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14화 (114/805)

114화

“고대 용의 심장 조각, 고대 요정의 가루, 최고급 유칼락티움.”

유더는 마도구 재료나 매개체 같은 것은 잘 몰랐으나, 타이스가 말한 3가지 재료가 모두 엄청나게 희귀하고 값비싸단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정도 물건들이라면 확실히 타이스가 홀로 구할 수 없을 테니 키시아르에게 부탁해 달라 말할 만도 했다.

“그 3개뿐입니까?”

“일단은 그렇네.”

“알겠습니다. 단장님께 전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방어진을 설치할 때 쓰실 마정석도 필요하실 테니 그것도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더의 말에 타이스의 제자 알릭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그것까지 신경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가지고 온 마정석이 거의 다 떨어져 가던 참이었거든요.”

“부족한 것이 있으시다면 뭐든 저나 칸나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 진주탑 쪽에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습니까?”

“괜찮습니다. 그쪽에서는 저희가 아직 황궁에 있는 줄 알고 있거든요. 뭐, 여기 있는 걸 알게 되었다 해도 스승님 성격을 아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어허, 알릭. 너 오늘따라 말이 너무 많구나.”

스승의 뼈 있는 말에 알릭이 찔끔 어깨를 굳혔다.

‘그렇다는 건 진주탑의 다른 마법사들은 타이스 율만처럼 붉은 돌 연구에 그리 많은 관심이 없다는 뜻이겠군.’

다행이었다. 케일루사 황제가 붉은 돌을 조사하라 내준 시간은 한 달뿐인데 벌써 며칠이 지난 상황이니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방해물이 될지 모를 사항은 모조리 배제해야만 했다.

‘그래도… 안전은 반드시 챙기게 해야겠지.’

유더는 혹여나 마법사들이 붉은 돌을 잘못 건드려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칸나를 통해서도 돌의 위험성을 더욱 경고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하를 빠져나왔다.

* * *

수도에 존재하는 7벽 중, 황궁의 영역인 1, 2벽을 제외하면 일반인들이 머물 수 있는 땅은 실질적으로 3벽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어지간한 귀족 가문조차 4벽 뒤쪽에 머무를 만큼 3벽 내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제국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가장 전통 있는 명문가 중 하나인 아페토 공작가의 본가는 당연히도 3벽 구역 내에 있었다.

그곳은 3벽 내에 세워진 온갖 아름다운 건물 중에서도 가장 성스럽고 단아하기로 유명하였으나, 오늘은 내내 살얼음을 걷는 듯 위태로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성정이 유난히도 냉혹하기로 유명한 2공자 레노어 샨 아페토의 심기가 무척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거점에 아무도 없는데, 심지어는 남겨진 그 어떤 물건이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따위 보고나 받자고 내가 시간을 더 준 줄 아는가?”

“물론 아, 아닙니다 공자님.”

레노어의 앞에 엎드린 하인은 겁에 질린 채 벌벌 떨었다. 보지 않아도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란 딱지를 달고 있기에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1공자 에이셰스와 달리, 2공자 레노어는 많은 실무를 도맡아 했다. 그가 아페토 공작의 눈에 들어 조금이라도 1공자를 제칠 가능성을 높이려면 방법은 오로지 맡은 일에서 실수 없이 좋은 결과를 내는 것뿐이었다.

때문에 레노어는 요즘 들어 각성자들과 관련된 ‘연구’를 지원하는 데에 가장 크게 신경을 썼다. 그 분야는 1공자가 관심을 크게 두지 않던 부분이었기에 레노어가 성과를 낼 기회가 많다고 여겼던 것이다.

연구를 위해서는 실험대상이 될 각성자를 꾸준히 수급해 오는 것이 제일 중요했는데, 여태 그 일을 가장 잘 해 주었던 동부 거점과 며칠 전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근처에 있던 다른 부하들을 보내 살피게 했지만 돌아온 보고는 거점이 이미 텅 비었으며 안에 있던 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는 무의미한 정보뿐이었다.

아페토에서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본가에 있던 동부 거점관리관의 서약서가 붉게 물들었으니 그가 ‘비밀’을 유지하지 못해 죽었으리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동부 거점과 연락이 끊긴 시점을 전후하여 그곳 근처에서 엄청난 크기의 불기둥이 치솟았다 사라졌다는 영문 모를 소문이었다.

‘불이라. 동부 거점에서 마지막으로 보냈던 보고에서 마병단 소속 각성자를 잡았다고 했었는데. 그놈의 능력이 불이라고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마병단 소속 각성자를 이곳으로 데려오면 조사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었는데, 거점 자체가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마병단장인 펠레타 공작이 여태 조용한 것을 보면 지금은 동부 거점 놈들이 정말로 마병단 소속 각성자를 잡았던 것이 맞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따름이었다.

아페토 가에서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한 비밀이 흘러나갔다는 건 비상사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분명 그곳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뜻인데, 현장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보고에 의하면 현장이 그렇게 싹 정리된 지 시일이 꽤 지난 것 같다는데도 아페토 가의 주변에서는 아무런 불손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점이 더욱 꺼림칙했다.

‘차라리 일을 저지른 누군가가 이쪽에 협박이라도 해 왔으면 처리하기 쉬웠을 텐데.’

비밀을 캐낸 놈들이 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레노어의 심기를 무척 어지럽혔다. 이 사실을 아페토 공작이 알게 된다면 그는 당장 레노어에게 맡겼던 모든 일을 싹 거둘 뿐 아니라, 가차 없이 멀리 보내버릴 터였다.

“물건 하나 남기지 않고 싹 사라졌다는 건 거기 있던 다른 놈들이 작정을 하고 관리관을 죽인 뒤 도망을 갔거나, 아니면 도망칠 시간도 없이 어딘가에 잡혔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 아니냐. 혹 디아카 가 쪽에서 눈치를 채고 손을 썼을 가능성은?”

디아카 공작가는 이 일을 일으킨 범인으로 추정되는 가장 강력한 후보였다. 동부는 애초에 그들의 영역이었고, 침입자를 발견했다면 분명 살려두지 않았으리라. 그 과정에서 아페토 가가 연루되어 있음을 알아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여태까지 조용히 있었을 리 없어. 그 좋은 정보를 쥐었다면 그쪽도 우리처럼 연구를 시작하는 낌새를 보였거나, 아니면 이쪽에 무어라 티를 냈겠지.’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는 합니다.”

레노어의 생각 따위는 모를 하인이 그저 쩔쩔매며 머리를 조아렸다.

“조사를 나간 이들이 말하기를, 며칠 전 디아카 가의 막내 공자께서 마침 그 근처에 기사단 훈련을 하러 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혹 훈련 도중 저희 쪽 이들과 마주쳤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디아카의 막내라면 키올레 다 디아카 말인가.”

키올레의 이름을 언급한 레노어의 표정이 한심하게 여기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찡그려졌다.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제가 잘나서 기사가 된 줄 아는 그 멍청이는 그 정도로 능력이 좋지 못해. 녀석이 흔적 하나 안 남기고 그런 대담한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했더라면 디아카 가의 우환도 진작 하나쯤 줄었을 거다.”

“제가 모자란 발언으로 공자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인이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땅에 찧었다.

“됐다. 그 외에 다른 특이사항은?”

“…….”

“뭐라도 좋으니 말해라. 여기서 네놈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면 뒤는 없을 테니 말이다.”

소름 돋는 협박에 몸을 떨던 하인은 필사적으로 제가 그간 동부 거점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나누었던 정보를 기억하려 노력했다. 공포에 질린 상태라 알던 것도 머릿속에서 전부 지워질 지경이었으나, 간신히 어떤 작은 정보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도, 동부 거점에 있던 이들은 근처 마을에서 조력자를 몇 명 구했었다고 했습니다. 그 조력자들을 찾아내면 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조력자라.”

전 대륙에 흩어진 아페토 가의 ‘거점’은 아주 많은 일을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는 타 공작가를 덮어놓고 따르는 세력들을 와해시키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효과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계승이나 상속에 불만이 있는 젊은 귀족들을 포섭해 조력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자들이 과연 얼마나 알까 싶지만… 좋다. 안 해 보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러면 디아카 가의 동향과 더불어 그 조력자들을 찾아내 조사한 뒤 결과를 다시 보고하도록.”

“예!”

레노어는 하인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본건물 뒤쪽에 마련된 별채로 향했다. 별채 지하에는 감옥이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고통의 신음이 흘러나오는 살풍경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흰 사제복 차림의 태양신 사제들이 돌아다니고 있어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그 사제 중 가장 고급스러운 성표 목걸이를 한 이가 레노어를 돌아보고는 곧바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2공자.”

“숙부님. 연구 진행은 어떠십니까?”

레노어에게 숙부라 불린 중년 사제는 누가 보아도 혈연임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닮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현 아페토 공작의 배다른 동생 중 한 사람인 벨트레일 샨 아페토로, 어릴 때 일찌감치 태양신 신전에 들어간 덕에 지금은 교황 바로 아랫자리인 12인의 원로사제 자리까지 오른 자였다.

겉보기에는 더없이 청렴해 보이나 알맹이는 그와 거리가 먼 사제가 온화하게 웃으며 레노어의 어깨를 두드렸다.

“언제나와 같지요. 저희는 그저 신의 뜻을 지켜볼 뿐입니다.”

신의 뜻. 고통에 질린 신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가운데 듣기에는 상당히 기괴한 말이었으나 그를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2공자가 저번에 보내 준 이들 중에서도 아이를 가진 이는 결국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아이를 가지는 데에는 아무래도 단순히 발정기에 들어섰을 때를 노리는 것 이상의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렇군요. 저들의 변화를 살피신다던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레노어의 질문에 벨트레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을 조사하려면 본디 힘을 가지고 있던 각성자를 더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제였던 이가 각성하였을 때와 마법사였던 이가 각성하였을 때는 아무래도 변화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 각성자를 구한다면 더 좋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어렵겠지요.”

아직 전부 다 뚜렷한 결과는 내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소식뿐이었다. 하지만 숙부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레노어는 그저 길게 숨만 내쉬었다.

‘벌써 1년 넘게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했다니. 에이셰스, 그 자식이 안다면 배를 잡고 웃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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