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26화 (126/805)

126화

“…뭡니까?”

“이름하여 아페토 가 막내 공자의 숨겨진 꿈. 관객은 내일 성화 나눔 행사에 참여할 모든 이들. 그리고 특별 초대 배우로 12인의 원로사제 중 한 사람이자 각성자 관련 연구의 권위자인 벨트레일 샨 아페토가 등장해 줄 예정이라네.”

“아뇨. 이 케이크 말입니다. 대체 어디서 꺼내 오신 겁니까.”

유더의 떨떠름한 답을 들었음에도 키시아르는 듣지 못한 사람처럼 우아하게 은제 포크를 앞에 놓아주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극본 내용은 다음과 같네. 어느 작은 행사에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고를 허약해 보였던 귀족 소년이 마병단원들과 힘을 합쳐 해결하게 되지. 다른 이들은 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마침 근처에 있던 마병단장이 그 사실을 알고 그들을 치하하게 된다네.”

키시아르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켜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유더는 그쯤에서 케이크와 관련된 답을 듣는 것은 포기하기로 하고 포크를 들었다.

“상으로 무엇을 받고 싶느냐는 말을 들은 귀족 소년은 자신도 마병단에 들어가고 싶다는 요청을 하고, 마병단장은 그 열정 넘치는 모습에 감동해 소년을 임시 단원으로 즉시 임명하게 되지. 그리고 소년의 친척인 행사 담당 원로사제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하며- 대단원을 맞는다.”

지휘자처럼 공중을 가볍게 휘젓던 긴 손가락이 말을 끝냄과 동시에 정확하게 멈추었다.

“어떤가. 꽤 재미있는 이야기 같지 않나?”

“…다른 건 그렇다 치겠습니다만, 단장님께서 우연히 근처에 있었다는 상황을 어떻게 납득시키실 겁니까.”

“그건 굳이 꾸며내지 않아도 돼. 내일 내 일정이 마침 그 근처를 지나도록 짜여 있더군.”

키시아르가 못된 장난을 꾸미는 악동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서쪽에서 온 사절들을 데리고 풍요의 언덕을 안내해 줄 예정이지. 대마법사 루마가 직접 심은 사과나무가 있는 그 아름다운 언덕 말이네.”

‘풍요의 언덕이라면…….’

그곳은 공교롭게도 대신전을 내려다보기 가장 좋은 위치에 존재하는 언덕이었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성화 나눔 행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지었던 표정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펠레타 공작이지만 마병단장이기도 한 내가 눈앞에서 벌어진 갑작스러운 사고를 보고 몸소 그곳으로 달려간다 한들, 누가 감히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나?”

“…그렇군요.”

포크로 대충 잘라 입에 넣은 케이크의 단맛 때문에 혀가 아렸다.

“일을 크게 키워서 시선을 이쪽으로 돌려놓고, 그 김에 귀족 각성자들의 인식도 바꾸실 셈이고, 그런 다음 단데니온의 구출 임무를 내리실 생각이십니까?”

“거의 비슷했네.”

키시아르가 아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구출할 자가 한 명뿐이라면 그랬겠지. 그런데 우리가 구출할 이는 한 명이 아니지 않나.”

한 명이 아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유더의 손안에서 무심하게 케이크를 자르던 포크가 우뚝 멈추었다.

“설마…….”

“자. 보게.”

키시아르가 아직 손에 쥐고 있던 편지 중 한 장을 빼내 유더의 앞에 놓았다. 아페토 가 본저 부지 내부에 있는 각 건물의 위치가 간결하게 표기된 그림지도였다. 직접 그린 탓에 서투르기 짝이 없었으나 의외로 내용을 알아보기는 쉬웠다. 유더는 별채 건물 안에 작은 글씨로 쓰인 간략한 문장을 읽었다.

‘현재 감금된 것으로 추정되는 각성자. 대략 20인 가량.’

“20명을 전부 어떻게 데리고 나오실 생각입니까.”

“굳이 우리가 데리고 나올 필요는 없네. 일이 커지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알아서 밖으로 나오게 될 테니까.”

키시아르가 손을 뻗어 지도의 어느 부분을 짚었다. 본채 안쪽에 작게 표시된 레블린의 이름과 그의 방 위치였다.

“아페토 가에서는 레블린이 마병단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겠지만, 마병단장에게는 단원들을 그 누구보다도 우선 보호하고 접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 그리고 나는 그 권한을 십분 활용해 나의 임시단원인 레블린을 만나겠노라 요청할 계획이네.”

마침 축제 기간이라 대륙 전체의 시선이 이곳에 쏠려 있는 상황. 그렇지 않아도 연신 화제를 모으는 마병단 관련 사건이니 제아무리 권세 높은 공작가라 해도 함부로 키시아르를 내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유더가 그런 예측을 하는 동안 키시아르의 손가락은 본채를 떠나 지도 위를 매끄럽게 죽 이동했다.

“내가 방문해 혹시라도 더욱 골치 아픈 것들을 발견하여 일을 크게 만들기 전에 미리 잠깐 옮겨 둬야겠다고 여기지 않겠나?”

별채와 본채, 그리고 외부를 잇는 식료품 보관 및 운반용 지하 통로를 표기한 점선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던 손끝이 아페토 가에서 소유한 드넓은 저택 부지 구석의 숲 근처에서 비로소 멈추었다.

“그렇게 별채 밖으로 빠져나오면, 그 다음은… 끝.”

“…….”

케이크를 먹는 것조차 잊은 채 그의 손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유더는 그제야 겨우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실로 대담한 계획이었다. 어제 레블린의 짧은 이야기를 듣고서 어떻게 여기까지 생각해 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아페토 가 입장이라 해도 이 방법 외에 다른 식으로 움직일 것 같지 않아.’

키시아르는 이런 일을 계획하기에는 불리하다 느껴질 수 있을 축제 시기에 일을 벌이면서, 오히려 그런 때라서 가능한 것들을 모두 끌어모아 기회로 바꿔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 이상 좋은 계획은 없어 보였다. 유더는 새삼 단데니온 하나를 구하는 일도 어려울 것이라고만 여겨 다른 각성자들의 구출 여부는 미처 고려조차 하지 못한 자신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내가 단장이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결코 저렇게 대담하게 움직이지는 못했겠지.’

세상을 구하겠다며 떠들어 대다 죽었으면서도, 결국 유더 아일의 한계는 이 정도였다. 지금의 키시아르보다 10년 이상을 더 살았음에도 나은 점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모두를 구하려 하는 저 사람이야말로 진짜 세상을 구할 수 있을 존재가 아닐까.

이전 생에서 그가 살아남았었다면, 어쩌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문득 가슴 속 깊은 곳이 긴 바늘로 푹 찔리듯 작게 쑤셨다. 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더를 보며 키시아르가 작게 웃었다.

“뭔가. 그 표정은. 하하. 내 천재적인 잔머리에 어이가 없어진 건가?”

“…순수하게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유더의 메마른 중얼거림을 들은 키시아르의 표정에 가득했던 장난기가 순간 미묘하게 사라졌다.

“반어법인가?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나라도 약간 쑥스러운데.”

“진심입니다.”

키시아르는 드물게 대답이 늦었다. 설마 진짜로 유더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뜬 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아직은 그저 계획 단계일 뿐이야.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와 레블린이 아페토 가의 시선을 끄는 동안 별채 쪽으로 가서 구출 작전을 수행할 사람의 존재라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유더에게 시킬 생각이다. 마주친 시선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능력 발휘를 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군.”

“저는 괜찮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그 거대한 공작가 내부에 무엇이 더 숨겨져 있든, 유더는 이 임무를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 위험한 임무를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마 저밖에 없을 터였다.

“자네는 늘 그렇게 말한 뒤 심각하게 다쳐서 돌아오지 않나.”

그러나 키시아르는 유더의 단호한 답에도 영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유더는 차마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할 자신은 없었기에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치료를 받으면 괜찮아지니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고? 진심인가?”

키시아르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저번에 반나절 내내 치료 받았던 기억을 벌써 다 잊은 모양이군.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말이야?”

순간 유더의 머릿속에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던 그날의 기억이 반사적으로 스치고 지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어깨가 욱신대는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으나 유더는 애써 그 감각을 의식 저편으로 밀어두었다.

“아닙니다. 중상을 입어도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도 세상에는 많지 않습니까. 그에 비하면 저는 어쨌든 돌아오면 단장님께서 책임지고 고쳐 주실 테니, 그러니까 괜찮다는 뜻입니다.”

“…그거, 노리고 하는 말인가?”

“예?”

시선을 돌린 유더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키시아르를 보았다.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올라올 정도로 몹시 낯선 표정이었다.

“뭘 노렸다는….”

“아니. 됐네.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까.”

손을 휙 내저은 키시아르는 이후 몇 번이나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는 도로 다물기를 반복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 두 사람의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가득 찼다. 조용해지고 나니 단 케이크 냄새와 차향이 갑자기 선명하게 인식되어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제가 혹시 무슨 말이라도…….”

“이번 임무는 짧은 시간 안에 치고 빠져야 하는 특성상 팀을 꾸릴 수 없고, 외부 지원도 어려울 거야. 인원이 늘면 늘수록 기동력 있게 움직이기 힘들어지고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늘어나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자네 혼자 움직여야 하는 부분은 최대한 적게 만들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계획을 짜겠네.”

제가 혹시 뭔가 잘못 말했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입을 열자마자 키시아르가 빠르게 설명을 시작했기에 이야기를 끝마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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