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그런데 내 눈앞의 자네는 어째서 이렇듯 건강한 것일까?”
키시아르가 제일 먼저 입에 올린 것은 유더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유더와 레블린이 동시에 놀라 얼굴을 보자 키시아르가 약간 미안한 미소를 띠었다.
“짐작 가는 이유는 있네. 하지만 나는 자네의 입으로 듣고 싶군.”
레블린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는 설마 키시아르가 그것을 제일 먼저 제게서 듣고 싶어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본래 하려던 말과 그리 다를 것도 없어. 괜찮아.’
소년은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갇혀서 죽어가고 있을 소중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러자 다시 용기가 차올랐다.
“맞…습니다. 말씀대로 저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나아진 건, 정확히 1년 반 전쯤 제가 각성한 이후였어요.”
유더는 순간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 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감정을 보았다. 너무나 빨리 사라졌기에 미처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바로 지금의 답을 그가 원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역시 그렇군.”
짤막하게 대꾸한 키시아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지. 정보든 도움이든, 나는 뭐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부족한 부분은 이후 졔크 쪽으로 편지와 함께 보내 드려도 괜찮을까요.”
“상관없네.”
키시아르의 허락이 떨어졌다. 레블린의 금빛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그는 아주 오래전 같기도 하고 얼마 전 같기도 한 과거를 더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가의 피를 이으신 공작님께서는 아시겠지만, 저희 아페토 가에는 대대로 각별히 허약한 아이들이 태어나고는 합니다. 바로 제가 그랬듯이요.”
레블린은 태어날 때부터 극도로 허약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뛸 수 없는 것은 물론이었고, 아무 이유 없이 피를 토하는 일도 잦았다. 그가 특별히 약하기는 했지만 아페토 가에는 그런 체질의 아이들이 종종 태어났기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첫째 형인 에이셰스 샨 아페토 또한 약한 체질로 태어나 종종 쓰러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아페토 가에서는 그 현상을 일컬어 ‘축복받은 피’를 짙게 타고난 아이들이라 일렀다. 하지만 레블린은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나 다름없다고 늘 생각해 왔다.
현 아페토 공작은 사별한 2명의 아내 사이에서 총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4명은 어릴 때 요절하고 겨우 아들 셋만이 살아남았다. 그 셋 중에서도 둘째인 레노어만이 흠 없이 멀쩡한 상태였다.
레블린은 하루하루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의 삶에 행복한 일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붉은 돌의 힘이 그에게 기이한 힘을 선사해 준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몬스터 떼를 죽이거나 검기를 내뿜는다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레블린의 능력은 하찮기 그지없었다. 특정 상대에게만 목소리를 전달하는 능력 따위는 귓속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외엔 아무 쓸모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능력을 각성한 이래 레블린의 건강은 점차 나아졌다. 아프지 않은 날이 점점 더 늘어나더니, 몇 달 뒤에는 제대로 걷고 달릴 수도 있었다.
그 기적 같은 일에 놀라 배다른 동생이자 12인의 원로사제 중 한 명인 벨트레일을 데려온 아페토 공작은 그제야 제 막내아들이 각성자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몹시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벨트레일은 레블린이 각성함으로써 그의 타고난 체질이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폈다.
대부분은 그 말이 헛된 생각이라 여겼지만 단 한 사람, 2공자 레노어만은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기를 원했다.
“이유는 간단했어요. 레노어 형은 에이셰스 형의 후계자 자리를 빼앗고 싶어했거든요.”
가문에 물려 내려오는 허약한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그 연구를 통해 알아낸다면, 에이셰스의 후계자 자리를 제가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심이 레노어를 움직였다. 아페토 공작 또한 그 말에 관심을 보였기에 그들은 별채 지하에서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숙부와 형은 그곳에서 온갖 끔찍한 짓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진심으로 각성자의 피가 섞이면 아페토의 ‘축복받은 피’를 분리해 없앨 수 있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1년 반이 지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지금도 그 연구는 계속되고 있죠.”
그 부분을 말하는 레블린의 표정에 혐오감이 가득 차올랐다.
“벨트레일 숙부는 처음에 절 대상으로 실험하기를 원했다고 해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그건 그리 내키지 않는다고 하셨죠. 제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건 그냥 그 이유 때문이에요.”
레블린은 숙부와 형이 두려웠다. 레노어는 동복형제인 데다 아직 허약한 레블린을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선심을 쓰듯 각성자 호위를 붙여주거나 내키는 대로 잘해 주었지만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니온은…… 아니, 단데니온은, 레노어 형이 붙여준 제 호위였어요.”
어느 날 우연히 레블린과 같은 나이에 생일까지 같은 각성자를 얻게 된 레노어는 동생의 말상대 겸 호위로 그를 붙여주었다. 레블린과 단데니온은 신분도, 성격도 전혀 달랐지만 나이와 생일, 성별이 같았고 같은 각성자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작은 공통점만으로도 그들은 곧 친해졌다.
“처음에는 친구였어요. 그런데… 서로 의지하던 사이에 마음이 자꾸 변해서…….”
레블린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물론이고 남의 감정에도 큰 관심이 없던 유더조차 그 뒷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윽고 레블린은 결심한 듯이 계속 말을 내뱉었다.
“제가 먼저 니온을 사랑했습니다. 니온은 몇 번이나 안 된다고 했죠. 그때 멈췄으면 나아졌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욕심을 내서, 그만 레노어 형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레노어는 평민 각성자 따위가 저와 같은 피를 타고난 동생과 눈이 맞았다는 사실에 어이없어했다. 단데니온은 별채로 끌려가 갇혔고, 레블린은 근신 명령을 받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형은 한 번 화를 내고 나면 곧 무엇 때문에 화가 났었는지도 잊어버려요.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었어요. 제가 어떻게 니온을 잊겠어요?”
레블린에게는 니온을 구할 힘이 없었다. 고작해야 그가 갇힌 채 굶어 죽지 않도록 하인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무도 그와 니온을 구해 주지 않는다면, 다른 수를 내야만 했다. 그는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고마운 적이 없었던 가문을 팔아넘겨서라도 연인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숙부와 형이 했던 연구의 증거를 찾아오라 말씀하신다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대신 니온을 구해 주세요. 니온은 저와 달라서 건강하고, 착하고, 능력도 강한 아이예요.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어리고…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어른처럼 침착하게 말하려 노력했지만 레블린은 결국 마지막에 실패하고 말았다. 유더는 인형처럼 마냥 예쁘게만 보였던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린 채 우는 레블린을 보며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전 생에서 결국 차기 아페토 공작의 자리는 2공자 레노어가 차지했다. 본래 후계자였던 에이셰스가 카치안 황제가 즉위하기도 전 갑작스레 병사했고, 그 뒤를 따르듯 전대 아페토 공작 또한 몇 년 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3공자 레블린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었으나 레노어가 공작이 되었을 때 그의 형제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 죽었던 것이리라.
다른 이들의 죽음은 몰라도 에이셰스의 죽음은 당시 제법 떠들썩했다. 타살 의혹을 워낙 많이 받은 탓에 몇 번이나 철저하게 조사했는데도 완벽한 병사 결론이 난 사건으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내가 단장이 된 뒤 아페토에서 이런 끔찍한 짓을 한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없었던 건, 1공자 에이셰스가 병사한 후 원하던 후계자 자리를 손쉽게 얻게 된 2공자 레노어가 곧바로 성과 없는 연구를 중단시켰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레노어가 원하는 것이 후계자 자리뿐이고, 나머지는 거기로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각성자의 피가 한 가문에 물려 내려오는 병적인 체질을 완화하거나 고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부터가 미친 소리였다.
동부에서 만났던 아페토 가의 관리관은 아페토에서 ‘축복받은 아이’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 발정기에 돌입한 제2성 발현자를 모으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레블린이 말한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실험의 일부라 생각하니 아주 오랜만에 진심으로 소름이 끼쳤다.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르고도 아페토 공작이 된 뒤에는 정작 가장 조용하게 지냈다니.’
유더가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보는 동안 레블린은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금빛 눈동자가 키시아르와 유더를 번갈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잠깐 눈에 먼지가 들어갔어요.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상황을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울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턱을 당당하게 당긴 레블린은 어리다는 이유로 협상 자리에서 동정을 사고 싶지 않은 자존심 강한 성격임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나머지 정보는 더 필요하다 생각하시는 부분을 말씀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이제 추는 다시 키시아르에게로 넘어갔다. 유더는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키시아르의 표정을 흘긋 살폈다.
“자네는 동정심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보를 대가로 도움을 구하기를 바라는군. 왜인지 물어도 되겠나?”
키시아르가 마침내 내뱉은 첫 마디는 겨우 감정을 다잡고 선 레블린을 직접적으로 후비는 듯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