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유더. 어젯밤까지 계속 고생했다며. 몸은 좀 어때? 약간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그 검, 새로 받은 거야? 꽤 멋진걸. 손잡이에 매단 이 끈도 설마 단장님이 주셨어?”
사실 유더는 오늘 나오기 전 검 손잡이에 이논이 준 붉은 끈을 묶어두었다. 늘 가지고 다니라고 말했던 이논의 말을 지키려면 거기 묶어두는 것이 최선일 듯해서였다. 가케인의 말을 들으니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게 어울리는 듯해 다행이었다.
“검은 받았고… 끈은 내 거야.”
“그렇구나. 잘 어울려. 엄청 강해 보이고.”
“고마워.”
유더의 감사 인사에 가케인이 무어라 또 말을 이으려 했으나, 그때 분위기가 떠들썩해지며 키시아르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곧 행진이 시작되나 봐.”
“아, 난 제자리로 돌아가 있을게. 이따가 봐, 유더!”
또다시 긴장되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된 칸나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동안 가케인은 신과 동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따라 무심코 시선을 돌렸던 유더는 그쪽에서 저를 발견하고 씩 웃는 데브란 하르투데를 보고 눈인사를 가볍게 나누었다.
수도에 돌아온 뒤 며칠간 치료를 받으며 고문의 흔적을 모두 싹 씻어낸 데브란은 이후 유더에게 무척 친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그가 그리 친밀하게 구는 이유가 아무래도 자줏빛 반점 부상을 목격하고 비밀을 공유하게 된 사건 때문이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밀은 잘 지켜주어서 다행이었다.
“유더! 이쪽으로.”
마침내 마병단원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온 키시아르가 주변을 둘러보며 유더를 찾았다. 유더는 칸나를 떠나 그에게 다가갔다. 잠깐 걸어가는 그사이에도 동료 몇 사람이 흥분과 긴장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걸어왔다.
“유더. 오늘 정말 멋진걸? 정말로 대단한 높은 분 같아.”
“당신도요, 스티버.”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술과 부단장 스티버 렌들리가 유더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긴 머리칼을 평소와 달리 높이 틀어 올린 신과 부단장 에버 벡도 그의 옆에서 인사를 건넸다.
“유더. 이거 끝나고 우린 곧바로 같이 6벽 쪽으로 이동하는 것 맞죠? 자꾸 맞게 기억한 건지 헷갈리네요.”
“맞습니다. 가기 싫어서 도망친다 해도 곧바로 찾아내어 데려갈 자신이 있으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유더의 태연한 대꾸에 에버가 겨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지나 겨우 키시아르의 앞에 당도하자 보석처럼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유더를 응시했다.
“옷자락이 흐트러졌군.”
시선을 내려 보니 단원들을 헤치고 나오는 동안 쓸린 제복 겉옷 자락이 약간 흐트러진 상태였다. 유더는 곧바로 손을 뻗어 옷자락을 정리하려 했으나, 키시아르 쪽이 조금 더 빨랐다. 흰 장갑으로 감싼 손가락 끝이 우아한 움직임으로 유더의 옷자락을 정돈하고 붙어 있던 먼지 조각도 떼어내 버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뭘.”
황족인 펠레타 공작이 직접 누군가의 옷자락을 정돈해 주는 광경을 본 사람들이 일제히 놀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차마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시아르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단장님의 하늘 같은 은혜로 제가 오늘 꽤 오해를 살 것 같군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저는 나쁩니다.”
“어느 쪽이든 화제가 되는 쪽이 마병단에게는 더 좋지 않나. 즐기게.”
눈을 내리깔고 우아하게 미소 지은 키시아르가 멀리서 자신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는 수도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환호성은 일시에 귀가 먹먹할 정도의 크기가 되어버렸다.
“저분이다! 저분이 바로 펠레타 공작님이야! 황제 폐하의 동생이신!”
“우와아아!”
“귀가 멀 것 같군요. 시작도 전부터 이러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엄청난 환호 사이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나단 주커만이 한 필의 거대한 백마를 끌고 나타났다. 그 말은 키시아르가 행진 때 타야 하는 말이었다.
“손만 한 번 흔든 것뿐인데, 뭘.”
키시아르가 나단의 손에서 고삐를 받아 능숙하게 올라탔다. 환호성이 또다시 거리 전체가 떠나가라 높아졌다. 유더는 펠레타 기사단 단복과 갑옷을 제대로 걸친 나단 주커만의 표정이 더욱 좋지 않아지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단 경. 저와 함께 말의 양옆을 따르신다고 들었는데, 방향은 어느 쪽에 서실 생각이십니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만, 사람들에게 마병단이 가장 잘 보여야 하는 자리이니 제가 왼쪽으로 가겠습니다.”
오른쪽은 수도 백성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바로 보이는 위치였고, 왼쪽은 키시아르와 말에 가려 존재감이 묻히는 자리였다.
유더는 알겠다고 말한 뒤 키시아르가 탄 말 오른쪽에 섰다. 그러자 곧 미리 훈련했던 대로 나머지 단원들이 열을 맞추어 뒤에 서기 시작했다. 각 과의 부단장들이 제일 앞에, 그리고 이어서 2명씩 짝을 맞추어 선 단원들의 당당한 모습에 주변에서 호기심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 사람들이 그 마병단인가? 엄청 강해 보이는걸.”
“옷이 멋지다. 올해는 황궁기사단보다 마병단 쪽이 더 볼만하겠어.”
‘계속 연습한 보람이 있군.’
유더는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 처음으로 이 행진 대열을 연습했을 때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기억해 보면 지금 상황은 모두가 다시 태어났다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유더는 멀리서 뿔피리를 세 번 부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 시작될 행진 일정을 머리로 그렸다. 수천 명이 참여하는 행진의 가장 앞자리에는 언제나 제국군이 선다. 그 뒤로 황궁기사단과 궁중마법사들이, 그러고 나서 나머지 인원이 서는 형태였다.
올해 처음 참여하는 마병단은 제일 마지막이라 출발도 아직이었지만 분위기를 보면 반응이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한 거니까.’
“곧 출발하겠군. 신호가 왔어.”
신호용 마정석을 손안에 쥐고 있던 키시아르가 말을 걸었다. 유더는 멀리서 축포가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흥분으로 가득 차 딱딱하게 굳은 330명의 마병단 동료들이 보였다.
유더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은 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긴장돼?”
“…….”
“그럴 필요 없어. 이까짓 행사, 구보 한 바퀴만도 못하니까.”
대행진은 큰 행사이지만, 그래 봤자 축제다. 반드시 근엄함을 지켜야 하는 기사도, 군인도 아닌 그들이 지나치게 무게를 지켜 보았자 좋을 것이 없었다.
‘이전 생에서는 다들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실수도 많이 했고, 욕은 욕대로 먹었었지. 이까짓 자리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굳을 필요는 없었는데.’
오직 실력만으로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선발된 그들의 이미지에 맞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여유로운 미소가 제일 나았다. 적어도 유더는 그렇게 판단했다.
“으, 응. 맞아. 우리가 매일 훈련장 열 바퀴를 넘게 뛰는데 이 정도야 뭐 별것도 아니지!”
굳어 있던 칸나가 좀처럼 보기 힘든 유더의 웃음에 전염된 것처럼 씩 웃었다. 그러자 다른 단원들도 하나둘씩 점차 굳은 표정을 풀고 웃기 시작했다.
“그래. 진짜 별 것 아냐. 그냥 축제를 맞이해서 한 바퀴 도는 것뿐이잖아!”
“이까짓 일에 얼 만큼 겁 많은 놈 없지?”
“얼어 있던 건 너잖아. 방금 전까지 화장실 가고 싶은 표정으로 서 있던 걸 내가 다 봤는데.”
“내, 내가 언제.”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유더가 활짝 풀어진 마병단원들을 보고 있자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기 좋군.”
고개를 돌린 곳에서 키시아르가 고삐를 쥔 채 태양신처럼 웃고 있었다.
“마병단.”
“네!”
그리 크지 않은 부름이었으나 330명 전체가 키시아르의 목소리를 듣고 단숨에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래. 너희는 마병단이다.”
눈부신 햇빛을 머리 위에 인 키시아르 라 오르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속에 파고들었다.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나아가라. 앞에 항상 내가 있을 테니,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알겠나?”
“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다시 한번 축포가 크게 터졌다.
마병단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유더는 귀가 먹먹할 만큼 울리는 환호성을 들으며 키시아르가 탄 말의 옆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심장이 크게 뛰었지만 땅을 딛는 발에는 힘이 단단하게 들어가 있었다.
이전 생에서 유드레인 아일은 마병단 단장으로서 10번에 가까운 대행진에 참가했다. 그때도, 지금도 긴장감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단 한 가지만이 그때와 달랐다.
나아가는 길의 앞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걱정되지 않는 평온한 감정.
그것은 바로 기대감이었다.
* * *
“곧 마병단이 나타날 것이라 합니다.”
“그래. 알겠다.”
황태자 카치안 라 오르는 귓가에 속삭인 시종의 보고를 들으며 손에 든 잔을 내려놓았다. 수도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대행진은 7벽 끝에서 시작되어 5벽 안쪽의 거대한 광장에서 끝이 나는 것이 전통이었다.
때문에 행진을 구경하고 싶은 외국인이나 귀족들은 5벽 내에 마련된 유달리 높은 고급 숙소의 비밀 발코니에 앉아 그 모습을 관람하고는 했다. 황태자가 앉아 있는 곳 또한 바로 그런 발코니 중 한 곳이었다.
“펠레타 공작이 예상외로 열심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바짝 얼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평민 출신들을 양 떼처럼 몰고 가는 우스운 모습을 볼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디아카 공작이 늙은 너구리 같은 미소를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또한 직전에 자신의 하인에게 귓속말로 보고를 들었기에 현재 마병단이 얼마나 완벽하게 대행진을 진행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디아카 공작이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