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내리깔고 웃은 키시아르가 잠시 후 말에서 휙 몸을 날려 땅에 내려섰다. 말에서 내렸음에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장신의 사내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게 끝인가?”
그가 괴한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주 짧은 물음이었으나 시선을 받은 괴한은 순간적으로 제가 작게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는 그 압박감을 단순히 기분 때문이라 치부하려 애쓰면서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그, 그래. 이들은 모두 너희들 때문에 죽는 것이다! 잘 봐두……!”
기세 좋게 소리치던 괴한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그곳에 모여 있던 수많은 이들 중, 그 짧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인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마병단원들조차 그러했다.
그러나 유더는 순간적으로 공기를 찢고 지나간 엄청나게 작고 강력한 힘의 파동을 느꼈다. 키시아르의 손끝에서 튕기듯 쏘아져 나간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 괴한들만을 정확하게 때리고 지나간 뒤,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잠시 후 괴한들이 일제히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소리 없이 풀썩풀썩 쓰러졌다. 제 다리로 서 있을 수 있었던 이는 오직 그들에게 잡혀 있던 인질들뿐이었다. 그러나 그 인질들조차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해 벌벌 떨며 멍해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거리 내의 혼란이 일시에 얼어붙은 가운데, 적막 속에서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매년 마법사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수없이 진주탑에 방문하지. 하지만 수련 마법사로 발탁되는 이는 1000명 중 1명도 되지 않는다. 마법사가 되지 못한 이들 중 누군가가 어두운 길로 빠져들었다면, 그것은 진주탑의 죄인가?”
모두의 시선이 키시아르를 향했다.
“…….”
“내가 마병단을 만든 이유는 바로 이런 이들에게서 선량하고 죄 없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나의 사람 보는 눈이 옳았다는 사실은 이 자들이 저지른 일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 더 말하지 않아도 되겠군.”
키시아르의 붉은 시선이 그에게 압도된 모든 이들의 면면을, 그리고 그곳을 넘어 더 먼 곳에 위치한 고급 숙소 건물들 쪽으로 향했다가는 다시 되돌아왔다.
“치안대.”
그가 손을 들어 구석진 곳에 도망치듯 물러나 있던 제국군 병사들을 가리키자 아직 얼이 빠져나간 기색이 역력한 대답이 들려왔다.
“네, 네!”
“이들을 즉시 체포하여 구금하라. 축제를 틈타 황제 폐하가 계신 수도를 어지럽히려 한 죄인들이니 내가 직접 심문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접근시켜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마병단은 다시 행진을 시작할 테니 즉시 대열을 재정비하도록.”
“네!”
“그리고…….”
마병단원들이 흐트러진 대열을 정비하는 동안, 제국군 병사들이 허둥지둥 달려와 기절한 괴한들을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때, 유더는 문득 쓰러진 채 질질 끌려가는 괴한 중 한 명의 손이 점점 새빨갛게 변하며 곧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저건…….’
이전에도 본 적이 있는 광경임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몸이 움직였다.
“모두 손을 놓고 비켜!”
“우와악!”
유더가 손을 휘두르자마자 일어난 거대한 바람이 병사들을 날려 보내고, 괴한들의 주변에 방어벽을 형성했다. 그 직후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육신이 일제히 터져나가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사방에서 누가 질렀는지도 알 수 없는 비명이 울려 퍼졌으나, 바람의 벽을 뚫고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더는 뒤이어 땅을 움직여 모든 잔해를 빠르게 아래로 파묻은 뒤 한숨을 돌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
놀란 토끼눈이 된 마병단원들의 시선은 그렇다 치고, 그 뒤에서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키시아르의 시선이 몹시 따가웠다.
그러나 유더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성큼성큼 앞으로 나선 키시아르가 모든 이의 시선을 도로 그에게로 모으듯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채 입을 열었다.
“자. 보라. 누구라도 이 제국의 안전을 사사로이 어지럽히려 한다면, 지금과 같이 심판받게 될 것임을 명심하도록.”
“우… 우와아아!”
그제야 겨우 얼어붙어 있던 일반 제국민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사이로 도시 전체가 떠나갈 듯 거대한 환호가 마병단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공작 전하께서 흉수들을 단숨에 해치우셨다!”
“펠레타 공작 전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마병단 만세!”
유더는 아낌없이 쏟아지는 꽃잎들을 맞으며 미소를 짓고 있는 키시아르의 시선이 제게 서늘하게 향하는 것을 느끼며 슬쩍 눈길을 피했다.
“분명히 힘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급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대열을 재정비한 뒤 대행진의 마지막 목적지인 승리의 광장으로 향하는 동안, 유더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내뱉는 키시아르의 질책을 들었다.
“병사들을 피하게만 하면 충분했던 일이었어.”
“그 정도로는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 없었을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키시아르가 기껏 직접 나서서 전환한 분위기였다. 그가 굳이 그곳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아마도 황태자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그 노고를 망치는 것보다는 이쪽이 당연히 낫지 않은가.
타당한 변명이라 생각했지만 뺨 위로 와닿은 키시아르의 시선은 조금 더 따가워졌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 척 무시하고 있으려니 잠시 후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손은?”
“멀쩡합니다.”
“못 믿겠으니 이따가 보여주게.”
“…….”
정말로 하나도 안 아프다고 말해 봤자 믿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더는 대충 알겠다고 대답한 뒤 시선을 돌려 키시아르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단장님이야말로 아까 무슨 힘을 쓰신 겁니까? 뭔가를 쏘아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그걸 봤나?”
“보았다기보다는… 느꼈습니다.”
“역시 예민하군.”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 키시아르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손끝으로 공기를 튕긴 거라네.”
“…예?”
“이렇게.”
그가 고삐를 쥐고 있던 손을 놓고 검지를 엄지 안쪽에서부터 가볍게 밀어 튕겼다. 마치 아이들이 서로 딱밤을 놓으며 놀 때 하는 장난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지금은 눈에 보이도록 느리게 튕겼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힘을 주어서 빠르게 튕기면 아까처럼 할 수 있네. 간단해 보이지만 꽤 어려워. 그래도 결과는 압도적이지.”
유더는 키시아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농이나 거짓을 말하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힘을 쓸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이전 생에서는 그런 공격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힘 자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꼭 필요할 때에는 반드시 근접전투를 했다. 때문에 유더는 아까 그가 보여준 공격의 정체가 실은 마도구의 힘을 빌린 마법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마법이 아니라면 왜 이전 생에서는 그 힘을 쓰지 않았단 말인가?
의문에 찬 유더의 표정을 보며 키시아르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뭔가 이상한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인데.”
“…단순히 빨리 튕긴다고 쓸 수 있는 능력이라면 신과 단원들도 대부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충 얼버무린 질문이었으나 키시아르는 진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어려운 부분이라네. 이건 단순히 힘을 쓰는 게 아니고 오러를 조금…… 음. 자세한 건 비밀이네. 아무튼 다른 힘도 살짝 섞어야 가능하거든.”
오러. 검의 극한에 이른 기사와 소드마스터들만이 쓸 수 있는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은 키시아르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오러……. 이전 생과의 차이가 혹시 거기서 나온 것인가?’
어지간해서는 절대로 힘을 쓰지 않으려 했으며 언제나 장갑을 끼고 있던 이전 생의 키시아르.
그리고 필요하다면 신력이나 오러 같은 힘을 사용하는 것도 꺼리지 않으며 맨손을 당연하게 드러내는 이번 생의 키시아르.
만약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신력도, 오러도 모두 강제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면 그 힘들을 이용한 공격을 할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뒤 유더는 문득 또다시 꿈속에서 보았던 키시아르의 씁쓸한 눈빛을 떠올렸다.
‘내 그릇을 깨트리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가 말했던 ‘부서진 그릇’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유더는 내심 점점 더 그때 꾸었던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제가 잊고 있던, 혹은 어떤 이유로 잊게 된 기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확신을 더하는 중이었다. 방금 전 일로 그 생각은 조금 더 강해졌다.
어째서 자꾸만 그런 꿈을 꾸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이유를 알게 된다면 어쩌면 제가 다시 11년 전으로 돌아온 원인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해 보았다.
‘사실 내가 어떻게 해서 다시 돌아왔는지는 그리 궁금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와 같은 결말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뿐이었다.
***
“죄송합니다. 준비해 두었던 것들이 전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마병단이 환호와 함께 사라진 뒤 황태자 앞에 고개를 숙인 디아카 공작의 낯빛은 처음과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안색이 달라진 것은 황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키시아르와 마병단이 쉽게 책임 문제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몇 중의 장치를 해 두었다. 한두 개는 빠져나갈 수 있어도 마지막에 장치해 둔 인간 폭탄만큼은 완전히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여겼었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그 모든 것을 우습다는 듯 가볍게 헤치고 우레와 같은 환호 속에서 꽃을 밟으며 사라졌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