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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25화 (125/805)

125화

레블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으나 소년은 이내 한숨만 한 번 내쉬고는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동정으로 살 수 있는 도움은 일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드릴 정보가 쓸모 있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주시는 도움이라면 비교할 수 없이 낫겠지요. 그리고…….”

말끝을 흐린 레블린이 잠시 고민하다 뒷부분을 이어나갔다.

“공작님께서는 마병단원들을 직접 뽑으신 만큼 대단히 아끼신다고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형과 숙부는 지금도 마병단원들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사로잡아 실험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정보를 드릴 때 울면서 말했다면 과연 저를 얼마나 믿으실 수 있으셨을까요.”

“확실히, 그건 그렇군.”

키시아르가 냉정하게 동의했다.

“제가 어리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보고 들은 정보의 신뢰성과 판단력을 의심받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소용없을지라도 그렇게 하는 쪽이 제 소중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필사적이고 간절한 눈빛을 보며 유더는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예전에, 누군가 그런 눈빛을 짓는 것을 마주 본 적이 있었던 듯도 했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를 대상으로 그런 눈빛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희미한 기시감은 곧 일축되어 사라졌다.

“좋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겠나?”

키시아르의 질문에 레블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자네의 그 무서운 형, 혹은 숙부나 아버지와 정면으로 싸워야 한다 해도?”

“필요하시다면… 하겠습니다. 그리 도움은 되지 못하겠지만요.”

소년의 흰 얼굴 위로 비장감이 감돌았다.

“그 말, 그 각오. 모두 제대로 지켜주길 바라지. 그래야 이쪽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네.”

키시아르의 그 말은 곧 두 사람 사이의 거래가 완전히 성립되었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긴장감이 일시에 풀린 레블린이 순간적으로 숨을 짧게 토해내며 비틀거리다가는 벽을 짚고 똑바로 섰다.

“감사합니다. 모든 일이 잘 끝난다면, 이후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가능하면 불확실한 이후의 기약보다는 당장 다음에 있을 일부터 잘 해주는 게 어떤가?”

“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숙였던 고개를 든 레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시아르는 그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아페토 가의 공자께서 오늘 대예배만 참여한 채로 축제 기간을 끝내지는 않을 것 아닌가. 다음에는 어느 행사에 갈 예정이지?”

그 말에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입을 다물었던 레블린이 이내 일정을 가늠해 보려는 듯 손가락을 꼽아 보며 입 안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저는 형들처럼 확실한 예정이 정해진 상태는 아닙니다. 하지만 다음에 나가게 된다면… 모레 대신전 앞에서 열릴 성화 나눔 행사에 갈 확률이 높을 것 같습니다.”

“성화 나눔 행사라……. 그렇군. 주로 10대 중후반의 어린 자제들을 참석시키는 분위기이니 확률이 높겠어.”

키시아르는 이름만 듣고도 곧바로 어떤 행사인지 기억해낸 듯했으나 유더는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이름을 뒤져보고 나서야 겨우 그것이 어떤 행사였는지 흐릿하게 떠올랐다.

‘신전에서 1년간 가꾸어 수확한 꽃을 귀족 자제들의 손으로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한 송이씩 나누어 주는 행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특별히 뽑힌 독실한 신자만 가능한 줄 알았더니 미리 참가하기로 확정된 상태가 아니라도 참여하는 데 문제는 없나 보군.’

“그 행사의 담당자가 벨트레일 숙부님입니다. 아페토 가는 대대로 태양신 사제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라, 거의 모든 신전 행사를 지원하고 참석하죠. 성화 나눔 행사는 그리 복잡한 예식이 필요 없으니 제가 참여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며 레노어 형이 저 혼자 보내는 쪽을 고려 중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괜찮군.”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키시아르의 붉은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쳐 보였다. 잠시 후 턱을 가볍게 문지르며 입술 끝을 끌어올린 키시아르가 레블린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레블린. 연기는 좀 할 줄 아는가?”

“연기…요?”

“그래. 그날 아무래도 우리가 연극 한 판을 해야 할 것 같거든.”

소년이 눈을 깜박이며 입을 벌렸다. 의아해진 것은 유더 또한 마찬가지였다.

***

다음날, 유더는 본래 성화 나눔 행사에 치안 지원을 나가기로 했던 단원 한 명과 자신이 가기로 했던 다른 행사 일정을 서로 바꾸었다. 갑작스러운 변경 알림에도 단원들은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축제를 준비하는 며칠 동안 유더의 명을 듣는 데 익숙해진 덕이었다.

“오, 유더! 오늘은 지원 안 나가?”

밖에 지원을 나갈 때와 달리 제복을 대충 간결하게 걸쳐 입고 복도를 걷고 있으려니 얼굴이 익은 단원들이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네 왔다. 그들 중에는 이전 생에서 유더가 재수 없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이도 있었다. 유더는 새삼스럽게 낯선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하루라도 좀 쉬어야지. 어떻게 사람이 매일 일만 해?”

“단장님 뵈러 가나 보지? 수고해!”

수확제가 거의 끝나가면서 마병단원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행사 진행 도중 일어난 크고 작은 사고와 경범죄들을 완벽에 가깝게 막아내는 데 성공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병단과 더불어 치안 지원을 맡은 황궁기사단과 궁중마법사들이 단원들을 아무리 경계하고 깎아내리려 해도 소용없었다. 한번 단단히 뿌리내린 자신감은 그 정도로 꺾일 만큼 무르지 않았다.

축제를 그 정도로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던 데에는 키시아르와 유더의 노력이 컸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특히 유더는 황족으로서 참여해야 할 행사 때문에 종종 자리를 비운 키시아르 대신 누구보다도 많은 행사를 다녔고, 사고가 터질 뻔할 때마다 어디선가 귀신처럼 나타나 상황을 수습했기에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신뢰와 믿음을 얻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언제든 걱정 없이 수습을 맡길 수 있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만큼 의지가 되는 일이 또 있을까. 유더는 단순히 이전 생의 경험을 토대로 단원들이 겪을 뻔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 노력한 것뿐이었으나, 결과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크게 변했다.

이제 그의 강함을 질투하거나 경계하는 이는 더 이상 마병단에 존재하지 않았다. 유더와 친하든, 친하지 않든 상관없이 모두가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애초에 타인과 실력을 비교당하는 것조차 실례라 느껴질 만큼 강하고 노련한 이를 상대로 누가 경쟁심을 느낄 수 있을까.

질투나 경쟁심이란 대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는 상대에게 느끼는 것이다. 처음부터 까마득히 높은 곳에 홀로 서 있는 이를 질투하는 이는 없는 법이었다.

“단장님. 들어가겠습니다.”

유더는 단 내에서 제 위치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따위는 알지 못한 채 키시아르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침 햇살이 드리운 창가 쪽에서 따뜻하고 향긋한 내음이 풍겼다.

다른 귀족들은 아직도 자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키시아르는 이미 단장 제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채 김이 오르는 찻잔을 옆에 두고서 편지를 읽는 중이었다.

“레블린 샨 아페토의 편지입니까?”

“그래. 어제 요청한 부분들을 밤새 적어서 보낸 모양이야. 빠르기도 하군.”

키시아르가 편지지 뒤쪽에 찍힌 인장을 가볍게 흔들어 보여 주었다. 어젯밤 만났던 레블린이 저를 증명하는 증거로 찍어 보내겠다며 미리 보여 준 인장용 반지의 무늬와 똑같았다.

어젯밤 키시아르는 아페토 가를 떠나기 전, 레블린에게 몇 가지 정보를 요청했다. 아페토 가 저택 구조 및 그들이 구출해야 할 단데니온과 관련한 사항,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숙부인 벨트레일 샨 아페토 원로사제의 개인정보였다.

찾아내는 데 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하룻밤만에 모두 정리해 연락을 보낸 것을 보니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움직였을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서, 행사 참여 인원 재배치는 끝내고 왔나?”

“네.”

유더는 키시아르가 편지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일 성화 나눔 행사 치안 요원으로 참여하는 인원은 저를 포함하여 신과 둘, 술과 둘, 정과 하나, 총 다섯 명입니다.”

“혹 변경 사실에 항의하거나 의심을 품은 듯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잘했네.”

키시아르가 가볍게 대답하며 편지의 마지막 장을 읽기 시작했다. 유더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대답해 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내일 대체 어떤 연극을 하실 예정이신지 말입니다.”

어젯밤 키시아르는 어떤 연극을 하겠다는 것인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혹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 행사 인원 재배치 및 레블린의 연락을 모두 받고 나서 알려주겠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일들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답을 들을 시간이었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편지를 모두 읽고 반으로 접은 뒤 고개를 들어 저를 볼 때까지 꽤 긴 시간을 잠자코 서서 기다렸다.

“함께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하지. 저쪽에 앉아 있게.”

이야기가 목적이니 굳이 차까지 마실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잠시 후 유더는 키시아르가 즐거운 표정으로 직접 차를 따르는 모습을 보며 약간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 부담스러운 표정할 필요 없이, 연극은 말 그대로 연극. 정해진 극본대로 레블린과 자네, 그리고 내가 대사를 말하고 움직이면 그만인 일이지.”

찻잔을 유더의 앞에 내려놓은 키시아르가 뒤이어 다섯 조각이나 되는 크림 케이크 접시까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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