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멀리서 소란스러운 환호성이 일기 시작했다. 마병단이 나타난 것이었다. 황태자와 디아카 공작은 발코니에 마련된 마법이 걸린 투명한 벽 너머로 당당히 백마를 타고 앞서 걸어오는 사내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이야기했던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상을 향해 달려드는 천 개의 별을 거꾸러뜨리고 마침내 찬란히 떠올랐다던 태양신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볼 때마다 참 건강도 하시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펠레타 공작이 저 나이까지 저토록 건강히 살아 있을 줄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디아카 공작이 투명한 주홍빛 술을 입 안에 흘려넣으며 낮게 웃었다.
“운명이란 참 얄궂지요.”
“그래. 얄궂기 짝이 없어. 누군가에겐 정말로 신의 축복이란 것이 실재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황태자의 시선이 키시아르를 넘어 그의 뒤로 죽 이어지는 검은 제복 행렬들로 넘어갔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자리에 설 꿈조차 꾸지 못했을 이들의 밝은 미소가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황태자가 고개를 돌리고 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자 디아카 공작이 눈치 빠르게 불편한 심기를 알아채고 입을 열었다.
“신의 축복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결국 저주나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인간의 힘이라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
“그 인간의 힘이 현재 전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펠레타 공작을 위협이라 느끼십니까?”
“그럴 리가.”
짤막한 대답을 들으며 디아카 공작은 손자를 가르치듯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펠레타 공작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결국 저런 대장놀이 정도뿐입니다. 그가 아무리 저런 식으로 열등감을 해소하려 해 보았자 장차 이 제국을 이끌어 나갈 분이 누구인지는 바뀌지 않습니다.”
디아카 공작의 시린 시선이 점점 가까워지는 키시아르의 머리 쪽으로 향했다. 그의 눈에 비친 젊은 공작은 아주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일 따름이었다.
“그 사실을 이번에 잘 알려 주어야겠지요.”
카치안 황태자는 그제야 디아카 공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작과 닮은 짙은 암적색 눈동자 위로 웃음이 떠올랐다.
“좋아. 기대하지.”
“곧 준비한 것들이 시작될 테니 부디 즐겁게 보아주십시오.”
디아카 공작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환호로 가득했던 거리 한복판에서 별안간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태자는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에 낀 채 당혹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마병단을 내려다보며 편안하게 턱을 괴었다.
“저게 뭐야!”
“대체 저자들은 누구야?”
올 것이 왔다.
유더는 시끄럽게 머리를 울리는 비명과 고함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5벽으로 행진해 오는 동안 마병단의 앞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유난히 화려하고 드높은 발코니가 가득한 고급 숙소 거리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몇 명의 괴한이 나타났다.
얼굴을 천으로 가린 그들은 칼날처럼 길게 변한 손톱이나 쇠와 같이 단단하게 변한 주먹을 이용해 구경꾼 몇 명을 인질로 잡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키시아르와 마병단의 앞을 가로막으며 주변을 공포에 빠트렸다.
“뭐 하는 놈들이냐! 황제 폐하께서 계신 신성한 수도에서 감히! 당장 투항해!”
대치 상태가 되어 행진이 멈춰지자 주변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흩어져 있던 제국군 병사 몇 명이 일제히 달려왔고, 검을 겨누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괴한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거친 불꽃을 만들어내자 병사들은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하고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방금 봤어? 불을 내뿜었어! 각성자야!”
“도망쳐!”
거리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괴한들이 각성자임을 알아챈 마병단원들 또한 긴장감에 가득 차 이전의 여유를 잃었다.
“단장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술과 부단장 스티버가 잔뜩 굳은 얼굴로 키시아르를 향해 소리쳤다.
“잡아들이라 명하신다면 당장 나가겠습니다!”
키시아르만을 바라보는 단원들과 달리,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숙소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의 발코니들은 밖에서 결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특수한 마법과 장치를 해 두었기에 어떤 이들이 거기에 앉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저곳 어딘가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겠지.’
유더는 자신이 아는 카치안 황제, 아니. 황태자라면 분명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천성적으로 남보다 의심이 많은 그라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황태자와 디아카 공작이 마병단에게 선심 쓰듯 내준 수많은 기회 속에 함정이 숨어 있을 것임은 누구라도 예상할 만큼 뻔했다. 하지만 시기가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축제가 시작하는 첫날 정도는 간만 보고 넘어가 줄 줄 알았는데, 상대는 그조차도 봐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일반 흉수도 아니고 각성자들을 보냈다는 점에서 크나큰 악의도 함께 느껴졌다.
분명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유더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앞에 나선 사람은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그와 유더는 처음부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상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라면 이 정도 일쯤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당신이 그 유명한 마병단 단장, 펠레타 공작입니까?”
나이 든 노파를 인질로 삼은 괴한 한 명이 키시아르를 향해 잔뜩 긁힌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그렇다.”
선선히 대답하는 공작의 표정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가시를 품고서 질문한 이가 도리어 놀랄 만큼 우아한 태도였다.
키시아르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은 직전까지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했던 자신을 순간적으로 부끄럽게 여겼다. 모두가 일시에 조용해지자 마치 마법처럼 주변의 동요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우,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은 모두 당신 때문이야!”
그런 분위기를 느낀 듯 괴한들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인질의 목을 꽉 쥐어 일부러 비명을 지르게 했다.
“사, 살려 줘……!”
겨우 가라앉으려 했던 동요가 순식간에 다시 높아졌다. 키시아르의 시선이 인질에게로 살짝 향했다가는 다시 괴한 쪽으로 돌아갔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오르 제국의 선량한 백성들을 붙잡아 위협하는 짓이 지금 나 때문이라는 건가?”
“발뺌하는 겁니까! 당신은 우리들을 속여서 이곳까지 부른 뒤 버렸습니다!”
키시아르의 말에 괴한 중 한 명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우린 당신만 믿고 마병단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왔는데, 당신은 직접 사람을 보지도 않고 아무나 대충 입맛에 맞춰 뽑은 뒤 나머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내쫓았어!”
그 말에 마병단 전체가 딱딱하게 굳었다. 유더 또한 의외의 기분을 느낀 것은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각성자들이 아니라 마병단 시험에 응시했던 이들이었나.’
키시아르가 직접 사람을 보지 않고 아무나 뽑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당시에 얼굴을 변하게 하는 마법을 쓴 상태였다. 게다가 유더가 알기로 마병단 시험에서 떨어진 이들에게는 돌아갈 때 사용할 여비로 사용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돈이 주어졌다.
그런데도 계속 수도에 남아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선택일 뿐, 키시아르나 마병단 때문이라 볼 수 없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들의 처절한 외침에 마음이 흔들렸다. 유더는 마병단 내에서조차 술렁이는 분위기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키시아르를 돌아보았다.
‘더 말하기 전에 그냥 입을 막고 기절시켜 끌고 가게 하는 쪽이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키시아르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미미한 웃음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우리 같은 이들이 이 수도 내에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당신이 대장 놀이를 하겠답시고 만든 그 쓸모도 없는 마병단 때문에! 우린 다 죽게 되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전부 다 죽여 버리고 우리도 죽을 것입니다!”
수도를 비롯한 중부 지방은 각성자에 대한 태도가 유한 편이었다. 황족인 키시아르가 제일 먼저 각성한 각성자 중 한 명이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일반 제국민들에게 있어 황족의 모든 것은 태양신이 내린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중부는 황제의 힘이 가장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곳이었기에, 그 영향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얼굴을 가린 괴한의 외침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과 공포의 씨앗을 심어두기에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다.
저리 강력한 힘을 지닌 각성자를 정말로 안전하다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이 지금처럼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그런 그들을 불러들여 마병단을 만든 뒤 몇 달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키시아르는 정말로 제국민의 안전에 과연 신경을 쓰고 있기는 한 것일까?
괴한들이 거칠고 포악하게,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를 호소할수록 몰려선 이들은 그들에게서 ‘각성자’의 일면을 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들에게 있어 각성자란 멋진 제복을 입은 펠레타 공작과 그의 강인한 부하들을 말했으나, 이제는 눈앞에서 울부짖으며 노인의 목을 조르는 저 무서운 이들 또한 각성자였다.
의심과 공포가 거리 내에 가득해졌다. 그것은 동부 지방에서 겪었던 이유 모를 적대감과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동부를 다녀온 유더는 그러한 분위기를 민감하게 느꼈다.
‘이 이상 떠들게 내버려 두면 늦는다.’
키시아르가 무슨 생각으로 놈들을 내버려 두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참아서는 안될 것 같았다. 유더는 나중에 한 소리를 듣더라도 일단 놈들을 해치우고 볼 생각으로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러나 마치 그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키시아르가 순간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유더는 나쁜 짓을 하려다 들킨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