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16화 (116/805)

116화

“그래. 말해 줘서 고마워. 이거 받아.”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주십니까요…….”

“그냥 주는 거 아냐. 그에게 숙부가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잘 숨겨 줘야 해.”

“그것이 이 늙은이의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요, 공자님.”

하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돈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레블린은 천으로 빛 한 조각 들어가지 못하도록 꽁꽁 가린 별채 3층의 어느 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작게 열었다.

“……니온.”

그저 이름을 말한 것만으로도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소년은 길게 숨을 내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곧 수확철 행사가 시작되지. 그때가 되면 내 근신도 풀려. 그러면 형의 시선을 피해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공자님,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곧 교대 시간이 끝나니 누군가 올 거예요.”

뒤를 돌아본 늙은 하인이 굳은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레블린은 다시 모자를 뒤집어쓰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별채 뒤쪽은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양 곧 조용해졌다.

* * *

수도에서 열리는 수확철 첫 행사는 언제나 ‘대행진’으로 시작된다.

대행진이란 황궁기사단, 궁중마법사, 특별히 선발된 제국군 정예, 그리고 각 지방에서 뽑혀 초청을 받은 유명 기사단, 그 외에 전 대륙에 이름이 날 만큼 유명한 인물들이 여럿 모여 수도 전체를 한 바퀴 도는 거대한 행진을 말한다.

오랜 전통을 지닌 데다 가장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기대하는 행사이기도 한 대행진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대대로 자랑할 만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올해는 특별히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가 이끄는 마병단이 그 대행진에 자리를 얻어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수많은 이들이 놀랐고, 또 제각기 흥미에 따라 마병단의 성공과 실패를 바랐다.

“믿을 수가 없어……. 내가 대행진에 참석하기 위해 여기에 와 있다니.”

유더는 제 바로 옆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칸나를 보았다. 그녀는 열 명 남짓한 정과 단원들의 가장 앞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부단장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어깨에 매단 띠가 조금 뒤집어져 있는데도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에서 그것을 알아차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그동안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진짜 여기 서니까 손발이 떨리는 것 같아. 걷다가 넘어지면 어떡해. 내가 실수해서 마병단이 웃음거리가 된다면…….”

“걱정 마. 잊었어?”

유더는 그녀의 어깨띠를 잡아 본래대로 방향을 돌려주며 무심히 입을 열었다.

“걷기 시작하는 순간 주변에 바람을 깔아 넘어지려 해도 넘어질 수 없도록 만들기로 했잖아.”

“아, 아아. 그, 그랬지. 맞아.”

칸나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끝없이 끄덕댔다.

행진에서 넘어질까 싶어 걱정을 했던 단원은 칸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때문에 키시아르와 유더는 바람을 넓게 퍼트릴 줄 아는 능력자이자 유달리 침착한 성정의 술과 단원 한 명을 불러 행진 내내 바람으로 단원들의 다리 쪽을 감싸고 있기로 결정했다.

사실 키시아르는 그 효과에 대해 약간 의구심을 품었었으나 유더의 경험상 그 방법은 분명히 통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바람 따위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기는 힘들지 몰라도, 그것이 받쳐 주고 있다는 안정감은 단원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침착한 마음을 유지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전 생에서 처음 단장이 되었을 때 썼던 방법인데… 아무튼 그때는 잘 통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유더가 직접 바람을 썼고 이번은 아니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유더는 부디 바람의 힘을 쓰기로 한 단원이 제때 일을 잘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유더 형, 칸나 누나!”

약간 진정한 칸나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고 있으려니, 등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과끼리 모인 대열의 조금 뒤쪽에서 다른 단원들 곁에 딱 붙어 서 있던 지미가 눈을 빛내며 웃고 있었다.

“오늘 진짜 진짜 멋있어요!”

지미는 제2성 발현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시 돌아온 소년은 완벽한 알파로 변이한 상태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제2성을 발현한 것이 아니냐며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지만 지미는 오히려 좋아했다.

수확제 축제를 준비하는 며칠 사이 너무나 바빠 잠잘 시간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유더는 오늘에야 지미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쩐지… 기분 탓이 아니라 그사이 좀 자란 것 같은데. 제복 소매가 약간 짧아지지 않았나? 돌아가면 바로 수선하라고 해야겠군.’

행진을 앞둔 오늘을 위해 모든 단원들은 검은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었다. 개인 무기가 필요하다고 신청했던 이들은 모두 키시아르의 이름으로 내려온 새 무기도 갖고 있었다. 낡은 연습용 무기를 들고 다녀야 했던 상황에서 해방된 단원들의 표정에 설렘과 긴장이 가득했다.

유더는 지미의 허리에도 마찬가지로 걸려 있는 아름다운 고급 검집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지미가 받은 검과 거의 흡사한 것이 유더의 허리에도 매달려 있었다. 어젯밤 키시아르에게 직접 하사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잘 제련된 상등품 철로 만들어진 다른 단원들의 검과 달리, 유더의 것은 약간 특별했다. 얼마 전 진주탑의 노마법사 타이스 율만이 붉은 돌의 힘을 가둘 매개체로 써 보기 위해 키시아르에게 구해 달라 요청했던 재료 중 하나인 유칼락티움으로 만든 검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가끔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발견되고는 하는 희귀광물 유칼락티움은 철과 비슷했으나 제련을 하면 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해졌다. 마법의 힘을 받아들이는 능력도 탁월해 검보다는 주로 마도구 재료로 쓰이곤 했지만, 그렇다 해도 최고의 검을 만드는 재료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렇게 좋은 검을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겉보기엔 다른 단원들이 받은 것과 차이가 없으니 괜찮네. 어지간한 사람은 알아보지 못해. 설마 내 보좌가 연습용 검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대행진에서까지 보란 뜻은 아니겠지?’

유더는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키시아르에게 검을 받았다. 적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검은 칠을 한 검집 안쪽에는 축복과 무운을 기원하는 고대어가 흰 문양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유더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자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검집 안쪽에 빈 홈이 하나 있는데, 보이나?’

‘아… 네.’

그의 말대로 흰 문양의 가장 아래쪽에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느껴지는 묘한 홈이 하나 있었다.

‘이전에 내가 신검에서 떼어 주었던 보석은?’

‘그것도… 여기 있습니다.’

유더가 제복 안주머니에서 붉은 보석을 꺼낸 것을 본 키시아르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떨어트리면 어쩌려고 그렇게 막 가지고 다니나?’

‘언제나 곁에 두고 다니려면 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잃어버린 적은 없으니 괜찮지 않습니까.’

‘괜찮지 않네. 그럴까 봐 검집에 끼워 넣을 수 있도록 홈을 만들라 지시한 것이니 지금 붙여 두게.’

유더는 그제야 검집 안쪽의 홈이 무슨 역할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깨닫고 놀랐다. 조심스럽게 붉은 보석을 끼워 넣어 보자 마치 처음부터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양 꼭 들어맞았다.

‘이제 완성되었군.’

키시아르의 말대로 붉은 보석의 존재로 인해 유더의 검은 완전히 완성되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타인의 눈에는 잘 뜨이지 않을 부분에 보석이 붙어 있기는 해도, 유더는 그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기에 상관없었다. 지나치게 눈에 띄면 다른 단원들에게 불만을 살 수 있으니 이 정도가 좋았다.

‘감사합니다.’

‘며칠 내내 자네가 잠을 줄이고 뛰어다니며 축제 준비를 위해 노력한 상이네. 솔직히 말하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었는데, 급하게 준비하려니 그 정도가 한계더군.’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지만.’

키시아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미소를 지었다.

“…….”

어젯밤 있었던 그 일을 떠올리며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유더는 저 앞쪽에서 황궁기사단장과 궁중마법사 수장과 모여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키시아르를 흘긋 바라보았다.

금사로 수를 놓은 흰 장갑을 끼고 티 하나 없는 금빛 머리칼을 맵시 있게 위로 넘겨 반듯한 이마를 드러낸 그는 마치 오늘을 위해 태어난 이처럼 보였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장신에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신 흰 제복을 걸치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홀리는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몰래 키시아르를 훔쳐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겉만 보면 저리도 아름답지만 유더와 똑같이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오늘을 준비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다. 눈 밑이 퀭해진 유더와 달리 전혀 티가 나지 않기는 하지만, 꽤 피곤할 터였다.

“유더, 칸나. 여기 있었구나.”

“가케인.”

그때, 키시아르를 가리며 또 다른 장신의 청년이 유더의 시야 속에 파고들었다. 붉은 머리칼 끄트머리를 검은 비단 끈으로 묶어 평소보다 훨씬 단정한 모습이 된 가케인은 마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왕자처럼 화려한 기품이 넘쳐 흘렀다.

“와, 가케인. 그렇게 하니 이제야 진짜 귀족 도련님 같아.”

칸나가 그의 모습에 드러내 놓고 감탄을 표하자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이름난 가문 출신 도련님이 맞는 가케인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칭찬이지?”

“그럼!”

장난기 어린 칸나의 말에 미소를 지은 가케인이 유더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검은 장갑으로 감싼 유더의 손 쪽으로 향했다가는 아무렇지 않게 곧 다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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