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그래서, 무슨 이야기입니까.”
“…….”
방금까지는 그렇게나 당차더니, 정작 이야기할 순간이 되자 소년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 속에서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던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도 그리 시간이 많은 몸은 아닙니다. 이름조차 모르는 귀족 도련님을 믿고 여기로 온 이유는 당신이 각성자였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내, 내가 각성자란 걸 어떻게 알았어요?”
소년이 깜짝 놀라 말허리를 자르며 반문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는데…….”
“방금 제게 말을 걸 때 힘이 느껴져서 알았습니다.”
“느껴졌다고요? 무슨 능력인지?”
“무슨 능력인지까지는 모르겠군요. 그냥 힘을 사용할 때의 느낌만 왔을 뿐이라서요.”
유더의 말에 소년이 잠시 후 부르르 떨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내 목소리를 들리게 할 수 있어요. 별 것 아닌 능력이죠. 방금 전 당신에게 말을 걸 때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살짝 사용했었는데……. 그랬군요. 그걸 느낄 수도 있는 거군요.”
그렇게 말한 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커다란 모자 안에 감추었던 눈을 드러냈다. 깜짝 놀랐다 진정한 덕인지 이전보다 한결 단단해진 태도였다.
“나는 레블린 샨 아페토라고 해요. 아페토 가의 적자 중 셋째이자 막내죠.”
누구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집 자제이리라 추측하기는 했으나, 설마 아페토 공작가의 자제일 줄이야. 유더는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상대의 정체에 놀랐으나 표정에는 그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한 유더의 태도에 힘을 얻은 듯 소년, 레블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얼마 전, 당신들 마병단에서 누군가가 납치당했거나 혹은 그럴 뻔했던 일이 있지 않았나요?”
‘이건 또 무슨.’
이렇게나 하나같이 예상 밖의 말만 꺼내는 상대는 오랜만이었다. 유더는 레블린의 긴장한 표정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내가 그 사건에 대해 정보를 줄 수 있어요. 대신, 펠레타 공작님을 만나게 해 줘요.”
레블린이 이야기하는 납치 사건은 분명 데브란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일 테다. 유더는 이미 그 사건의 배후가 아페토 가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그 가문의 사람이 직접 제 앞에 나타나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유더는 우선 레블린이 고른 마병단원이 자신이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의 제안을 이 자리에서 곧바로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생각에 잠긴 유더의 눈빛을 의심의 뜻이라 여겼는지 레블린이 초조하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의심스럽겠지만, 절대 나쁜 뜻으로 뵙자고 하는 게 아니에요. 가문은 이제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공자께서 알려줄 정보가 저희에게 쓸모 있다는 걸 어떻게 믿겠습니까?”
유더는 말을 살짝 돌려 레블린을 떠보았다. 만약 그가 알려줄 정보가 이미 그들도 알고 있는 수준과 그리 다르지 않다면 무엇 하러 이 거래를 받아들이겠는가. 레블린 또한 그러한 생각을 이미 했는지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분명히 쓸모 있을 거예요. 아페토는 ‘축복의 피’를 없애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어요. 각성자를 납치해 모으는 건 그 일환이에요.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분명 펠레타 공작님께서도 흥미로워하실 거라 생각해요.”
‘……축복의 피?’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묘한 단어였다. 유더가 기억을 더듬으려 노력하는 동안 레블린이 지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보를 대가로 내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에요. 그저 작은 도움이죠. 내 힘으로는 구할 수 없는 사람 한 명을 구해서 자유롭게 풀어주기만 한다면… 그러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예요.”
“…사람을 구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내 호위였던 사람이에요. 그도 각성자인데, 지금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짓씹은 레블린의 눈에 깊은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줄 테니, 아무튼 부탁이에요. 펠레타 공작님께 꼭 전해 주세요.”
“단장님을 뵙고 싶으셨다면 아까 귀빈석에 있었을 때 충분히 말씀드릴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그때가 아닌 지금 저를 찾아와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둘째 형에게 들켜서는 안 되었거든요. 절 여기로 데려와 준 사람이죠. 사실 지금도 급하게 빠져나온 거라 형이 절 찾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해요.”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레블린에게서 불안감이 짙게 느껴졌다. 유더는 제 대답만을 바라며 망토자락을 꽉 부여잡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전했다.
“단장님께 일단 전달은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요?”
“하지만 만약 이 거래가 성사되더라도, 어떻게 단장님을 뵈러 올 생각이십니까?”
“아페토 본가 문지기 졔크를 통해 연락하면 내가 받을 수 있어요. 시간을 정한 뒤 잠깐 외출한다고 하고 나오면 괜찮아요. 구해야 할 사람이 있으니 최대한 빨리, 가능하면 오늘 밤이라도 좋으니 의견이 정해지는 대로 와주세요.”
유더가 혹시나 어렵겠다고 말할까 걱정이 되었는지, 레블린이 빠르게 대꾸하며 눈을 굴렸다.
과연 정말 괜찮을까 싶었지만 어차피 이다음부터는 키시아르와 함께 이야기해 그가 결정할 문제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아직 당신 이름조차 묻지 못했네요. 너무 마음이 급해서 실례했어요. 당신 이름은 무엇인가요?”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다 말고 뒤늦게 이름을 물은 소년이 부끄러움으로 뺨을 붉혔다. 유더는 굳이 자신까지 이름을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으나, 초면인 상대에게 스스럼없이 본명을 밝히며 다가온 레블린의 용기를 감안해 대답해 주기로 했다.
“유더 아일입니다.”
소년은 떠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몇 번이나 유더를 돌아보았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귀족 소년답지 않은 간절한 그 눈빛이 머릿속에 깊숙이 남았다.
***
“재미있군. 그 아페토의 적자 중 각성자가 나온 것으로도 모자라 본인이 직접 가문을 배반하는 제안을 하다니. 아페토 공작이 안다면 꽤나 배신감을 느끼겠는걸.”
레블린 샨 아페토에 대해 보고받은 키시아르의 반응은 유더의 예상보다 간결했다. 유더는 대예배 때 입었던 진주처럼 흰 예복을 아직 벗지 않은 채 서류를 읽는 키시아르를 보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레블린 샨 아페토의 말을 믿으십니까?”
“믿음과 관계없이 사실일 거라는 생각은 드네. 게다가 그가 진짜 각성자임은 유더 자네가 이미 확인했다면서.”
“그렇다 해도…….”
“그거 아는가? 330명의 마병단원 중 이 수도를 고향으로 둔 귀족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유더의 말을 가로막으며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질문을 했다.
“그게 왜일 것 같은가?”
키시아르의 말대로 현 마병단원 중 수도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 단원은 한 명도 없었다. 수도의 갈론 백작가에서 자란 칸나 같은 경우 성을 물려받지 못한 자식이었고, 아니면 가케인 볼룬발트처럼 과거의 영광을 잃은 지방 몰락 가문 출신이 얼마 안 되는 귀족 단원의 전부였다. 유더는 여태 그리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질문에 약간 당혹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수도의 귀족 가문 출신 각성자 중에는 지원자가 없었거나, 아니면 있었는데도 단장님이 뽑지 않으셨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정답은 전자 쪽이네. 정확히는, 수도에 근거지를 둘 정도로 부귀한 가문들에서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각성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지만.”
키시아르가 공식적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강세를 주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각성한 지 2년이 되어가는 동안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백작가 이상의 가문만 따져도 수십은 될 텐데.”
“…….”
그 말을 듣고서야 유더는 키시아르가 하려는 말뜻을 알아차렸다.
“각성자가 있어도 숨기고 있군요.”
“최초에 분위기가 좋지 않게 잡혀 버린 탓이지. 이번 축제를 시작으로 점점 바뀌겠지만… 아무튼 그런 연유로, 자네가 만난 그 아페토의 막내 공자는 내가 아는 최초의 공작가 출신 각성자가 될 예정이네. 그러니 그런 점까지 포함하여 내가 직접 만나러 가야 하지 않겠나?”
이전 생에서 유더가 단장이 된 뒤에는 가끔씩 수도 귀족 출신 젊은이들도 마병단에 지원하러 오고는 했기에 미처 의식해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이 시기의 키시아르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과 싸우고 있었군.’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죽이는 것보다, 잘못 퍼진 편견 하나와 맞서 싸우는 일 쪽이 당연히 훨씬 어렵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곧 바꾸겠다 언급하는 키시아르를 보며 유더는 새삼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언제 가실 예정이십니까.”
“최대한 빨리 와 달라고 했다지 않았나. 지금 가볼까?”
키시아르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괜찮네. 내겐 쓸모 있는 친구들이 꽤 많으니까.”
키시아르가 웃으며 책상 안쪽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디자인의 얇은 팔찌를 꺼내 손목에 찼다. 그러자 잠시 후 그의 얼굴과 머리색이 이지러지며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지닌 평범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어떤가. 잘 바뀌었나?”
큰 키에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 걸친 예복은 이전과 똑같은데도 얼굴이 변한 것만으로 정말 다른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그런 느낌이 들도록 하는 부분까지가 변용 마법의 효과라고 들었지만 아무리 보아도 적응하기 힘든 모습을 보며 유더는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