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아직은 뭐, 보다시피 별 것 없네. 방어진을 쳐 두어서 이제야 겨우 좀 살펴보겠구나 싶은 정도지. 제대로 살펴보려면 아직 하루 이상은 더 진을 쳐야 할 것 같더군. 내 제자가 조금만 더 진을 빨리빨리 만들었어도 벌써 진행됐을 텐데 말이야. 쯧.”
“스승님. 절 죽일 생각이십니까? 저보다 결계진을 빨리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전 대륙을 통틀어도 몇 명 없습니다!”
멀리서 스승의 투덜거림을 들은 알릭이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지만 타이스도, 유더도 그의 말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군요. 칸나와 이야기를 어느 정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오. 그 대단한 능력을 지닌 젊은이 말이지.”
타이스의 얼굴 위로 흔쾌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의욕 넘치고 친절하더군. 그 칸나란 젊은이가 들려준 이야기들 덕분에 저 붉은 돌에 어떤 식으로 접근하면 좋을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네.”
물론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하고 덧붙였으나 그 말은 유더에게 큰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정말이십니까?”
“물론이네. 들어보겠나?”
유더는 타이스의 뒤를 따라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장소로 돌아갔다. 알릭이 어느새 끓여 둔 차를 테이블에 준비한 상태였다.
“드세요. 제가 직접 채취해서 말린 꽃으로 끓인 차입니다.”
“진주탑 뒷마당에서 키우는 꽃을 딴 것이지. 마법사들이 연구용으로 키운 것이라 다른 건 몰라도 기력을 끌어올리는 효과 하나는 최고라네.”
뜨거운 찻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효과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싸하고 시원한 향 덕분에 키시아르의 숙소에서 먹었던 케이크의 단맛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가. 향이 아주 좋지 않나?”
“네. 좋습니다.”
유더의 답을 들은 타이스가 마디가 툭 불거진 손가락 끝으로 보이지 않는 찻잔 주변을 휘휘 휘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말린 꽃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것만으로도 이런 생생함과 진한 향을 다시 맛볼 수 있다는 것! 참 신비한 일이지.”
“…….”
“이걸 볼 때마다 말라 죽은 것만 같던 조그만 꽃 안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과 힘이 잠들어 있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게 된다네. 그래서 나는 이 차를 아주 좋아하지. 내가 54년 전 처음으로 연구했던 이 차의 효능만 해도…….”
붉은 돌에 어떻게 접근할지를 이야기한다더니, 노마법사는 다른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나의 마법의 근원 연구는…….”
꽃차 이야기에서 시작된 잡담이 마침내 타이스 율만의 연구 역사로까지 넘어가자 제자 알릭조차 어쩔 줄 모르고 유더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짜증이 날 만한 상황이었으나 유더는 그를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그가 표정의 변화 없이 제 말을 잠자코 듣고 있는 것을 본 타이스 율만의 입가에 미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어이쿠. 미안하네. 본론을 앞두고 내가 그만 다른 이야기를 계속 했구먼. 지루하지 않았나?”
“아닙니다.”
눈앞에서 자기 할 말만 해대는 사람을 상대로 얌전히 앉아 있는 것쯤은, 이전 생에서 성격에도 안 맞는 온갖 회의에 끌려나가야 했던 유더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타이스 율만이 이유 없이 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사실, 내가 이 이야기들을 한 이유는 따로 있다네.”
‘역시.’
유더는 제 생각이 맞았음을 느끼며 차를 한 모금 더 삼켰다.
“붉은 돌을 회수해 온 것이 자네들이니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저 돌은 겉보기와 달리 안에는 아직 많은 힘이 잠들어 있지 않나?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서 이 꽃차를 만드는 방법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차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돌에 접근하겠다고? 유더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위에 물이라도 부어보실 생각이십니까?”
“허허허. 비슷하지. 부어볼 것이 물은 아니네만.”
유더의 말에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타이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칸나에게 이야기를 듣자 하니… 저 돌은 자네들과 같은 각성자의 힘이 닿으면 안에서 폭발을 일으킨다면서?”
그 말을 들은 순간, 유더는 노마법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빠르게 알아차렸다.
“붉은 돌 안에 남아 있는 힘을 강제로 전부 폭발시켜 발산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네.”
“위험합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는 답이었다.
“저 돌의 힘은 이제까지 겪어본 다른 힘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조금만 닿아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발산될 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실수로 붉은 돌의 힘에 닿았다가 피해를 본 것이 유더 자신이었으니 그 돌의 치명적인 위험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오랫동안 줄곧 연구해 온 분야가 마법의 근원과 힘 자체에 대한 것이라는 걸 방금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마법과 붉은 돌의 힘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지만도 않다면?”
타이스가 느긋하게 대꾸하며 미소를 지었다.
“보게, 유더. 우리가 마법으로 친 방어진이 붉은 돌의 힘을 확실하게 막아내고 있지 않나. 그렇다는 건 두 개의 힘이 서로 다를지언정 영향은 서로 미칠 수 있다는 뜻이네. 막아낼 수 있다면 빠져나온 힘을 가두는 것도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해.”
유더는 순간 대답할 말을 잊고 미간을 찌푸렸다. 타이스의 말대로 그와 제자가 친 7중 방어진이 현재 붉은 돌이 발산하는 기운을 막아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기운과 폭발하는 기운이 같을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 할지라도… 여러 겹을 둘러도 이 정도밖에 막지 못한다면 폭발하는 힘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가둔다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만.”
“일단 발산된 힘을 일정 공간 안에 가두는 것 자체는 지금 쳐 둔 저 진을 더욱 강하게 보강하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네. 그러고 나서 매개체를 이용해 옮겨 담아야겠지.”
“…옮겨 담는다고요?”
“그래. 마도구처럼 말일세. 유더 자네는 마도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이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마도구를 만드는 원리는 특정 마법이 발현되는 순간의 마력 형태를 그대로 매개체를 이용해 박제해 두는 것일세. 얼마나 잘 가두어 둘 수 있는지는 매개체의 질과 도구를 만드는 마법사의 실력에 달려 있을 뿐, 원리 자체는 간단하지. 바로 그 원리를 이용해 보자는 거야.”
마도구를 만드는 일이 정말로 그리 간단했다면, 그것을 만들 줄 아는 마법사들이 그리 귀하신 분 취급을 받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타이스는 그것이 아주 쉬운 양 말하고 있었다.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특정 마법만 쓸 수 있도록 마력 형태를 박제하는 과정 없이 순수하게 공간 안을 채운 힘만 가두려 하는 것이니 어떤 의미로는 마도구 만드는 것보다 더 쉬울 수도 있네.”
어려운 설명이었으나, 솔직히 말해 꽤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인 것만은 확실했다. 타이스의 말대로 붉은 돌에서 힘을 따로 빼내 분리할 수 있다면, 그들은 붉은 돌과 돌의 힘을 따로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된다.
힘이 빠져나간 돌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을 테니 칸나에게 조사시키면 될 것이고, 매개체에 담은 힘은 마법사들에게 조사하게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유더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멈칫 표정을 굳혔다.
‘…잠깐. 이전 생에서는 어땠을까.’
이전 생에서 진주탑으로 향한 붉은 돌은 이후 힘을 잃고 ‘세계구’가 되어 돌아왔다. 유더는 오랫동안 세계구가 원래 지니고 있었을 힘이 어디로 갔을지 찾아 헤맸지만, 진주탑이 무너지며 모든 관련자와 정보가 소실된 탓에 죽을 때까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전 생에서 진주탑으로 향한 붉은 돌을 조사한 이는 지금처럼 타이스 율만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그는 그때도 분명 지금과 같은 방안을 떠올렸을 것이었다.
‘그리고… 성공했던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돌아온 세계구가 그리 텅 빈 껍데기뿐이었을 리 없다.
그가 붉은 돌과 그 안의 힘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 맞다면, 분리해낸 힘은 어디로 갔을까? 누가, 대체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단 말인가.
‘현황 케일루사 라 오르는… 그는 세계구가 돌아오기 전 죽었었어. 키시아르는 어땠지? 세계구가 돌아오기 전에 은퇴했었나? 카치안 황제는 그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 어쩌면 진주탑 측에서 아예 분리된 힘을 감추었거나, 혹은 소실된 것일지도 모른다…….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려니 어지럽게 두통이 일었다.
유더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잘 이야기하다 말고 별안간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 여긴 듯 타이스 율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 생각이 그렇게나 무모하게 여겨지는가? 표정이 영 좋지 않군그래.”
“…아닙니다.”
그래. 과거에 어쨌든 무슨 상관인가. 붉은 돌도, 타이스 율만도 현재 모두 이곳에 있으니 답은 이제부터 새로 찾아내면 그만이었다.
‘아무튼 하나 정도는 확신해도 되겠군. 타이스 율만의 가설이 실패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것.’
유더는 평정을 가정하며 입을 열었다.
“율만 님의 말씀은 분명 일리 있게 느껴집니다만, 설령 힘을 분리해 가두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저 정도 힘을 가둘 매개체가 있겠습니까.”
그의 표정이 갑자기 좋지 않아진 이유가 매개체 때문이라 판단한 듯, 타이스는 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건 이제부터 시험을 해 봐야겠지. 가장 강한 매개체로 알려진 것들을 일단 몇 개 알려줄 테니, 공작님께 자네가 말씀드려주면 좋겠네. 그 정도쯤은 공작님께서 힘써 주셔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어떤 것들입니까.”