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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15화 (115/805)

115화

1공자 에이셰스는 이 연구에서 쓸 만한 정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 말하며 일찌감치 손을 떼었다. 그래서 레노어는 그와 반대로 이 연구에 많은 투자를 했다. 각성자들이 처음 나타난 이후부터 줄곧 그들을 연구해 온 숙부의 힘을 믿고 진행하기 시작한 연구였다.

만약 이 연구를 통해 그가 오래도록 가문을 괴롭혀 왔던 피에 얽힌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알아낼 수 있다면, 하다못해 각성한 이후 모두를 귀찮게 만들고 있는 펠레타 공작의 약점이 될 만한 정보라도 알아낸다면 에이셰스의 후계자 위치는 순식간에 흔들릴 것이다.

레노어는 먼저 태어났다는 것만 믿고 거들먹대는 허약한 에이셰스 따위보다 자신 쪽이 훨씬 나은 후계자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연구는 1년이 넘게 지지부진하기만 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각성자를 수급해 보내던 동부 거점의 관리관마저 죽고 말았다. 말이 꽤 잘 통하는 자라 마음에 들었었는데 죽은 것으로도 모자라 거점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팠다.

“아버님은 뵈셨습니까? 혹…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레노어의 질문에 벨트레일이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 뵈었습니다만, 진척된 사항이 없다면 굳이 찾아와 알려 줄 필요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레노어가 1년 전 처음 이 연구를 진행하겠다 했을 때는 관심을 보이며 장소까지 지원해 주었던 공작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은 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레노어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군요. 뭐, 아버님은 요즘 바쁘시니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숙부님을 위해 기사나 마법사 출신 각성자를 더 데려올 수 있는지 찾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마병단 소속 각성자를 데려올 수 있을 것 같다 말씀하셨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대화를 나누던 도중 문득 생각이 난 듯 벨트레일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뼈아픈 부분을 또다시 찔리는 기분이 된 레노어는 애써 웃는 얼굴을 가장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무래도 아래쪽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병단 소속 각성자가 그리 쉽게 잡힐 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아쉽게 되었군요.”

벨트레일의 눈동자 위로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 온화한 얼굴만 보이는 그로서는 흔치 않은 표정이었다.

“굉장히 많이 기대하셨던 모양이군요. 기대를 충족시켜드리지 못하여 죄송한 마음입니다.”

“펠레타 공작은 최초 각성자 중 한 명이자 최초로 확인된 제2성 발현자입니다. 그런 그의 눈으로 직접 고른 이들이라면 분명 무언가 다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혹 다음에라도 손에 넣는다면 꼭 데려와 주십시오.”

키시아르 라 오르가 몹시 초기에 각성 사실이 밝혀진 이들 중 하나임은 알았으나, 뒤쪽의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지난 1년간 숙부가 연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각성이나 제2성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잘 알게 되었다 생각했던 레노어는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랬습니까? 펠레타 공작이 2성 발현까지 했던 줄은 몰랐군요.”

“거의 각성과 동시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압니다. 태양신 신전에서 확인하기로는 그랬습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당연한 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레노어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군요. 공작 작위를 받을 정도의 황족이니……. 그래서, 펠레타 공작의 2성은 어느 쪽입니까?”

“어느 쪽일 것 같습니까?”

벨트레일이 재미있어 하는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글쎄요. 숙부님께서도 겉모습만으로 그것을 구분하기란 어렵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가능하다면 오메가 쪽이었으면 좋겠군요.”

“왜입니까?”

“어차피 자식을 가지지 못할 운명인데 직접 황손을 품는 자비 정도는 신이 내려주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토록 축복받은 분이시니 말입니다.”

어느 모로 들으나 조롱이 가득 깔린 발언이었다. 그러나 황족 모욕죄로 끌려가도 할 말이 없을 발언을 듣고도 벨트레일은 그저 부드럽게 웃기만 했을 뿐, 조카를 나무라지 않았다.

“안타깝군요. 그분은 알파입니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전혀 아쉽지 않은 목소리로 무심히 대꾸한 뒤 레노어는 몸을 돌렸다.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하인을 통해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광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지하 감옥을 빠져나온 레노어는 복도를 통해 본채 쪽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몇 사람의 하인이 공손히 따랐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별채를 나가기 전, 어디선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고함과 함께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냐.”

불쾌한 기색으로 걸음을 멈춘 2공자의 질문에 하인 중 한 명이 황급히 뒤돌아 뛰어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는 방금 들린 소리의 정체를 고하였다.

“지난번에 가두어 두라 명하셨던 그 각성자 놈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고분고분해지지 않아 계속 가두어 두고 있었다는데 정신만 들면 저리 난동을 부린다 하는군요.”

“지난번에 가두었던 놈이라면… 레블린의 호위였던 그놈을 말하는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 레블린 공자님을 다시 뵙게 해 달라 소리친다 합니다.”

“그 주제도 모르는 놈이 아직 살아 있었다니 놀랍군.”

솔직히 말하자면 레노어는 제가 그런 명령을 내렸었다는 사실조차 방금까지 잊고 있었다. 그러나 하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당시 느꼈던 불쾌감이 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레블린 님께서 그놈에게 손대지 말라 매일 부탁하러 오시는 통에 매질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밥에 약을 타서 조용히 시키는 것이 전부라는군요.”

“레블린이? 그런데 내게 왜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지?”

“죄송합니다! …….”

레노어가 미간을 확 찡그리자 하인들이 일제히 겁에 질려 허리를 한껏 숙였다. 그들에게 있어 기분이 좋지 않은 2공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하나같이 쓸모가 없군.’

레노어는 하인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그들을 전부 찔러 죽이는 상상을 했다. 그가 그렇게 한다 해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이제까지도 많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난번에 하인 몇 명을 죽였을 때 에이셰스가 공작에게 일러바쳐 근신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으므로 레노어는 겨우 분기를 가라앉혔다. 그렇지 않아도 지나치게 잔혹하다는 평이 그의 단점으로 꼽히는 상황에 빌미를 더 만드는 일은 좋지 않았다.

“됐다. 레블린이 내게 말하지 말라 강제로 명했다면 너희들도 어쩔 수 없었겠지. 그렇다 해도 네놈들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레노어의 싸늘한 목소리에 하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벌벌 떨었다. 레노어는 짐승처럼 울부짖던 소리가 가라앉은 별채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두어 둔 그놈은… 그래. 일주일간 물 한모금 주지 말고 굶긴 뒤, 그래도 조용해지지 않으면 지하 감옥으로 보내라. 숙부님께 어떻게 사용하든 상관없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레블린 샨 아페토 또한 앞으로 이 별채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금한다. 아페토의 긍지를 잊고 고용인 따위와 놀아난 주제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근신 명령을 어기다니, 무서운 것이 없는 모양이지. 한 번만 더 어기면 곧장 내게 전달하러 오도록 해라.”

그렇게 말한 뒤 레노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채를 나섰다. 하인들은 그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굽혔던 허리를 펴고 서로 공포에 질린 시선을 교환했다.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공자님. 때문에 앞으로는 절대로 여기에 오셔서는 안 됩니다. 이러시는 것을 알면 저희 모두 죽습니다.”

“뭐라고?”

그로부터 얼마 뒤, 별채의 뒷문을 통해 몰래 들어오려던 작은 그림자 하나가 하인의 손에 가로막혔다. 망토에 달린 큰 모자로 얼굴을 감추었던 그는 바로 아페토 공작가의 막내이자 2공자 레노어 샨 아페토의 동복동생인 레블린 샨 아페토였다.

“말도 안 돼. 알잖아, 필. 내가 가지 않으면 그는 정말 죽어.”

“정말로 안 됩니다. 레노어 공자님의 성격을 아시지 않습니까.”

몇 번 실랑이를 하던 끝에 흰 손이 얼굴을 가리던 모자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한눈에 보아도 시선을 끄는 인형 같은 미소년이었다.

헝클어진 적금발 아래 눈물과 분노로 젖은 금색 눈동자가 보이자 레블린을 가로막던 늙은 하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를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 어린 막내 공자님을 위해서도, 제 목숨을 위해서도 이것이 최선이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젠장.”

예쁜 얼굴에 걸맞지 않은 욕설을 내뱉은 레블린의 시선이 땅을 향했다. 지금도 이 땅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생각하면 등골이 섬찟했다.

“알겠어. 들어가지는 않을게. 뭐 다른 소식은 없었어? 레노어 형이 다녀갔다면 분명 숙부와 뭔가 이야기를 했을 것 아냐.”

“별것은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레노어의 뒤를 따라 지하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던 늙은 하인이 기억을 더듬으며 얼굴을 긁적였다.

“두분이서 그, 펠레타 공작님 이야기를 나누시더군요.”

“펠레타 공작? 마병단 이야기를 한 거야?”

레블린이 황급히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예에. 그런 이름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누굴 데려오려고 했는데 실패하셨다느니, 아깝다느니 하는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레블린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하인의 손에 금화 하나를 쥐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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