서 본 소년의 이마와 목 안쪽이 온통 식은땀투성이임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의외네. 이런 도련님도 행사에 오면 긴장을 하는구나.’

놀라는 바람에 멈칫하기는 했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끈을 묶는 동안 루산은 아페토 가의 도련님이 식은땀뿐만이 아니라 꽉 쥔 주먹까지 떨고 있음을 깨닫고 웃음이 나올 듯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혹시 몸이 안 좋으시면 말씀하세요. 지금 바로 신성력을 부어 드릴 수 있으니까요.”

재수 없게만 느껴졌던 귀족 도련님이 신전에서 돌보는 고아 동생들처럼 느껴져 저도 모르게 동정심이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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