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23화 (123/805)

123화

“……저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남들에게 들려주기 어려운 이야기가 오갈지도 모르네만.”

“비밀로 하겠습니다.”

변용한 키시아르의 갈색 눈동자 위로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 떠올랐다. 유더는 만약 그가 거절한다면 몰래 뒤를 따라가다 들키는 한이 있어도 혼자 보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이내 긍정적인 결정을 내렸다.

“좋아.”

키시아르는 책상 위에 자리를 비운 부관 나단에게 남기는 짧은 쪽지를 써두고 옷을 갈아입었다. 유더 또한 눈에 띄는 검은 제복 대신 키시아르가 내준 평범한 옷을 걸쳤다. 사이즈는 조금 컸지만 입었을 때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아 보여 다행이었다.

“예전에 밤 외출을 나갈 때 나단이 입었던 옷인데 꽤 잘 어울리는군. 키만 조금 더 크면 되겠어.”

유더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 키시아르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건넸다.

“전 이미 다 컸습니다.”

“아직 20살 아니던가? 그 정도면 몇 년간은 더 클 텐데.”

“…….”

모든 사람이 성년을 넘어서도 계속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유더는 한 번 미래를 살고 돌아왔기에 제 키가 지금 수준에서 조금도 더 자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제 키 정도면 마병단원들 중에서도 꽤 큰 편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키시아르의 반응은 몹시 의외였다.

“자. 마지막으로 이 모자도 쓰게.”

마지막으로 유더에게 일꾼들이 주로 쓸 법한 모자를 내준 키시아르는 머리칼과 얼굴이 그럭저럭 잘 가려진 것을 확인한 뒤 앞장서서 숙소를 나섰다. 거침없이 지름길을 이용하여 황궁기사단 부지 밖으로 나가는 동안 그들과 마주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페토 공작가 본가는 3벽 쪽에 있네. 경계가 삼엄한 곳이니 자네와 나는 지금부터 평범한 상단 심부름꾼으로 가장하도록 하지.”

“심부름꾼 말입니까.”

“그게 가장 적당하니까.”

“검문을 받을 때 어느 상단 소속인지 확인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건 걱정 말게.”

키시아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의 뜻을 곧 몸소 알려주었다. 거리에 뒷좌석 문을 열어둔 채 무료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빈 마차를 잡아탄 뒤 검문소가 가까워지자 품에서 낯선 신분패를 꺼내 마부에게 건네준 것이다.

“검문은 이것으로 증명할 테니 보여 주면서 계속 가게.”

“알겠습니다.”

3벽 안까지 들어가서 내려 달라는 말에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마부가 그 신분패를 보고는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건네준 신분패에 적힌 글씨를 짧은 순간 읽어내고 눈을 크게 떴다.

“슈덴 상단 신분패군요.”

“그사이에 벌써 봤나? 맞아. 이 상황에서 쓰기 가장 좋은 패지.”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인정했다. 슈덴 상단은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유명한 상단 중 하나였다. 역사는 다른 유명 상단들에 비해 짧았지만 값비싼 사치품 무역을 전문으로 한 덕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사막 때문에 교역하기가 힘든 남국에도 거의 유일하게 지점을 만들어 둔 것으로 유명한 슈덴 상단의 신분패는 당연히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더는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가 가끔 슈덴 상단과 개인적 거래를 하고는 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황족이라 비싼 물건을 개인적으로 사들이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했었는데… 설마 그런 식으로 쌓은 친분으로 저걸 받아내기라도 한 건가?’

키시아르가 말하는 투를 보아서는 아무래도 저 신분패를 한두 번 이용해 본 것이 아닌 듯했다.

“자주 사용하신 모양입니다.”

“뭐… 내가 워낙 놀기를 좋아하다 보니 저런 선물도 들어오는 게지. 내 이름으로 밤놀이를 다닐 수는 없지 않나.”

매끄럽게 대꾸하는 표정만 보면 그저 남들이 인식하는 키시아르의 모습대로 한없이 가벼운 한량 황족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더는 그것이 그의 전부가 아님을 알았기에 그 답에 넘어가지 않았다.

‘슈덴 상단과 키시아르라… 한번 조사해 봐야겠어.’

“곧 도착합니다.”

그때, 마부가 작은 문을 열고 도착 예고를 했다. 검문을 빠르게 통과한 덕에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이 생각보다 더 짧았다. 처음 출발했던 7벽 주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워진 창밖 풍경을 내다본 키시아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리고 나서부터는 나를 단장이라고 부르면 안 돼. 알고 있겠지.”

“네.”

두 사람은 어느 아름다운 저택 앞에서 내렸다. 끝도 없이 이어진 벽 때문에 대체 어디로 가야 문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으나 키시아르는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철로 만든 거대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아페토 공작가 본저였다.

키시아르는 큰 문 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다가간 곳은 문 근처에 아주 작게 세워둔 문지기 초소였다.

“계십니까.”

“누구신지…….”

문을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나이든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문지기 졔크 씨를 찾습니다만.”

“내가 졔크요.”

미심쩍은 눈으로 두 사람을 훑은 졔크의 얼굴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저희는 3공자님의 부름을 받고 상단에서 왔습니다. 아주 특별한 물건을 찾으신다지요.”

그러나 그 표정은 3공자 레블린을 언급한 순간 이내 눈 녹듯 풀렸다.

“아! 아아. 3공자님. 그렇군. 공자님이 불러서 오신 분들이오?”

“그렇습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공자님 말씀으로는 며칠 후에 오실 것 같다더니, 굉장히 빨리 오셨군요. 아무튼 어서 들어오십시오.”

말투가 공손해진 졔크가 쪽문을 열어 두 사람을 들여보내 주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공자님께 말씀을 드리고 오겠습니다.”

문지기가 머무는 공간인 듯한 작은 방 안쪽으로 그들을 안내한 뒤 졔크는 부리나케 사라졌다. 유더는 이전 생에도 와본 적이 없던 아페토 본저에 이런 식으로 방문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작가의 위용에 걸맞은 아름답고 거대한 저택이지만, 문지기가 머무는 공간은 너무나 협소하고 허름했다. 아무래도 아페토 공작가 사람들은 문지기 따위나 쓰는 공간까지 신경을 써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페토 본저는 태양신이 머무는 집과 같이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평을 듣지만, 그 평을 처음 말했던 자가 이곳을 먼저 보았더라도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마치 제 생각을 읽은 듯한 말이 뒤에서 들려오는 바람에 깜짝 놀란 유더가 고개를 돌리자 키시아르가 드물게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입을 열어 질문했다.

“참 궁금하군. 그렇지 않나?”

“…….”

유더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레블린 샨 아페토가 황급히 들어섰기에 대답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벌써 소식이 왔다고? 누가…….”

뒤따라 들어오는 문지기 졔크를 향해 무어라 말하던 레블린이 유더를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모자를 눌러 썼지만 곧바로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당신… 당신이 직접 왔군요!”

유더의 이름을 말하려 했다가 겨우 그것을 꿀꺽 삼킨 레블린이 환한 표정으로 졔크를 돌아보며 밖으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졔크. 잠시 이분들과 이야기를 하겠어. 밖에서 망을 봐 줘.”

“알겠습니다. 2공자님께서 혹 공자님을 찾으실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끝내 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나도 알아.”

결의에 찬 레블린의 표정을 본 졔크가 어린 도련님을 걱정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밖으로 나갔다.

“유더, 당신을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어요. 내 말을 펠레타 공작님께 전해 주셨나요? 그분께서 답을 주신 거죠? 뭐라고 하시던가요.”

문지기의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레블린이 흥분으로 뺨을 붉힌 채 빠르게 말을 토해냈다.

“그것이…….”

유더는 레블린에게 키시아르가 직접 왔다는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받아들이겠다고 하신 건가요?”

“이야기는 바로 전달드렸습니다. 단장님께서는…….”

“내가 직접 들으러 왔네.”

유더의 등 뒤에서 본래 모습을 드러낸 키시아르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레블린은 그제야 유더 말고 다른 사람도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눈을 돌렸다가는 기겁하여 숨을 크게 삼켰다.

“페, 펠레타 공……?”

“쉿.”

키시아르가 여유롭게 소년의 입술 가까이에 손가락을 대어 소리를 죽이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모두 들었네. 꽤 흥미로운 말을 했더군.”

“…제가 했던 말에 거짓은 전혀 없습니다.”

키시아르가 정말로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것도 거의 단신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말을 이을 수 없이 떨리는 한편, 레블린은 지금이 바로 그가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의 때임을 깨달았다.

“아페토 가에서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저보다 더 잘 알고 있거나, 공작님께 가감 없이 말씀드릴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 부분도 물론 흥미롭지. 하지만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네.”

“그것이 무엇인지요?”

키시아르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형인 레노어가 타인에게 주는 공포심에 익숙해져 타인이 무섭다고 느껴본 적이 거의 없던 레블린은 그 순간 처음으로 웃음 속에도 날카로운 칼이 섞일 수 있음을 깨닫고 바짝 긴장했다.

‘펠레타 공작은 결코 소문처럼 만만한 분이 아니야. 거래가 성사되기 전까지 방심해선 안 돼.’

“내가 알기로… 아페토 가의 막내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몹시 약해서 침대 밖에 나와 걷는 것조차 힘든 병약 체질이라 들었단 말이지. 그런데 내 눈앞의 자네는 어째서 이렇듯 건강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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