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하르탄에선 무사히 귀가한 모양이군.’
오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모습에 내심 혀를 찬 유더는 문득 그를 향해 날아온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눈길을 틀었다.
‘…….’
시선의 주인은 키올레 다 디아카의 대각선 뒤쪽 자리에 앉아 있던 어느 소년이었다. 적금발에 인형 같은 이목구비를 지닌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년은 유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머리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버렸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얼굴 같은데……. 누구지.’
그러나 유더가 그 소년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뒤이어 키시아르가 부관 나단 주커만을 데리고 귀빈석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저기, 펠레타 공작 전하다!”
“펠레타 공작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태자가 나타났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환호성이 평민 신도들이 모인 구역에서 터져 나왔다. 키시아르는 환호가 들리는 쪽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화답해 준 뒤 황태자 쪽으로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겉보기에는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황가의 일원들처럼 보였으나 그 사이에 맴도는 공기는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웠다. 미소를 지은 채 키시아르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는 카치안 황태자의 표정을 보며 유더는 문득 낯선 기분을 느꼈다.
‘카치안 황태자 쪽이 노골적으로 키시아르를 싫어하는군. 전에도 그랬나?’
카치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오랫동안 그의 측근이었던 유더는 그가 극도로 기분이 저조해질 때 어떤 눈빛을 하는지 잘 알았다. 10대 후반밖에 되지 않은 어린 황태자는 아직 완전히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듯했다.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유더는 축제 내내 마병단 주변에 사고를 일으키던 배후가 대외적으로는 황태자 같아도 실세는 디아카 공작이리라 생각했다. 막 태어났을 뿐인 마병단이 황태자 일파에게 진심 어린 위협이 될 수는 없으니, 그저 고개를 내민 싹을 밟아보려는 가벼운 시도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저 표정을 보니 어쩌면 이번 일에 황태자의 의지도 생각보다 많이 포함된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전에는 카치안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키시아르가 빠르게 은퇴했고, 곧 죽었으니……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군.’
그러나 생각해 보면 결국 키시아르를 암살하라는 명을 내린 이가 바로 카치안이다. 그 당연한 사실이 어쩐지 몹시 생경하게 느껴졌다.
키시아르를 죽이기 위해 찾아갔던 그날의 기억이 뭔가 왜곡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지금, 여태 지극히 정치적인 결정이었다고만 여겨 왔던 카치안의 명에도 어쩌면 그가 알지 못했던 사정이 숨어 있던 건 아니었을까.
유더는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카치안 황태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위로 그의 미래 모습을 덧그려 보았다.
“유더. 단장님이 그렇게 좋아? 오시자마자 시선을 안 떼네.”
그때, 칸나가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온 덕분에 자칫 심각하게 가라앉을 뻔했던 상념은 곧 깨졌다.
“아니야.”
“아니긴 뭘. 굳이 부정할 것 없어. 어차피 다들 똑같은걸.”
귀빈석에 앉은 귀족들 중에는 황가의 피가 섞인 덕에 타인의 시선을 끄는 외모를 지닌 자가 많았다. 카치안 황태자만 해도 어린 시절부터 줄곧 화려한 꽃에 비유되어 왔을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닌 이였다. 그러나 그런 귀족들 사이에서도 키시아르는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를 한번 본 이들은 누구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앗, 단장님이 주변을 둘러보시네. 혹시 우릴 찾으시는 걸까?”
그럴 리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려던 유더는 순간 그를 발견한 키시아르가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며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펠레타 공작님께서 이쪽을 보셨다!”
그가 이쪽을 본 것이 아니라 믿고 싶어도 주변 신도들의 열광적인 반응 덕에 그럴 여지조차 없었다. 유더는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 했으나 키시아르는 보란 듯 손까지 흔들기 시작했다. 환호가 순식간에 더욱 커졌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외침 속에서 칸나가 키시아르를 향해 손을 마주 흔들면서 웃음을 참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맞지? 너도 같이 인사해 드려 유더. 안 그러면 계속 저러실 기세야.”
“…….”
유더는 하는 수 없이 키시아르를 노려보며 고개를 슬쩍 숙여 인사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정도로도 만족한 듯 키시아르가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가 보인 이상행동 때문인지 주변의 귀족들이 유더가 있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대부분은 유더와 칸나가 입은 마병단 제복을 보고는 곧바로 심드렁하게 관심을 거두었으나 몇몇은 달랐다. 유더를 발견한 키올레가 너무 놀라 입을 벌렸다가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고, 카치안 황태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상당히 오랫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사라진 뒤 유더는 돌아가는 대로 키시아르에게 이 일을 항의하겠다고 결심했다.
“곧 교황 성하께서 나오실 차례입니다. 모든 신도들은 예를 갖추십시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예배가 시작되었다. 12인의 원로사제가 먼저 나와 성수를 뿌리고 축복의 기도문을 하나씩 읊조린 뒤 아주 길고 두터운 흰 옷을 걸친 늙은 교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이 막클라렌 3세…였나. 참 오랜만이군.’
유더는 지금으로부터 5년 뒤쯤 세상을 떠날 교황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공적으로 얼굴을 몇 번 마주한 경험 외에 사적인 연은 없었던 상대인데도 제 기억 속에서는 죽었던 이가 눈앞에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다지 신앙심 따위는 없어 보이는 귀족들은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세상없이 독실한 신도처럼 굴었다. 평민 신도들 중에서도 교황을 보자마자 감격하여 통곡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모습들을 둘러보며 혹시 나타날지 모를 수상한 낌새를 경계하는 동안, 어느덧 예배가 끝날 시간이 다가왔다.
교황이 마지막으로 기도를 끝냄과 동시에 머리 위에서 신성력으로 만든 빛의 폭포가 내리자 감탄과 기도 소리가 광장 전체를 울렸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으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파견된 이들은 그 모습을 오래 볼 수 없었다. 이제부터 일제히 광장을 빠져나가려 움직일 인파를 사고 없이 제어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황이 축복의 말을 끝내고 원로 사제들과 함께 자리를 뜨자마자 평민 신도들이 광장을 나가는 출구 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유더는 사람 사이에 끼어 허우적대는 이들 몇을 바람의 힘으로 구해 주었고, 부모를 잃어버리고 우는 아이들을 근처 제국군 병사들에게 인도했다. 광장을 빠져나가는 길은 좁은데 나가려는 이는 많으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대체 왜 이런 곳에서 굳이 예배를 하려 하는 거지? 장소가 여기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악취미군.’
“유더. 나 잠깐 저기 있는 할머니께 다녀올게! 일행을 잃어버리신 것 같아서.”
“알겠어.”
“곧 돌아올게!”
유더와 마찬가지로 제 능력을 이용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던 칸나가 또다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주변을 헤매는 이를 발견하고는 바삐 뛰어갔다. 그녀가 사라진 뒤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던 유더는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 마병단원. 맞죠?”
또 길을 잃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예상치 못한 상대였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 시선이 마주쳤던 인형처럼 예쁜 외모의 소년이 아무 장식도 없는 검은 망토를 두른 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유더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유더는 귀빈석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었던 귀족들은 이미 키시아르를 포함하여 모두 사라진 뒤였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가?’
아무리 아직 어린 소년이라 해도 대예배 귀빈석에 초청될 정도의 귀족이라면 보통 가문 사람은 아니다. 유더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저보다는 사제들이나 황궁기사단 기사분들께 요청하시는 쪽이 좋을 듯싶습니다만.”
“그들은 날 도울 수 없어요. 내가 찾아온 건 당신이에요.”
소년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귀에 파고들었다.
“아주 잠깐이면 돼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나요?”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유더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각성자인가?’
아주 희미하게 기운이 느껴졌을 뿐이라 확실치는 않았다. 하지만 소년에게서 느껴진 그 기운은 분명 각성자들 특유의 힘이었다.
‘어떻게 할까.’
유더는 잠시 고민했다. 이게 마병단을 노린 디아카 공작의 함정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단을 생각하면 소년을 돌려보내는 쪽이 당연히 옳았다. 그러나 당당히 나선 주제에 행동과 달리 누군가에게 쫓기는 작은 짐승처럼 불안에 떨리는 눈동자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따라오시죠.”
결국 유더는 소년을 이끌고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 커다란 천사상 뒤쪽으로 이동했다. 오래된 나무 몇 그루가 교묘하게 얽혀 있는 그곳은 그늘을 이루고 있어 몸을 숨기기에 적절한 위치였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고 싶으신 듯하니 모자를 쓰시고 이야기하는 쪽이 낫겠습니다.”
“아, 아. 음. 고마워요.”
소년의 망토 뒤에 달린 모자 끝을 잡아 가볍게 덮어씌워 주자 당혹한 목소리로 감사 인사가 돌아왔다.
‘저 어설픈 모습을 보니 역시 사고를 일으키러 온 끄나풀은 아닌 것 같군.’
그러면 대체 무슨 이유일까. 유더는 약간 커진 궁금증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